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Oct 31. 2020

지금이 가장 빛나는 시

영화: 패터슨 (짐 자무시 감독, 2016)


  영화 <패터슨>은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풍성하다면 풍성한 일주일을 담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버스를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그 날 분량의 창작 혼을 발휘해 무언가를 리폼하고 있고, 저녁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서 동네 바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들이켜는 삶. 본인의 이름과 같은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그렇게 매일 비슷하지만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패터슨의 일주일이다.



  작은 진폭으로 일상은 매일 다르게 변주된다. 어떤 날은 아내가 컵케이크를 굽고, 어떤 날은 기타를 사고 싶다고 한다. 어떤 날은 버스를 운전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남성들의 대화를 듣게 되고, 어떤 날은 이 마을에 유일한 아나키스트 십대 커플의 대화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내내 패터슨은 끊임없이, 부지런히, 쉬지 않고 시를 캐낸다. 버스를 출발하기 전에, 점심시간에, 작은 노트를 들고 앉아서 계속 쓴다. 직장 동료가 아침마다 "물어본 김에 말이야" 하면서 매일 다르게 변주되는 일상에서 자질구레한 불평을 셀 때, 패터슨은 매일 다르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적확한 단어로 붙잡아 엮으며 시를 쓴다.



  가끔 나도 시를 쓴다. 휴대폰 메모장에 [작은 시]라는 폴더가 있다. 다듬다 만 시, 언젠가 빚어내고 싶은 시어, 만족스럽게 완성한 시, 다시 읽다가 반쯤 지운 시,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 그것들을 모아 언젠가 공모전에 시를 내보려고 한 적이 있다. 최소 편수에 맞추기 위해 그동안 썼던 모든 시를 다 끌어모으다가 도저히 부족해 중2병 시절 썼던 노트까지 뒤진 적이 있었다. 그 시를 모두 인쇄해 침대 위에 펼쳐놓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묶어 보면서 순서를 배열하는 내내 나라는 인간의 지난 십여 년 변천사를, 어쩌면 나의 내장 같은 것을 펼쳐놓고 있는 기분이었다. 십수 년의 장구한 시간이 불과 몇십 장 되지 않는 종이로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매일 다른 시구를 적는 패터슨이 굉장히 다작(多作)한다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패터슨 자신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다. 그는 공모전 같은 곳에 내기 위해 시를 정리하고 묶는 일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시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세상에 내놓자고 계속해서 그를 설득한다. 아내는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과 패턴을 과감하게 집안 곳곳에 드러내고, 자신 있게 컵케이크를 만들어 마켓에 내놓으면서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새로이 가슴 뛰는 일이 생기면 남편을 졸라 기타를 사고, 혼자 뚱겨 보면서 이미 포크 아티스트가 된 것처럼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남편의 시를 마음 다해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분명 아름답고 다정하다. 그리고 글은 분명 읽는 사람에게 닿아야 하니 사실 그의 말이 맞다. 패터슨이 그토록 좋아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또한 그의 시를 소리쳐 드러냈기에 지금 패터슨의 손에 시집이 놓여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런 마음은 글을 쓰고 싶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옛날과 달리 꼭 등단을 하거나 학력이 높거나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니어도 책을 낼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등단보다 셀럽이 되는 쪽이 책을 내기엔 훨씬 빠르고 쉬울지도 모른다. 우후죽순처럼 책이, 작가가 솟아나는 세상. 그곳에서 우직하게 얼굴을 붉히며, 아직은 드러내지 않을 시를 쓰는 사람은 확실히 섬 같은 구석이 있다.


  시집 한 권 내지 않았어도, 늘 자신을 버스 운전기사라고 소개해도 패터슨에게는 그런 섬 같은 시인의 면모가 보인다. 먼 훗 날 패터슨 시의 누군가가 (예를 들면 엄마와 언니를 기다리며 시를 쓰던 여자아이 같은 누군가가) 패터슨의 초기 시집을 들고 걸어 다닐 것만 같은, 지금 이 모습은 그 시대의 프리퀄 같다는 예감에 휩싸인다. 좋은 시는, 시인은 시간을 초월하므로 과거는 먼 미래를 닮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못해서, 조바심이 난다. 더 좋은 문장을, 더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길을 잃는다. 글을 향한 짝사랑은 그렇게 갈지자걸음을 걷는다. 정말 좋은 문장으로, 좋은 이야기로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어 하다가도, 어떨 때는 그냥 내 이름자 박힌 책과 작가라는 타이틀과 거기서 나오는 지적 허영심만 쏙쏙 취하고 싶은 것 같다. 세상에 인정받는 글을 보며 부러워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 마음이 비단 시와 글에 대한 마음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정답을 모르고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의 태도로 사는 게 문제라는 걸. 고쳐야지 마음 먹지만 그것조차 하나의 과제로만 부여하곤 하는 스스로를 잘 안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일본인이 던진 말처럼, 때로는 여백이 상상의 여지를 주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패터슨이 일상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는 지금, 아직 등단 전이고 원고 청탁이나 강연 요청이 들어오지 않고 그에 대한 비평이 들려오지 않는 지금이 그에게 가장 빛나는 시를 쓸 수 있는 때인지 모른다. 정말 그의 정수가 흘러나오는 건 지금일 것이다. 누군가의 초기 작품이란 가장 거친 날것으로 그가 드러나는 방식이니까. 가장 그다운 것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니까.



  그 사실이 기묘하게 나에게 위안을 준다. 지금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시간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것들을 이루어가는 시간이라는 점이. 패터슨이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그냥 좋은 사람 소리 듣는 평범한 이웃처럼 웃으며, 그런 날들을 담담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보면 지금이 그의 가장 빛나는 시라는 생각이 드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어느새 조바심을 내려놓고, 여백이 주는 여지를 즐길 수 있다.



  패터슨이라는 캐릭터뿐 아니라 이 영화 자체가 나를 그렇게 가르친다. 개가 납치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협박처럼 들리는 젊은이들의 경고 이후에도 패터슨은 여전히 개를 바 밖에 묶어놓는다. 조금 머뭇거리다 개에게 "납치당하지 마."라고 말해두는 게 전부다. 당연히 납치 예방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부부가 개를 잃어버리게 될까 계속 불안했다.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쏴야 한다며? 어디서 체호프의 총 얘기는 주워듣는 바람에. 그러나 그건 나만의 불안이었다. 단편적인 지식은 나름의 쓸모가 있지만, '그래야 한다'라고 사람을 옭아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 순간 누군가의 정의를 기다린다. 시란? 시는 이런 거야. 시는 어떤 순서로 묶어야 하지? 이런 규칙에 따라 묶어야 하는 거야.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바보짓을 자꾸만 반복한다. 이런 건 문예창작과에 갔으면 배웠으려나?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툭하면 전공을 돌아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되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누군가 맞다고, 혹은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길 기다린다.


  시는 그런 마음 바깥에 있다. 그리고 거기에 시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평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모른다. 다만 지금 쓰는 대로, 나의 시들은 내가 묶고 싶은 대로, 그 느낌과 그 속도가 맞다. 잘 되지 않으면 잘 되지 않는 대로 담담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맞다. 마음이 또 불안해지거든 눈을 들어 패터슨을 보자. 그리고 조용히 작은 노트를 펴자. 다시 지금의 빛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이전 09화 빛나는 외톨이별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