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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인마가 나오는 스릴러 영화도,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도 보지 않는다. 정확히는 보지 못하는 쪽에 가깝다. 안락한 관객석에서도 내 마음은 판타지를 즐길 수가 없다.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아무리 자신에게 되뇌어도, 공포는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진득하게 내게 들러붙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때는 어린이 잡지 한구석의 조악한 괴담 때문에 한참 밤잠을 못 이뤘고, 누가 나를 내려다볼 것 같은 막연한 공포 때문에 이불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잠들곤 했다. 그 시절의 괴담들을 웃어넘길 수 있게 된 지금도 이불에 폭 싸여 자는 버릇만은 남아 있다.
한동안 ‘내가 못 보는 영화 리스트’는 살인마가 나오는 영화 위주로 업데이트되곤 했는데, 요즘은 좀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대세인 것 같다. 당연히 못 본다. <워킹 데드>는 물론이고 <웜 바디스>조차 못 보는 인간이 나다. 사람들이 영상미를 극찬해서 꼭 보고 싶었던 <킹덤>은 긴장감 가득 안고 1분에 한 번씩 멈춰가면서 10분인가 봤다. 아직 아무도 죽기 전에 서둘러 하차했다. 좀비 무섭거든. 그런데 좀비 자체보다는 사람이 좀비가 되면서 황폐화된 사회 자체,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더 무섭다.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다 나는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는 걸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소외하고 배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란 너무 끔찍한 곳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현실에도 조금씩 끔찍한 것들은 있다. 과도하게 늘어선 괴상망측 키오스크 기계, ‘굳이 저걸 영어로?’ 싶은 무분별한 외국어 남발, 자연재해 소식조차 서울에만 집중된 뉴스… 모습과 정도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좁은 폭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닿지 않는다는 점만은 똑같은 각양각색의 것들. 나 또한 때론 그 좁은 폭 안에 있기도 하니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하면… 이 장애물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면 우리에게 운신할 폭이 있었을까.
코로나19는 그래서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모든 위기는 약자를 먼저 친다. 약자만 갈려 나가는 위기일 때는 위기로 잘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코로나19는 우리 모두에게 크고 작은 괴로움을 선사했지만, 정말 가장 괴로운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곳에 있다. 예를 들면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없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교육부터 친구와 급식까지 박탈당한 어린이. 그의 혼밥과 나의 혼밥은 같을 수가 없다. 경로당과 교회에서 친구를 만나는 것이 사회생활의 전부인 시골 노인의 삶. 그의 사회적 거리두기와 나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자가격리와 많이 다를, 누군가의 자가격리를 상상하면 마음이 괴로웠다.
자가격리 어플을 다운로드하면서 이게 어려울 누군가를 생각한다. 하나씩 차근차근 따라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사람은 대개 익숙하지 않은 일을 좀처럼 하려 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다. 엄마는 ATM을 편하게 사용하면서도, 키오스크 화면에는 손대지 않으려고 한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면 하기야 하겠지만, 언제 뒤로 줄이 길어질지 모르는데 아이스크림이나 햄버거를 먹기 위해 낯선 화면을 차분하게 읽기엔 마음이 바빠 싫다는 것이다. 노인들도 스마트폰을 다룰 수 있지만, 자가격리자 어플이 복잡하게 만들어진 건 아니라지만, 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자가격리 기간의 식사는 어떤가. 내 핸드폰에는 배달 어플이 종류 별로 깔려 있고, 집과 회사 주소가 각각 저장되어 있고, 카드를 연결해 두어 결제도 자동으로 된다. 내겐 일상적이고 당연한 이런 일이 누군가에겐 벅찬 일이겠지. 마트 배달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다행히 나라에서 레토르트 식품 꾸러미를 챙겨 보내주지만, 선택권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참고로 나는 식품 꾸러미 대신 돈을 받았다. 추석 기간과 맞물려 그랬는지, 지자체별로 다른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 괴로운 건 인간관계다. 지난 1월, 아빠와 같이 일한 사람이 확진자가 되어 아빠가 자가격리하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봤다. 같은 사유로 같은 기간 자가격리한 아저씨와 한 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시는 거다. 평소 아빠는 통화를 길게 하지도 않는 편인데. 중년의 두 아저씨가 무슨 얘기를 한 시간씩 했을까? 두 아저씨 얘기야 귀엽게 들었지만, 모두에게 비좁아진 코로나19의 사회가 어떤 누군가에게는 온 세상이 차단된 시간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중에도, 자가격리 중에도 내겐 늘 누군가와 연결될 방법이 있다. 친구들과 줌으로 랜선 짠! 을 외치고, 게더타운에서 아바타를 뽈뽈 움직이며 수다 떨고 음악을 같이 듣는다. 영화나 드라마를 같이 보면서 실시간으로 이야기하는 왓챠 파티도 언제든 할 수 있다. 자가격리를 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친구들은 심심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그렇게 만나자고 했다. 한 친구는 얼마 후에 조성진 리사이틀을 온라인 라이브로 내보낸다며 정보도 보내주었다. 미리 결제해 두었다가 당일에 그 섬세한 연주를 행복하게 들었다. 혼자이되 아주 혼자는 아닌 날들이었다.
늘 혼자인 삶이란 어떤 마음일까. 자발적으로 선택한 혼자가 아니라, 세상의 여백으로 밀려난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면, 외딴 공간의 외딴 마음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 여백은 저주받은 자들의 섬이 아니라, 누구든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공간이니까.
이 공포는 내게 너무나 선명해서, 아마 앞으로도 나는 좀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좀비 영화나 디스토피아물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면만이 능사는 아님을 깨닫는다. 안 봐서 잘 모르지만, 그런 영화에도 최후의 인간성은 늘 존재했던 것 같다. 인간성의 밑바닥도 보게 되지만, 인류애 또한 목격됐던 것 같다.
편치 않은 이 마음도 무럭무럭 자라 지혜로운 인류애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타자화하지 않고 여백을 메울 방법을 고민하며, 또 하루의 밤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