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생활의 문법

(5)

by 선이정

고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늘 애매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아예 ‘지방’으로 분류되기엔 수도권에 속한 지역, 으레 한 번쯤은 들어보거나 많이들 놀러 다니는 지역, 그러나 깊이 들어오면 웬만한 지방 중소도시에 견줄 수 없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 고향이 파주라고 하면 “파주가 무슨 시골이에요?”하는 답이 돌아왔지만, 집 앞에 커다란 밭과 둑방, 산으로 온통 초록색인 우리 집에 와본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으리라. 그들이 생각하는 파주는 헤이리, 출판단지, 아웃렛이니까. 우리 집보다는 외려 서울과 더 가까운 곳이다.



지금은 경의중앙선이 잘 되어 있어, 지하철로 연결된 생활권이 됐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우리 집에서는 경의중앙선 종점 역까지 제법 한참 가야만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경의선은 한 시간에 한 대 있는 기차였다. 서울에 갈 때면 기차여행 기분으로 자주색 시트에 몸을 얹곤 했다. 나로서는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작정하고 한두 번 정도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서울역에 도착하면, 바로 옆 역인 시청역 가는 것조차 내겐 심각한 과제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지하철 노선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던 기억이 난다.


스무 살에 입학한 대학은 경의선으로 통학할 만한 거리에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자식을 웬만하면 집에 데리고 있으려던 부모님의 계획은 대학생들의 술 문화에 장렬히 꺾였다. 새 학기 시작한 3월 첫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취해서 돌아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야만의 시대였는데, 나도 그 야만의 일부였으므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집에 가는 방향이 같은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지하철을 타고, 경의선에 갈아타기까지 했다. (지하철을 탄 기억이 없다. 어떻게 갈아탔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는 당시의 선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몽롱한 기억은 조각조각 남아있다. 잤는지 기절했는지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는 당시의 나를 깨우고, 일산 사는 선배가 내리면서 “나 이제 내린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들어가면 꼭 문자해.” 말했던 기억. 가물가물한 열차 풍경. 나는 경의선 종점까지 마중 나온 엄마 차에 실려, 그 와중에도 도착하면 문자하라고 했던 선배들에게 하나씩 문자를 보낸 다음 마음 편히 잠들어 귀가했다. 별생각 없던 스무 살 내겐 못할 일도 아니었지만, 엄마에게는 심란한 일주일이었다. 결국 엄마가 먼저 내 자취를 선언했다.


이미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괜찮은 자취방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한 집에서만 오래 살았던 내게도 엄마에게도 부동산은 낯선 세계였다. 일단 임시로 고시텔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비교적 깔끔하고 넓은 편인 고시텔이 꽤 있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다음 주, 백팩이며 타포린 백에 간소한 짐을 챙겨 아빠 차에 실었다. 엄마의 배웅을 받고 집을 나서는데, 그게 뭐라고 눈물이 났다. 아빠가 어이없어했다. 먼 거리도 아니면서, 주말마다 집에 올 거면서. 그즈음 일기에 썼던 것 같다. 이제는 정말 한 집에 살지 않는구나, 라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고.


그 후로 생활 터전을 몇 번 옮기기는 했지만, ‘거주지’라 하면 내 안에는 단박에 두 가지 풍경이 대조되어 떠오른다. 나고 자란 파주의 시골 풍경과 서울의 도시 풍경. 이건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애쓴 시간의 흔적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에 뚝 떨어졌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까지, 도시 살이에는 적응이 필요했다.



시골에서는 무엇이든 나누는 게 자연스러웠다. 앞집 밭에서 뭔가 쑤석거리고 있다 싶으면 그날 오후에는 여지없이 집 앞에 파나 배추 따위가 조금 놓여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른을 만나면 인사하는 걸 당연히 여겼다.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이 동네의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내가 모르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인사를 받은 어른들 또한 나를 누구네 집 큰딸이라고 바로 알아보곤 했으니까.


도시에서는 반대였다. 대학교 근처의 원룸을 전전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적당한 소리, 적당한 냄새, 뭐든 적당한 것까지는 들려도 안 들린 척, 맡아도 못 맡은 척하며 살아야 했다. 문법을 처음 배우는 외국인처럼, 각 상황에 대처할 말과 행동을 몇 번이나 고르고 골라야 했다. 철저한 분리, 내겐 그것이 도시의 문법 제1문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집이란 원래 이렇게 소음에 취약한 건물인가?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옆집 수도를 켜면 그 소리가 들려, 옆집 사람의 귀가 시간까지 얼추 알 수 있는 게. 옆집 사람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아 저 노래 제목이 뭐였지…’ 생각하다, 들리는 대로 검색 창에 받아 적어 제목을 찾으면서 헛웃음을 짓는 게. 그래도 서로에게 철저하게 투명인간이 되어주는 게 최선의 배려라는 게.


지금은 완전히 적응해서 나 또한 적정 거리를 지킨다. 혼자 있는 일이 전처럼 어렵지 않은 지금. 이 도시에 나 혼자 뚝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아도, 실은 그렇지도 않다는 걸 잘 아는 지금. 그럼에도 기분이 좀 그렇다. 낮에는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음식 배달원이 공동 현관을 열어 달라고 요청할 때 외에는 좀처럼 누르는 이 없는 초인종을. “누구세요?” 물으니 “보건소에서 키트 가져왔어요.”라는 대답이, 한 중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추석이 코앞이지만 아직 낮에는 덥다. 최근 늘어난 확진자 수를 생각한다면 나처럼 자가격리하는 사람은 그 몇 배로 늘어났을 테니, 모르긴 몰라도 그 또한 그만큼 바빠졌을 테다. “네!” 대답하며 공동 현관 여는 버튼을 눌렀다. 배달을 마친 분이 초인종을 울리거나 문을 두드리면 감사하다고 외치려고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대면 배달은 분명 우리의 암묵적 합의를 수면 위로 올린, 이 시대에 꼭 맞는 배달법이다. 자가격리 기간에도 덕분에 배달음식을 받아먹을 수 있었고, 평소에도 덕분에 여러 모로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이라 감탄하며 좋아했다. 그럼에도 그 순간만큼은 어쩐지 조금 맥이 빠졌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애초에 비대면으로 받겠다고 선택하고 배달비를 내는 음식 배달과 달리, 사회의 공공성에 의존하는 이 순간만큼은 목소리라도 내어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나 보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좀 그렇다. 갑자기 홀로임을 실감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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