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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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나의 MBTI는 10년째 변함없이 ENFP지만, 그 앞글자가 과연 ‘E’일까, 그래도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아닌가 매번 의심했다. E와 I의 비율이 얼추 비슷한 편이라 더 그렇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 집안에 혼자 있는 시간과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 둘 다 비슷한 빈도로 필요한 사람이다. 그 결과 나가면 안 들어오고 들어오면 안 나가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이때. 친구들은 연락을 자주 하라고 했지만, 이따금씩 카톡으로 먼저 안부도 물어와 주지만... 모처럼 이어진 추석 연휴까지 있는 마당에 그 말을 넙죽 물고 연락을 이어가기엔 좀 그렇다. 이제 다들 각자 일상이 바쁘고 휴식이 필요하단 걸 잘 아는 어른이니까. 물론 속내는 별로 자란 것 같지 않지만 아무튼 외형은 어른이니까, 나는 어른스럽게 외로움의 일부를 혼자 해결해 보기로 한다.


그래서 자가격리가 결정된 날 퇴근하자마자 한 일은, 정갈하게 빙고판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라면, 그동안 바빠서 못 본 책과 영화를 실컷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이 많으니까 현실적으로 크기는 3x3으로 작게 그리고 목표는 잡지 않았다. 이 빙고의 이름은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다. 줄여서 쉽살재빙.



나는 영화와 책(특히 소설)을 좋아한다. 보통 자기소개서 취미 란에 기재되는 가장 흔한 단어(‘독서’와 ‘영화 감상’)라서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지만, 스스로는 확고한 이유를 갖고 있다. 사람 이야기라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나의, 우리의 외연을 넓히는 경험이라서 좋아한다. 특히 언젠가부터 대책 없이 씩씩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동한다. 지리멸렬한 악이 아무리 깊어도 꿋꿋하게 맞서는 씩씩한 마음, 캔디처럼 항상 밝고 사랑스러울 수 없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는 단단하고 담담한 태도에 늘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너무 좋은데, 정말 좋은데... 문제는 영화 한 편, 책 한 권에는 생각보다 큰 에너지가 든다는 것이다. 보통은 저녁에 유튜브 배속재생해서 웃다가 잔다. 현실을 잠깐 내려놓는 데서부터 많은 의지가 필요하므로. 영화는 가급적 극장에서 보는 이유도 그래서다. 잠시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암전된 세상에 들어가면 가장 쉽고 빠르게 깊이 몰입할 수 있다.



집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 일 생각부터 잡생각까지 스멀스멀 올라오고, 괜히 저쪽의 먼지도 눈에 들어오고, 핸드폰을 자꾸 열어보게 되고. 구독료를 성실하게 납부하지만 넷플릭스나 왓챠를 이용하는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결국 유튜브 프리미엄까지 결제하게 되었다.) 보더라도 퇴근 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작품만 찾게 된다. 정말 꼭 보고 싶었던 작품이라도, 무게감이 있거나 잔잔한 것들은 ‘찜’ ‘보고 싶어요’ 목록에만 빼곡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오죽하면 찜하려고 구독하나 싶을 정도로.


사놓고 안 읽은 책은 또 얼마나 많은지. 서점을 산책하듯 걷다가 책을 두어 권씩 사 들고 오는 건 내 오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라 어쩔 수 없다고 늘 핑계를 댄다. 사놓으면 언젠가 반드시 읽긴 하니까 낭비라고 할 수도 없고. 가끔 양심에 찔리긴 한다. 몇 달 후도 아니고 몇 년 후에 읽는 책도 꽤 된다는 것이.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반가운 책을 마주칠 때마다 “어? 저 책 우리 집에도 있어. 아직 안 읽었지만.”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는 것이.


이 날도 여섯 권을 샀다.


그렇게 미뤄온 작품들 중 자가격리자의 마음을 너무 무겁게 하지 않을 것들로 골라 보았다. 지금 내 마음의 상태를 고려해 몇 가지 소재는 아예 덮어놓고 배제했다. 예를 들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보려다 못 본, 넷플릭스에 벌써 들어온 <혼자 사는 사람들>. 이 제목은 지금 볼 것이 아니야. 집에 굴러다니는 이면지에 선을 반듯하게 긋고 정성껏 글씨를 쓴다. 고르기만 했는데 벌써 뿌듯하다.






밀접 접촉자-자가격리자로 판정을 받으면서, 어디로도 이동할 수 없다는 선택의 제한이 생기면서, ‘일상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과 통제할 수 없는 일로 나누어져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오래 전의 누군가가 되뇌었다는 기도의 말을 떠올려 본다.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은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제가 바꿀 수 있는 일에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위대한 성인은 그렇게 기도했다지만, 범인인 나는 내가 바꿀 수 없게 되어버린 일상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게 좀 어려웠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시선을 돌리는 것. 바꿀 수 있는 일에 집중하여, 일상을 부단히 살아나간다는 감각을 놓지 않는 것뿐이다.


그렇게 영화와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더 발견한다. 맘처럼 되지 않는 것 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영화와 책은 내가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작지만 커다란 세계다. 여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가끔은 거기서 새로운 추억이 맺히거나 인생이 바뀌기도 하는. (그래서 남의 인생 영화 얘기 듣는 거 정말 좋아한다.) 자가격리자의 소박하고 단출한 하루에서 펼쳐질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 갈 수 있는 가장 멋진 곳이다.


그래서 빙고는 얼마나 했을까? 자가격리 기간에는 고작 영화 두 편, 책 두 권에 빗금을 그었다. 아직도 빙고 판을 냉장고에 그대로 붙여놓고, 서서히 채워 나가고 있다. 채우는 속도조차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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