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무 데도 갈 수 없으니 답답해서, 저녁마다 금빛 노을 아래 바닷가를 산책했다. 밤이 되면 달빛 아래 부드럽게 출렁거리는 바다에 풍덩 빠져 잠수를 하기도 했다. 벼르고 있던 염색도 하고, 안경도 새로 하나 사서 바꿔 썼다. 모처럼 집을 정리하고 새 가구를 들였으며, 정성껏 고른 선물을 포장해 들고 친구네 집에 찾아갔다. 편지함에 들어와 있는 친구들의 편지에 답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가격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하면, 닌텐도 <모여봐요 동물의 숲> 게임 속 얘기다.
양심 고백 하나. ‘동물의 숲’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 야자하고 집에 돌아오면 닌텐도 DS로 <놀러 오세요 동물의 숲>에 찾아가는 시간을 힐링 삼았다. 비록 이건 채집과 낚시, 수렵 같은 1차 경제를 통해 채무 관계를 차곡차곡 해결하는 게임이라는 걸 느끼면서도… 부지런히 거기서 낚시를 하고 과일을 따고 곤충을 잡고 화석을 발굴해 빚을 갚고 집을 키웠다.
한동안 잊고 있던 동물의 숲이 내게 다시 떠오른 건 작년에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 출시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우리 사회의 큰 화두가 일본 불매운동이었다. 한국 근현대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비분강개를 펼쳤던 사람으로서 어찌 일본 불매운동을 거스를 수 있을까! 열심히 참았다. 참다가... 친구들과 같이 연결해서 할 수 있다는 데 무너져,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을 위해 당근마켓에서 닌텐도 스위치 라이트 중고품을 거래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랑 동시 접속도 하고 한동안 열심히 했다. 친구 걸 구경해보니 거의 도시가 다 됐던데. 뭔지 몰라도 비싸 보이는 왕관에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고 ("약간 졸부 같은데 이거?") 심지어 "더 이상의 돈은 벌어도 의미가 없다."는 발언까지 했다. ("와 이런 말은 아이유나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반면 나는 의외로 금방 식었다. 단출한 하루를 마무리하던 고등학생 때와 달리 지금은 아무래도 삶이 다방면으로 확장되어 있으니까, 출근도 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고 복싱도 해야 한다고 정신이 없어, 곤충 잡고 낚시하는 기분을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결과 여전히 집 몇 채 있는 무인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한동안 안 들어갔으니 지금 들어가면 섬 곳곳에 잡초가 무성하고, 집에도 바퀴벌레가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며, 동물 친구들 중에는 누군가 이사를 갔을지도 모른다. 엄두가 나지 않아 덮어두었다. 그렇게 내 닌텐도 스위치 라이트는 방전된 채 먼지만 쌓였다.
자가격리가 결정된 날 밤, 정갈한 마음으로 빙고판을 그린 다음 어언 반년 만에 닌텐도 충전기를 꽂았다. 켜 보니 어쩐지 눈밭이었다. 동물의 숲은 현실 시간이 동기화되어 있는데 웬 눈밭? 오랜만에 켜다가 내가 뭘 잘못 건드린 건지, 초기화라도 된 건지, 시간이 2020년 1월 1일로 되어 있었다. 2021년 9월로 시간을 맞추고 들어간다. 근데 이거 왜 이렇게 재미있지? 원래 이렇게 재미있었나? 이동의 자유라는 게 이렇게 달콤한 건가? 전에 없이 오래 동물의 숲에 머물렀다.
동물의 숲을 플레이하는 유형은 다양하겠지만 거칠게 두 가지로 묶을 수 있는데, 조개도 줍고 낚시도 하며 자연 속 생활을 쉬엄쉬엄 즐기는 유형 혹은 누구보다 빨리 빚을 갚고 집을 휘황찬란하게 해 놓는 유형이다. 온 세계가 전자로 갈 때 한국인은 후자가 많다고 하던데… 나는 소소하게 놀고 싶어서 동물의 숲을 하는 거라, 채무 변제나 집 꾸미기에 크게 힘쓰지 않는 편이다. 근데 또 한국인의 본능은 내장되어 있는지라 한 번씩 소소한 생활을 걷어차고, 박차를 가해 빚을 갚고 집을 꾸민다. 하지만 아무리 변제가 급해도 원칙은 있다. 화석이나 물고기, 곤충, 미술품은 박물관에 기증할 수도 있고 가게에 팔 수도 있는데, 아무리 비싼 걸 얻어도 무조건 박물관에 기증부터 하는 게 내 원칙이다.
오랜만에 켜서 그런지, 그전에 잘 안 해서 그런지, 처음 보는 물고기나 곤충을 많이 잡았다. 주머니 두둑하게 박물관으로 들어가면, 박물관을 지키는 NPC 부엉이가 맞아준다. 밤에는 짱짱하게 깨어 있지만 낮에는 졸고 있다. 교대근무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며 기증할 것을 내밀면 부엉이가 그 개체에 대해 설명해준다. 물고기나 곤충, 공룡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듣는 게 제법 재미있다.
문득 닌텐도 DS와 크게 달라진 점을 깨닫는다. 잠수 기능이 추가됐거나, 다른 섬으로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거나, 그래픽이 더 정교해졌거나, 그런 차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부엉이의 설명 양식이 달라졌다. 닌텐도 DS 시절 부엉이의 설명은 늘 같은 말로 끝났다. 물고기면 맛있겠다는 말, 곤충이면 소름 끼친다는 말. 설명도 물고기의 경우 맛이나 조리법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곤충을 무서워하는 건 변함이 없지만,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는 물고기에 대한 설명이 한결 PC 해졌다. 먹거리로만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 개체 자체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크기나 성질, 서식지 같은. 동물권에 대해 한 걸음 나아간 인식을 반영한 거겠지?
동물의 숲은 엔딩이 없는 게임이다. 내가 켜지 않았을 때에도 안에는 시간이 똑딱똑딱 흘러가고 잡초가 자란다. 물론 그래도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한 거니까 교묘하게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현실의 시간이 이어지는 만큼 게임 속 시간도 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세상과 조금씩 발맞추어 달라지고 있다는 것.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도 조금씩 그렇게 변해간다는 것. 어쩐지 기분이 좋다. 게임 속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엔딩이 쉽게 오지 않도록, 주변을 좀 더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뜻밖에도 쓰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