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 언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 명희 Apr 24. 2023

유현언니

유현언니가 결혼했다.

내 또 그럴 줄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니는 하기 힘든 (그래서 잘 안될 것 같은) 일을 한다고 들고와서 한다고 했다. 나는 언니가 좋으니까, 응원은 하는데 그게 진짜 잘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언니는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석사도 마치고 우리학교에 편입해왔다. 그때 언니가 스물 아홉이었을까? 서른이었을까? 내가 스물 둘이었을 테니, 언니 서른하나였겠다.  


같이 여름방학동안 의대 해부학교실 손목 혈관형태조사하는 자원활동을 여름방학동안 하다가 친해졌는데, 나는 언니가 다른 길을 이야기 하는 게 참 좋았고, 신기했다. 성적 좋고, 싹싹한 어린 후배들도 많은데, 언니가 졸업하면 선배들이 함께 일하기 부담스러워서 안 뽑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괜한 취직 걱정도 들었다.

또 무용하다가 자연계열인 물리치료학과에 와서 필수과목 수학, 물리 공부하려면 참 하기 싫겠다는 생각도 들고, 언니는 진짜 사서 고생이다 했다. 뭐 큰사람 되지 않더라도, 무용레슨하면 멋있지 않은가도 싶고.


언니는 무용하다가 부상이 있었는데, 재활치료가 한국에 제대로 되는 곳이 없어서, 무용수의 재활치료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치료사 자체도 학교별로 텃새가 있을텐데, 예체능계의 재활 치료사를 한다니... 좁은 문, 더 힘든 자리일텐데 언니가 간다고 하니말리지 않았지만, 큰 기대도 없었다. 나에게는 어쨌거나, 관계를 소중히 하고, 매사 최선을 다하는 좋은 언니였으니까. 또, 언니는 나에게 묘한 안도감도 주었다. 무얼해도 난 언니보다 9년이란 시간이 더 있다! 뭐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를 함께 다닌 기간은 딱 1년 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도 여름 해부학교실 이후에 친해졌으니, 함께 학교를 다닌 건 더 짧다.


그 해 겨울 방학 때 학교에서 하는 스노우보드 캠프에 언니와 함께 갔다. 언니와 함께일 줄 알았는데, 언니는 한두 번 타본 경험으로 생초보 반이 아닌 중급반으로 갔고, 나는 생초보반으로 흩어졌다. 결론적으로 언니는 3박4일동안 정말 실력이 수직 상승해서, 아마 마지막에 잘탔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초보수준으로 중급슬로프에는 끝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그렇다. 운동신경도 언니가 더 좋긴 했지만, 언니는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노력을 다해 차곡차곡 실력을 잘 쌓기도 했다. 동년배였으면 샘나서 안친하게 지냈을 거다.

그러나 괜찮았다.

나는 9년이 언니보다 더 있지 않은가?


시절은 쏜살 같이 지나가서, 그 이후에 따로 스노우보드를 배울 기회는 없었다.  나중에 나는 두 달 정도 회사일로 독일에 있을 때 주말마다 알프스에서 탈일이 있었는데도, 제대로 잘 못타서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 언니나이 보다 훨씬 먹은 지금 그 후로는 거의 타지 않아서, 이제 스키장에 가면 보트 탈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플러스 9년이 그렇게 지났다. 난 언니가 나이가 다 넘어서도 스노우보드에 어설프다.


이후에 나는 2년 휴학을 했고, 언니는 이내 학교 졸업을 먼저 했다. 2년 휴학하는 동안 나는 멋져보여서 다니고 싶던 독일계 의료기 회사에 취직을 했고, 언니는 물리치료사로 공부하며 일하며 지내다가 가끔 만났다. 언니는 졸업하고 함께 일하자고 했던 의사도 있었는데, 재활치료를 하는 치료사의 역할이 의사중심의 한국의 물리치료 상황에 녹록치 않았던 것 같다. 언니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치료사가 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또 토플과 미국 물리치료사 시험등이 기다리고 있을터였다. 언니는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그때 3년 정도 다니던 첫회사를 그만두고, 우연히 통역아르바이트로 따라 간 북유럽 연수에서 알게된 분과의 인연으로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비영리재단에서 일하게 되었다. 물리치료사, 외국계 의료기 회사의 경력을 살려야 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돈 벌어서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사회적목적을 위해 쓴다는 사회적기업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어 보였으니 되었다 했다. 회사 가서는 찾는 사람이 많아서 지루한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서른 살에 팀장이 되어서 으쓱하기도 했다. 가끔 언니를 봤다. 언니 is still 알바&공부중이었다. 불안도 했을 텐데, 언니는 풀타임 일을 하지 않고 계속 일하면서 공부했다. 그러다 언니는 뉴욕주 물리치료사 시험에 통과해서 뉴욕에 간다고 했다. 언니가 자리잡으면 뉴욕에 초대할테니 몇년 있다 놀러오라고 했다. 그때 언니가 마흔 즈음이었을 거다.


나는 그 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웠다. 계속 바빴고 나름 행복했다. 아이들이 세네 살 쯤이었나, 언니가 한국에 잠시 들어와서 봤다. 그동안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환자 본 이야기, 틈틈히 공부해서 Doctor of Physical Therapy 받아서 석사와 박사의 중간쯤 된다했다. 환자들을 꼼꼼히 잘 봐준 덕에 보람있는 환자도 생겼고.


이 때쯤 처음 언니가 부러웠다. 이제 9년을 내가 더 살아도 언니만큼은 안될 것 같았다. 나도 열심히 재미있게 살았지만, 내가 전문적으로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리치료 면허 고생고생해서 따놓고, 영어 조금 하는 덕으로 들어온 비영리에 와서 대학교 전공은 어디가서 내밀 일도 없게 잊혀졌다. 그때 비영리 7-8년차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국제행사하고, 사회적기업지원하는 일을 했지만 전문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또 아이들 둘 키우느라 그 외의 일을 하기도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사이 해외 mba 유학간다고 공부를 좀 했다가, 둘째가 생겨 투자대비수익 안나오니 그만두자 하기도 했었다. 언니의 자유로운 상황과 앞으로 착착 영역에서 성장하고 있는 물리치료사 언니가 멋졌다.


그 후로 한 5년 또 지난 다음이 어제.

한국에서 언니의 결혼식 피로연이 있었다. 작년에 코로나로 단촐히 결혼하고, 코로나 방역 덜한 때를 골라 한국에 왔다. 지난 번 만났을 때, 뉴욕엔 괜찮은 남자는 다 게이라고, 만날 사람 없다했는데 말이다(언니는 이성애자). 언니답게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날때까지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언니가 평소에 설명하던 이상형의 분위기가 그분에게서 났으니까. 흐흐.  뉴욕에서 교회같은 커뮤니티의 도움도, 결혼도 없이 영주권을 딴 언니.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고 진짜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났네 싶었다.


50대가 무색하게 아름답고, 앞으로의 언니가 더 기대 된다.


늘 생각했던 대로, 나는 언니보다 9년이 더 있으니까! 하지만 나도 이제 마흔이 넘었다. 늦었다고 안하지 말고, 어렵다고 안하지 말고, 정말 그냥 하고싶은 것 열심히 하자. 남들이 인정하는 들어오기 어려운 자리 제 때에 트랙에 맞춰 들어왔다고 안도하지 말고, 하고 싶은걸 찾아 어렵더라도 열심히, 잘할때 까지 하자.


주머니 털어보면 앉은자리 값, 나이 값, 본전 값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승은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