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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명희 Mar 31. 2024

연대에 기대

’나나나‘하는 연대

“...웬만하면 아무도 믿지 마세요. 우리는 가족이다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 특히 더 조심하세요. 누구에게 기대고 위안받으려 하지 마시고, 그냥 ‘인생 독고다이다.’ 생각하면서 가세요. 외로움과 친구가 되세요.”


얼마전 화제를 모은 이효리 국민대 졸업식 축사 중 일부분이다. 유튜브로 전체 영상을 찾아봤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SNS에 연설의 일부분이 회자되길래 퇴근하면서 전체영상을 찾아 이어폰을 꽂고 흘끔흘끔 보면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설 단어와, 문장 어디 하나 ‘나나나나나’ 하지 않는 곳이 없는데, 어쩐지 누구보다 그녀가 그날 그자리에 있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아 든든했다. 인생 독고다이라는데, 나는 그녀가 연대하는 사람이구나 싶다. 왜일까?


아무래도 치티치티뱅뱅을 끝까지 불러서다. 이효리는 그날의 축사를 들은 사람에게 행동으로 ‘너 그대로 괜찮다. 무엇이 되기 보다 일단 너로 살으라. 일단 그게 먼저 인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내 행동으로 보여줬다. 조명도, 음향도 녹록치 않은 그곳에서, 혹시 삑사리가 난다면 분명 유튜브에 박제되어 지우고 싶어도 영원히 못지울텐데  프로페셔널 가수로 그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그 노래를 불렀다. 불러줬다. 어쨌든 그녀 자체로.


그날도 결국 이효리는 멋있고 흠모할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설사, 아이돌 가수로서 창피한 어떤 장면이 나왔더라도 이효리는 그래도 괜찮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래서 이효리의 말이 온몸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그날 국민대를 졸업하는 사람들뿐 만 아니라, 그 영상을 몰입해 본 나까지 응원받은  느낌이다.


나는 연대하는 인간으로서 평소에 ‘나나나나나’ 하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런데 그날 ‘나나나나나’하면서도 연대의 마음을 뜨끈하게 느끼게하는 이효리를 보니, 나 역시 연대라는 단어에 정해놓은 기대가 있었구나 싶다. 나 보다 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연대가 필요가 있을 때만 모이라, 책임감을 가져라 하는 통에 후지고 구리다고 해놓고선, 나 또한 연대라는 말을 할 때 고정된 상이 있었던 게 아닐까?


2000년대에 회사에서 참여자의 학습과 교류를 위해 해외연수를 기획추진하는 일을 맡았었다.  구글지도도 이메일도 많이 쓰지 않던 시절, 장소의 근접성과 연수목적을 위해 갈 기관을 추리고, 이메일과 자동응답기 전화로 집요하게 연락해 방문을 허락받았다. 연수기간엔 연수에 동행하여 장소를 안내하고 통역하는 일, 나중의 보고서를 위한 기록을 정리했다. 몇몇 연수에 참가한 분들로 부터 ‘와, 대단하다. 고맙다’라는 칭찬을 들었다. 구성원 대부분이 40-50대 리더 분들이셨기에 내가 무엇을 엄청 잘했다기 보다, 20대 새내기 직원이 생각보다 열심히 하고, 정성을 들임에 대한 격려였을 것이다.  회사 입사 초기기도 했고, 마냥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때이기도 했다. 나는 또 현지인도, 원어민도 아닌데 연수 추진을 맡은 터라 자격지심이 발동해,  “역시 유학생보다는 못하네”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조바심도 있었을 거다. 그러던 차에 들은 칭찬이기에 제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이고, 안도하는 정도로 칭찬을 받아 들였지 어떤 사심은 없었다. 그런데 같이 갔던 회사의 리더가 우리팀 팀장님에게 조직이 꾸려서 온 연수 인데, 개인이 주목받고 칭찬받아 불편하다는 메일을 출장 중 보냈다. 출장을 다녀오니 팀장님은 그 사실을 나한테 그대로 전하면서 ‘개인’이 아닌, ‘조직’이 드러나는 게 중요함을 강조 했다. 나는 기관 섭외하고 통역하는데, 카운터 파트의 사람이었던 내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일부러 나를 드러내야지라는 생각은 없었고, 드러난다 한들 나는 결국 이 회사 사람인데 그게 뭐 어때서? 라는 생각에 좀 어이가 없었지만, 회사가 다 그러려니 했다.


그 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내’가 드러나는 게 의식된 것은. 그러자 다른 사람이 ‘그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도 의식됐다. 나도 동료가 어떤 일에서 개인으로 인식되는 것에 예전의 내 상사와 비슷한 레이더를 달게 되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자기만 표시 잘나는 일 하면서 튀려고, 자기 네트워크 쌓으려고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비영리에서 국제협력, 교류하는 사람들이 서로 네트워킹한다고 모인자리. 이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데 한 분이 저는 “국제협력이라는 말을 반대해요. 협력은 서로 이득을 바라보고 하는 행동인데, 우리 활동의 목적이 그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런의미에서 여기 계신 분들이 협력한다는 말 말고 '국제연대'라는 단어를 사용해주셨으면 합니다.” 과연 그럴까? 난 아닌데, 싶었지만, 비영리니 그래야 할지도 했다.


몇년 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풀어야할 사회문제, 혼자서 할 수 없는 그러나 해야할 일들 이런 것 들을 생각하며 다시 ‘연대’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상전벽해라더니, '나나나나나' 하던 나도 이렇게 변하는 구나.  그 옛날 나의 상사와 주변사람들이 가르쳐 준 것을 떠올렸다. 대의로 모이면(그분의 말대로면 ‘조직’이나 사람들이 모인 그룹), 그 안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바지런히 역할 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나를 위하기보다, 상대를 헤아리자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 이제야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닌 ‘우리’가 돋보이도록,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힘을 들여 사람을 조직하고, 일부러 나누어 함께하고, 성과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들을 애써 찾아 뿌듯해하고, 함께여서 행복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내맘 같지 않음에 뒤 돌아선 왠지 모를 피로감과, 왠지 내가 손해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존재는 모두 다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같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로는 탐탁치 않았다. 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대의를 위함이라고 위로 했지만, 막상 내 것도 아닌 것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 같은 집단 행동이 별로였다.


2017년 이대 평생교육 단과대학 신설 반대 시위, 2021년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스타벅스 트럭시위, 2024년 진행형인 의대생 정원 증원반대 전공의 집단행동에서 어떤 불편함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진 않았다. 어떤 면에서 불공평 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자기 것만 챙기는 것 같은 느낌. 다들 다르니 웬만큼은 힘들고, 양보도 필요하지 않나?  모든 일에는 반대급부가 있는데, 목소리 내지 않는 영향받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봤을까? 그래 한 번은 그렇다 치고, 그 이후 활동을 이어가면서 불공평한 사회문제에 더 관심 가지고 활동한다면 모르겠지만…지극히 자기 사정으로 익명 게시판에 모여, 돈을 모으고, 역할 나누고, 목적을 달성할 효율적 방식으로 빠르게 쟁취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흩어지는 게 무슨 연대야. 싶었다.


진심은 부러웠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연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뭉뚱그린 우리를 신경썼지, 왜 우리가 모여야 하는 지에 대한 목적은 흐렸다. 함께 모인데서 내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이기적인 것 같았다. 그러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또는 다른 그룹이 별로 기여 하기도 전에 자신의 니즈를 분명히 이야기 하면 솔직히 거슬렸다. 그런데 실은 나조차도 서로의 색을 죽여 만든 ‘우리’라는 색에도 만족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내 의견 드러내지 않고 우리에 묻어가야한다는 생각에, 누군가 알아서 해주겠지 마지막까지 총대매기 싫어 아무것도 안하다가 그대로 손해보고 있는 내 상황을 생각히니, 얄미운 거 아니었나? 자신 혼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없는 큰 존재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일단은 목적했던 바를 이룬 이대 시위, 스타벅스의 트럭시위 스마트 하지 않은가?


“스타벅스코리아 매장 직원들의 시위는 적지 않은 사회적 파장을 남겼다. 그동안 시위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띠를 두른 노동자들의 모습도 없었고, 극단적인 항의나 사업장 점거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위자들은 간편 송금 애플리케이션인 토스로 3시간 만에 시위자금 330만 원을 모금했고, 이후 법률 자문까지 거쳐 이벤트 대행사를 통해 구한 트럭 전광판에 근무 여건 개선 요구를 담은 메시지를 띄웠다. 이는 ‘무(無)조직’과 ‘탈(脫)이념’, ‘비(非)실명’으로 요약되는 최근 MZ세대의 노조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투쟁과 파업 일변도의 기성 노조와 다르게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스타벅스 파트너들의 ‘조용한 시위’는 일단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송호섭 스타벅스코리아 대표가 제기된 문제에 대해 직원들에게 사과했고, 올해 연말까지 바리스타 채용을 확대하며 파트너를 위한 근무 환경 개선을 가속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지역별로 진행하고 있는 상시 채용 외에도 전국 단위 채용을 확대해 인재 확보 및 매장 운영에 효율성을 제고할 방침으로 전해졌다”

<손보승, 스타벅스 ‘트럭 시위’가 남긴 것, 2021.11.09, 이슈메이커>



애초에 내가 ‘연대’에 기대한 건 뭘까?

내가 풀고 싶은 사회 문제나 힘을 싣고 싶은 주제에  제대로 기여하고, 행복하고 싶은 거 아니었나?  나로 시작해야 관심갖고 열심히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모르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모르고 나는 무엇을 위해 연대하고 싶다고 하는 것 이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원하는지 잘모르는데, 자기안에 헛헛함과 외로움을 뭐로라도 채우려고 ‘우리’를 찾는 다면, 나는 딱히 취하는 것이 없는 것(함께 목적한 바가 없으므로) 같은데, 목적을 명확하게 하고 자기를 챙기는 사람이 있으면 얄미우니까 대의, 조직 운운한다면,  그 안에 진짜 함께 지키고 가꾸고 싶은 것은 없다. 그것을 연대라는 단어로 포장한다면, 사실 포장안에 알맹이는 없기에, 구조는 쉽게 으스러지고, 누구에게든 아쉽고, 어떤 결과든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연대에 실망했다고 어물쩡 연대 탓 하지 말자. 그 실망은 연대도, 상대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다.


“(들에 있는 옥수수, 콩, 호박이 함께 자람을 설명하며) 세 자매가 의도적으로 협력한다는 것은 솔깃한 상상이다.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협력의 묘미는 각 식물이 자신의 생장을 증진하라고 이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개체가 번성하면 전체도 번성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고유한 선물과 이것을 세상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다. 개별성이 중요시되고 장려되는 것은 전체가 번성하려면 각자가 굳건히 서서 자신의 선물을 당당히 가져가 남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 자매를 보면 구성원들이 자신의 선물을 이해하고 공유할 때 공동체가 어떻게 될 수 있는 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향모를 땋으며, 로빈 월 키머러>


최근 향모를 땋으며의 위 부분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민망하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했다. 연대하고 협력하는 것이 나 자신의 필요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애써 모른척 했던 것 같다. 연대하려면 대의가 있어야 하고, 그 대의는 ‘나’또는 ‘나의 필요와 욕구'와 같은 것으로 대변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졸업식 영상 속 이효리가 다시 나에게 잊지 말라고 한 것은, 나한텐 나 자신이 기본값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함’으로 존재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다른 존재 또한 존재 자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 서로 다른 존재가 존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존재의 다름을 받아 들이고, 상대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서로 감사하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할 때 그 사이에 ‘관계’가 생긴다. 그런 관계가 오고갈 때, 서로 달라 어색하거나 불편할 지 몰라도 신뢰가 있다.  그때야 우리는 진심으로 함께 풀어나가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나의 문제이자, 너의 문제, 우리의 목표 이런 것 들 말이다. 또 자기사정으로 모여 혼자 풀 수 없는 큰 문제를 한 번 풀어 본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정을 듣게도, 이해 하게도, 함께 행동하게도 될 지 모르겠다. 아니면 또 흩어져 가고.



<워크보트기록, 2024.3.4>

올리브: 슬릭이 ‘나쁜비건은 어디든지 가지’ 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더라도 어느 한켠 기대고 있는게 연대라고 했는데, 그말에 진심동의해.

졍: 맞아맞아. 매순간 같이 할 순 없는 것 같아. 방식은 달라도 신뢰가 있는 것. 어느 순간 상대를 바라봤을 때, 서로 맞장구 치며 살짝 윙크하고 가던 길 또 힘받아 갈  수 있다면 연대지.


<이대시위 1년 후>

최: 여대생이니까 여자애들이니까 얘네들 이기적이니까, 이런 편견 없이. 당시 우리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왜 점거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을 추구하고…. 이런 것들을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것 같다.

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자기 검열이 너무 심했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입혔다. 경찰에 의한 상처도 있지만 서로 조율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것들도 많고,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다. 예전처럼 서로 존중해주는 문화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박현철, ‘이대의 난’ 1년…“프레임에 갇힐까봐 자기검열 했었다”, 2017.8.20, 한겨레 - 시위 참여 학생 인터뷰>



연대에 기대하지 말고, 나를 먼저 살피자. 그러고도 좀 심심한 시간이 생기거나, 나의 니즈를 살피는데 상대가 필요하면, 그때 상대를 바라봐 보자. 마음가는 대로 했는데, 서로에게 필요하고 함께하면 좋겠는 무엇이 생긴다면, 오고감에 신뢰의 관계가 생긴다면. 연대에 기대는 것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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