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1화를 접하게 된 건 영어통번역을 이중전공으로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생활영어와 친해지려고 다운로드해 보기 시작했는데(스트리밍 서비스가 없던 그 시절!), 웬 과학 용어에 마니아틱한 표현들이 가득한 드라마가 아닌가. 시리즈물에 정을 붙이려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가장 마음이 가는 캐릭터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빅뱅이론>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만의 세계가 너무 강해서 다가가기 힘들었다(뭐 이런 애들이 다 있지? 하는 느낌).
그런데도 재미난 것은 특유의 '이상함'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시리즈를 계속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 시트콤의 효과음으로 깔리곤 하는 방청객 웃음소리를 무의식 중에 따라 해 보려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시즌12까지 나를 시청자로 잡아둘 수 있었던 건 시리즈에 덧붙여진 '시간 이론'이었다.
시간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쉘든마저도 변하게 했다. 에이미에게 건네지 못했던 반지와 골룸 상을 번갈아 보면서 나지막이 내뱉었던 대사 ("너는 반지의 마스터잖아.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말해줘.")는 그 어느 로맨스 영화에도 뒤지지 않았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정말.
레너드의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테이크아웃 음식을 즐기는 풍경이 이제야 커플 셋에 라지까지, 꽤나 북적이기 시작했는데 12년 만에 엘리베이터를 고치더니 끝이 나버렸다.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는 건 머릿속에 남은 인류의 과학사를 요약해 놓은 오프닝 송 멜로디다. A whole universe was in a hot dense state... 이제는 줄줄 외우게 된 노랫말을 흥얼거리면서 캐릭터들이 정립해 나갈 또 하나의 시간 이론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