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일본
요즘, 비워내는 일상과 루틴이 어느 시민운동가의 구호처럼 귀를 때린다. 물건이든 생각이든 쌓아두는 게 정답은 아닐 거라는 부연설명도 뒤따른다. 하지만 똥고집인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해오던 대로 물건 더미와 생각 더미에서 기어 다니고 헤엄을 치며 잠에 들고 잠에서 깬다.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면 멕시멀리스트라는 표현을 쓰고, 감탄을 자아내는 무언가를 잃고 싶지도 잊고 싶지도 않다면서 수집가로 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일종의 시위다. 취향을 지키려는 시위.
그때마다 "무얼 모으세요? 무얼 옆에 두고 사세요? 갖고 있는 게 뭐인데 그렇게 소중하다고 하나요?" 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중에 트렌드에 민감하게 굴며 새롭고 '핫한 것, 힙한 것'을 모은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으면 "아, 제가 모으는 것들은 오래된 것들이에요." 하고 손사래를 친다. 허름해 보일 수 있지만 이야기가 있는 것들, 사연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얼리버드인 아빠가 늦잠꾸러기 딸을 위해 이면지에 적어 놓고 간 '아침 잘 챙겨 먹어라. 냉장고에 **랑 ***가 있다.'라는 메모, 독일어 교생 실습 중에 만난 첫 제자들이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서 챙겨 줬던 손 편지 묶음, 대형서점에서 할인 딱지를 붙여두고 판매하던 오드리 헵번 영화 디브이디들, 사촌오빠와 동생과 만나던 날마다 주어 모았던 조개껍데기 몇 개...
빛이 바래거나 금전적인 가치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보자마자 누군가가 떠오르고 어떤 상황 속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해주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걸 내가 왜 가지고 있냐면, " 하는 게 여행의 출발 신호다. 수집가의 썰 풀기가 시작될 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은 "너 눈이 반짝반짝하다? 신났구먼!" 하는 반응을 즉각 보내거나,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애써' 나를 이해해 보려고 입을 꾹 닫고 있다. 어느 쪽이 되었건 "얼쑤" 하고 흥을 돋우는 고수의 추임새를 떠오르며 나는 하던 것을 계속한다. 하하. 수집가와의 대화는 어디로 튈지 좀처럼 예상할 수 없지만, 한 번 튀기 시작했다면 제대로 튄다 (그러니 전국에 계신 수집가의 친구 여러분들, 팝콘을 챙기고 긴장은 푸시길!)
3박 4일간의 교토는 좋았다. '좋았다'로 뭉뚱그려서 말하기 아쉬울 정도로 좋았다(이런, 좋았다고 한번 더 적었다). 교토의 어떤 점이 4일 내내 하루 평균 2만보씩 도심을 누비게 했을까. 한국에선 하루 6000보 걸음도 충분하다 생각하며 어쩌다 일일 1만 보 걸음을 달성하기라도 하면 괜히 으스대는 사람인데, 타국의 천년고도에선 뭐가 그리 좋아서 계속해서 걸었을까. 궁금증을 안고 사진첩을 둘러보던 밤, '오래된 것'을 소중히 하려는 교토의 풍경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교토의 도로는 적당히 붐볐다. 서울의 도로와 비교하자면 한산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보행자와 자동차 간의 비율이 서로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을 정도로 조화로웠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두 발로 지면을 박차고 나가든 시간이나 돈 등을 손해 볼 일이 적어 보였다. 그 도로 위를 누비는 차들 중에는 오래된 것들이 꼭 섞여 있었다. 세잎클로버나 달, 별 등의 아이콘으로 장식한 한모자를 차체 위쪽에 뒤집어쓰고 있는 '탈 것, ' 택시도 그랬다.
교토의 택시들은 내가 알던 차들과는 다르게 생겼다. 사이드미러가 본네뜨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게, 대충 보더라도 옛날 차였다. 가로보다 세로가 조금 더 기다란 직사각형, 그런 안경을 쓰고 있을 법한 할아버지가 떠오르는 차였다. 곡선보다는 직선이, 동그라미보단 네모가 떠오르는 인상의 차였다. 택시들은 짙은 빨강이나 검정 옷을 점잖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좌측통행을 부드럽게 해내는 모습이 어느 노장 왈츠 댄서의 턴을 보는 듯했다. 캬, 이게 뭐라고 고풍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 번은 탑승 의사를 밝히는 손님을 발견한 택시 기사님이 뒷문을 자동으로 열어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믿음직하게도 묵직하고 천천히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게 아닌가. 리무진이 따로 없었다.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여, ' 하고서 애어른 같은 말을 덧붙이는 순간, 올드카 택시의 차체가 반짝하고 여름 햇살을 반사시켰다. 얼마나 열심히 차를 닦으신 건지, 반들반들 윤기가 났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올드카 택시의 품격은 오른쪽 운전석에 앉은 택시 기사님들의 복장으로 정점을 찍었다. 하얀 목장갑을 끼고, 넥타이를 맨 셔츠에 정장 바지까지 차려입으신 모습. 경우에 따라선 선장이나 교통경찰이 착용할 법한 모자까지! 정말 제대로였다. 깔끔하게 갖춰 입은 출근룩에서 기사님들의 엄숙한 직업의식을 엿보았다. 외형과 옷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홍색 기둥의 신사 옆과, 휘황찬란한 조명이 가득한 파친코 앞, 세월을 견딘 목조 건물 골목 사이에서도 보였다. 오래된 것과 가까이 지내고, 그를 소중히 하며, 핸들을 여유롭게 돌리고 브레이크와 액셀 사이에서 부드럽게 발을 굴리는 택시 기사님들의 모습이(브라보)!
도쿄 일대의 택시들이 신형 자동차로 싹 바뀌었다는 지인의 말을 떠올려 볼 때, 올드카 택시를 고집하는 건 유명 관광지이자 일본의 천년고도로 콧대가 높은 교토가 나름 결심한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요즘 것에 비해 빛이 바래고 속도감이 덜하더라도 올드카 택시들을 사용하면서 오래된 것의 미학을 지켜보자는 그런 결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