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맞아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꼬꼬마 시절, 승용차 뒷 좌석 전체는 내 차지였다. 동대구 IC를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면, 조수석에 앉아계신 엄마가 부엌에서 손수 구워 온 맥반석오징어를 불투명한 봉지에서 꺼냈다. 너무 가늘지도 두껍지도 않게, 가능하면 길게 길게 찢어서 아빠와 나에게 번갈아 건네주시는 게 엄마의 스킬이라면 스킬이었다. 어릴 때부터 뭐든 잘 받아먹는 으른 입맛이었던 나는 짭조름한 바다의 맛과 가스레인지의 불맛이 오묘하게 섞인 오징어가 꽤 마음에 들었다. 엄마에게서 오징어 조각을 받아 들면 묘한 승부욕도 생겼다. 이 기다란 걸 먹으려면 평소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 않고 꿀떡 넘기던 식사 습관을 교정해 보려는 마음을 가득 담아 턱을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딱딱하던 오징어가 입 안에서 눅눅히 바스러질 때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고 외치면서 오징어를 삼키기 좋은 시간을 기다렸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 아파" 하고 엄마가 오징어 배식을 멈추면, 그제야 식곤증인지 차멀미인지 모를 잠에 푹 빠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시간이 채 안 걸리는 드라이브 코스였는데, 당시엔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수행길처럼 느껴졌다. 어린이에게 두 시간이란 그런 걸까.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부스스한 머리로 고개를 들까 말까 고민할 즈음엔 깜빡이를 켜고 우측으로 차선 변경을 하느라 바쁜 아빠의 뒤통수가 자주 보였다. 그럴 때면 뒷좌석 바닥에 벗어두었던 신발을 집어 신었다. 엄마가 손수 굽고 찢어 주었던 오징어보다 더 멋진 간식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고속도로 위에서 먹지 않으면 아쉬울 그것, 바로 휴게소 우동이었다.
면 요리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격렬히 꼬르륵 소리를 내는 건 어릴 적에도 여전했나 보다.
휴게소 우동의 매력은 재료의 소박함에 있다. 어느 고명을 올리느냐에 따라 추가 요금이 붙은 메뉴가 있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은 가장 저렴한 기본 우동이다. 주문한 우동 한 그릇을 받아 식탁에 앉으면 사계절 한 그릇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분홍색 테두리가 돋보이는 어묵 카마보코(蒲鉾)에선 벚꽃 잎이 생각났고(가끔 어묵 단면에 꽃이 핀 가지가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게 너무 이뻐 보여서 그릇을 비우기 가장 마지막에 먹었던 기억도 많다), 푸르른 쑥갓 몇 가닥에선 몸집이 커진 여름날의 전나무가 떠올랐고, 그릇 아래 담긴 면발이 보일 듯 말듯하게 투명한 간장 국물은 꼭 단풍잎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국물 위 수북이 떠 있는 눈꽃 튀김은 이름이 말해주듯 함박눈 내린 풍경을 상상케 했다.
바닥에 똬리를 튼 우동 면발을 입 근처로 가져와 후후 불어 먹으면 오징어 간식과는 다른 행복이 찾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역시 이 맛이야!' 하고 감탄하곤 했는데, 그때의 '이 맛'을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선 한 가지 재료가 필요했다. 한국인의 맛, 고춧가루였다. 으른 입맛치곤 붉게 양념된 배추김치에 영 재미를 붙이지 못하던 나였지만, 우동 위 솔솔 뿌리는 고춧가루는 이야기가 달랐다. 감칠맛을 더하는 붉은 조각이 우동 국물 속으로 알알이 다이빙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미처 다이빙하지 못한 조각들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한껏 국물과 면발 사이사이에 숨겨두는 것!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나면 완벽한 휴게소 우동 한 그릇을 완성했다고 믿었다. 조리는 주방장이 했을지 몰라도 마지막 멋은 손님인 내가 다 부리는 거라고 자부했다.
이웃나라 일본의 고춧가루가 우리나라의 고춧가루와 다르다는 걸 안 건 중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시내라 불릴만한 지역에 한국적인 종합분식점 옆에 상호명과 인테리어, 메뉴까지 모두 일본을 외치고 있는 음식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었다. 호기심에 들어간 음식점에서 익숙한 음식인 우동을 시켰고, 한 그릇의 믿음을 완성시켜 줄 마법의 가루를 찾아 식탁 주변을 살펴보았다. 불그스름한 가루 한 통이 보였다.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니 고춧가루인 것 같은데 내가 알던 고춧가루와는 뭔가 다른 빛깔을 한 가루들이 보였다. 진하게 우려낸 떡볶이 국물보다는 가루가 되도록 곱게 간 당근이 생각나는 붉은 기. 그 사이사이에 초록색, 호박색, 검은색 등 꽤나 많은 색이 보였다.
낯선 재료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본 사람들은 우동 한 그릇을 이것으로 완성하는가?' 그래도 입에 안 맞을 수 있으니 조심스레 톡톡. 가루 입자들은 보기보다 가늘고 작고 가벼워 보였다. 한 숟가락 함께 떠먹어보니 존재감도 보이는 대로 엄청나진 않았다. 얌전하게 짭조름하고 귀엽게 매콤한 맛. 새로웠다. 이전에 먹던 한국 고춧가루 우동과는 또 다른 매력을 찾았던 나는 알록달록한 일본의 고춧가루가 '시치미(七味: しちみ)'라고 불린다는 것을 아빠에게 전해 들었다.
시치미를 직독직해한다면 시치(七; しち), "일곱 개의, " 미(味;み), "맛"이란 뜻인데, 영문으로는 시치의 다른 발음인 나나(七;なな)를 써서 나나미(nanami)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름에서 일곱이 가득하지만 실제로 쓰이는 향신료의 가짓수가 꼭 일곱 개란 법은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열 개의 향신료를 섞어 만들기도 한다니깐, 아마도 시치미란 이름은 '다채로운 맛, ' '감칠맛'을 표현하기 위해 지은 게 아닐까. 고춧가루를 베이스로 삼지만 매운 기운은 적고, 함께 쓰인 진피와 흑임자/참깨, 파래/김, 산초/후추, 차조기, 생강, 소금 등이 한 데 섞여 묘한 조화를 이룬다. 멋 모르고 먹으면 라면 수프로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시치미 재료의 조합 가짓수를 취향에 따라 정해서 하나, 셋, 다섯 가지의 시치미를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나름의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다는 건데, 국물 요리를 좀 더 맛있게 즐기고 싶은 식도락가들에겐 재미난 요소다. 특별히 베이스인 고춧가루만으로 이뤄진 시치미는 숫자 1의 이치(一; いち)를 붙여 이치미(一味)라 한다.
교토 여행 이틀 차, 다영이와 키요미즈데라(淸水寺; 청수사) 일대로 힘차게 걸었다. 에도시대의 교토가 궁금한 여행객이라면 유명 사찰과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 키요미즈데라 지역을 계획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 교토만 열한 번째인 다영이는 다마미즈초(玉水町) 사거리에서 골목길처럼 보이는 길로 나를 안내했다. 5층불탑인 법관사(法観寺)가 올려다 보였고 길의 우측엔 한국인들에게 '응 커피'로 알려진 아라비카 커피% 가게가 보였다. 이따금 드르륵 바퀴소리를 내며 지나다니는 인력거 사이로 기모노나 유카타의 전통 복장을 하고서 교토의 옛 풍경에 한없이 녹아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광객들 뿐만 아니라 일본 현지인들도 전통 복장으로 거리를 누비는 데 한껏 몰입해 있었다. 다영이의 카메라를 보고 자연스레 브이를 하며 인사하는 청년과 그 옆에서 그런 그가 조금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살짝 숙이는 여자친구가 지나갔다.
습도가 높아지는 여름 한낮 날씨에 응 커피의 도움을 받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일본에서도 아이스커피가 대중적이라 다행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라테를 한 잔씩 손에 들고 응 커피 가게 앞에 위치한 나무 벤치에 앉았다(딱 한 개 있는데 그 명당을 우리가 차지한다! 음하하). 나란히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과 조금씩 바뀌는 풍경을 구경하는 것. 그 또한 여행자의 호흡에 어울리는 시간이다. 동적인 듯 정적인 듯, 함께 걷는 듯 나만 멈춰있는 듯. 우리의 일상과 비슷한 듯, 다른 듯한 일련의 풍경을 바라보는 내내 오른손으론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쥐고 왼손으로 응 커피에 앉아 쉬기 전 들렀던 가게의 로고가 찍힌 봉투를 뒤적여 보았다.
다영이가 소개해 준 골목을 따라 올라가서 법관사를 둘러 니넨자카(二年坂; 넘어지면 2년간 재수가 없다는 미신이 이름에 콕 박힌 상점가)를 걷는 코스는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다. 그래서 공예품점과 기념품점, 전통 찻집과 음식점이 빼곡히 몰려 있고, 각자 나름대로 기대하는 '일본스러운' 물건을 찾기도 쉽다. 그래서인지, '그 물건'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응 커피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 (사실상 거의 바로 옆)에서 나는 시치미 전문점을 찾아냈다.
일곱 칠, 맛 미. 쉬운 한자 두 개를 발견하자마자 가게로 돌진하자고 다영이에게 소리쳤다. ㅋㅋㅋ 웃으며 따라 들어오는 다영이는 카메라를 잠시 내려두고 관광객 모드로 돌변했다. 함께 판매하는 상품으로 절임류 반찬과 콩고물도 보이지만 아무래도 가게의 주인공인 시치미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일찍이 맛본 일본 문화가 눈앞에 정갈히 진열되어 있는 모습에 신이 났다. 시치미에 들어가는 재료에 관한 영어 설명도 가게 곳곳에 보이고, 시치미에 들어가는 여러 재료를 빻고 섞기 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곳곳에 걸려있었다.
시치미를 담아 둔 통이 독특했다. 그저 그런 플라스틱 용기가 아니다. 뚜껑은 반들반들한 나무인데 꽤 견고해 보였고, 몸통엔 방금까지 올려다보면서 걸었던 법관사의 5층 석탑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전에 시치미를 담은 걸로 알려진 호리병 모양의 그림도 알록달록한 그림자 모양으로 함께 그려져 있다. 이치미부터 시치미까지, 본고장답게 재료의 조합 종류에 따라 상품도 다양했다. 때아닌 식자재 구경에 요리 세포가 스멀스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다영이와 호들갑을 떨면서 "무얼 사지?" 하는 수다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는 건 기본 옵션이었단 소리다. 푸하하.) 우리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시던 직원 분께서 "요로시케레바시쇼쿠시테미마센까(よろしければ試食してみませんか?; 괜찮으시다면, 시식해 보실래요)?" 하고 말을 거셨다.
잽싸게 "하이(네)!"하고 답하고 가게 한편에 마련된 시식 코너로 몸을 돌렸다. 가루 그 자체로 맛을 보는 방법과 뜨거운 찻물에 타서 먹는 방법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끓여 먹을 생생우동 한 그릇을 떠올리며, 힘차게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자 직원 분께서 시치미를 1회용 컵 안으로 톡톡 기울였다. 이제 막 찻물에 뿌린 시치미 맛은 어떨까.
방금 뿌린 가루인데도 그 사이에 벌써 찻물에 녹아들었다. 한국의 일식당에서 먹었던 시치미와는 다르게 좀 더 산초 향이 강하고 간도 셌다. 존재감이 강했다. 라면 수프 같다는 첫인상이 싹 사라지고 시치미라는 이름만 떠올랐다. 시큼 새콤하지만 매콤하고도 짭조름했다. 영어권에서 '우마미(umami)'라 부르는 동양 특유의 감칠맛이 바로 이런 맛이려나. 야채와 해산물이 함께 있는 우동 위에 톡톡, 전골 요리를 할 때 막바지에 톡톡. 요리를 업그레이드시킬 비법 재료가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다층적인 가루 맛에 어울릴 음식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급 허기가 졌다.
맛을 보았으면 결정을 내려야 다. 카드를 꺼내 들며 "시치미니쯔우오네가이시마스(七味二通お願いします; 시치미로 두 통 부탁드립니다),"하고 인사한다. 하나는 나의 우동 그릇을 생각하며, 또 하나는 최근 새신부가 된 시누이를 떠올리면서.
응 커피에 앉아 쉬면서 시치미 통의 반들반들한 나무 뚜껑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방금까지 입 안을 가득 메웠던 시치미의 우마미를 떠올리니 혓바닥으로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아쉬울 대로 오른손에 들린 고소한 커피를 빨대로 쫩 빨아들였다. 교토의 여름이 향긋했다. 여러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