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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과 17, "자 이제 시작이야(내 꿈을)!"

교토, 일본

by 프로이데 전주현


5 곱하기 5의 빙고판을 채우다 보면, 함께 하는 친구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주제를 정할 때가 있다. 숫자, 국가, 과일, 가요, 영화, 드라마 등 주제 후보는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나는 누군가가 이 주제를 골랐을 때 환호성을 크게 지르곤 한다. 그저 재미있는 것만을 탐했던 어린 시절을 마주할 수 있는 주제,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해당 주제를 듣고서 스물다섯 개의 칸을 고민 끝에 채울 때, 각자 하나씩 돌아가면서 애니메이션 제목을 얘기하면서 "너 그거 안 봤어?” “너도 그거 좋아했어?” "그거 결말이 어떻게 났냐, 끝까지 못 봤는데." 할 때, 빙고 게임은 더 이상 빙고 게임이 아니게 된다. 추억의 대화, 동심의 대화가 이어진다. 순간순간이 짜릿하다 정말.


맞벌이 가정의 외동딸에게 애니메이션은 제2의 부모님과 다름이 없었다. 나를 울리고 웃기며 말 그대로 키웠다. 검정 리모컨을 손에 쥐자마자 자연스레 누르던 38(투니버스 채널)과 17(어린이 재능방송)이란 숫자가 아직까지도 동심의 번지수 같이 맘 속에 남아있을 정도다. 어디 그뿐인가, 원래 한국 것인 줄 알았을 정도로 훌륭한 국내 성우들의 목소리가 그림 위에 자연스레 덧입혀진 일본 애니메이션이 공중파 채널에서 오후 5시나 6시에 절찬리에 방영되던 시절이었다. 꾸러기수비대, 드래곤볼, 천사소녀네티, 세일러문, 포켓몬스터, 후르츠 바스켓, 아따맘마 …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내게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지만 뮤지컬적이고 동화적인 상상력을 한껏 키워주었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결이 다른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꿈과 모험, 우정이나 연애 감정, 변신이나 마법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 반짝이는 눈망울의 마법 소녀들과 귀여운 이미지의 포켓몬들은 6공 다이어리나 스티커, 필통, 스케치북 등 어린이들의 일상 구석구석에 자리 잡았던 시절이었다. 생일을 맞아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처럼 빛나고 싶은 마음에, 세일러문처럼 머리를 양갈래로 높게 묶어 달라고 엄마에게 졸랐던 적도 있었다 (사진첩에 그 머리를 하고 방방을 뛰던 모습이 박제되어 있을 거다 아마).


이런 이력이 있는 내게 교토 여행이 오로지 아날로그와 전통, 이국적인 풍경을 맛보고 즐기는 것만으로 끝났을 리가! 공영 주차장이나 약국, 페트병에 담아 파는 녹차만 보더라도 귀여운 캐릭터가 난무하는 일본, 예비 쇼퍼(shopper)들을 한껏 유혹하는 카와라마치(河原町) 중심가! 눈에 보이는 칸 없는 나만의 빙고 게임을 시작하기엔 최적의 장소이지 않은가!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다량 생산해 내는 콘텐츠 강국이기에, 내가 어렸을 적 즐겼을 애니메이션이 아직도 거리를 장식할지 장담할 수 없긴 하지만, 재미난 거라면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많이들 찾고 사랑해 줄 거라 믿으며 (최근 불었던 슬램덩크 열풍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좋은 콘텐츠는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걸었다. 주변을 마구 살피면서, 눈이 피곤해질 정도로. 아하! 그제야 조금씩 빙고판의 조각들이 보였다. 산리오 갤러리(Sanrio Gallery)에서 조금, 키디랜드(Kiddy Land)에서 조금.


어쩌다 산리오 캐릭터가 다시 핫해졌을까. 청소년부터 관광객까지 빼곡히 들어선 산리오 갤러리를 둘러보니 숫자 개념도 아직 제대로 서지 않았던 시절, 헬로 키티가 전면부에 조각된 산리오 계산기를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네 스포츠 센터의 1층 잡화점에서 발견한 그 네모나고 빨간 계산기는 태양광 전지 같은 것으로 작동하곤 했는데, 물건을 쉽사리 버리지 않는 우리 집에서 아직까지 찾아볼 수 있는 빈티지 잡화 중 하나다.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상당할 것 같은 쿠로미란 캐릭터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가운데, 다영이는 한국에서 핫템이라는 헬로 키티 소금을 몇 병 장바구니에 넣는다. ‘음, 소금을 산다고? 산리오에서?’


별다른 구매욕 없이 어린 시절 추억에 이끌려 가게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견물생심이란 말이 딱 떨어지는 상황을 맞았다. 난생처음 보는 캐릭터, 이름이 키리미 짱(きりみちゃん)이란다. '잘려나간 몸… 잘린…. 음?' 자세히 보니 아침 조식으로 먹었던 연어 구이를 닮았다. 연어라는 식재료 콘셉트가 도드라지는 캐릭터라니! 참신하고도 귀엽다. 이제 막 장롱면허 딱지를 뗀 참이라 자동차 열쇠를 보관할 독특한 디자인의 키링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적합해 보였다. '부피도 꽤 크니 가방에서 찾기도 쉬울 테고.' 히죽거리면서 키리미 짱을 하나 들고 계산대로 갔다.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건 귀여움'이라는 말에 적극 동의하던 다영이가 헬로 키티 소금을 계산하려다가 웬 연어 조각을 들고 오는 나를 보고선 주춤했다.


“이것 봐, 귀엽지?"

“그게 귀엽다고?”


제아무리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귀여움의 미학’은 다를 수 있나 보다. 클래식한 귀여움을 주 전공으로 하는 다영이에게 나의 귀여움은 다소 융통성이 넘쳐 보인단다. 뭐, 다영이가 뭐 라건 간에, 똥고집인 나는 ‘이게 제일이야’라면서 계산을 마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내 손에 들린 키리미 짱을 바라보는 다영이라니, 재밌다.


각종 캐릭터 굿즈들이 모여있다고 전해 들은 키디랜드. 1층에서 마법소녀의 근본, 세일러문을 만났다. 고층에선 원피스 부스로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 외에도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 말려, 카드캡터 체리, 포켓몬스터 … 많다. 반가웠다. 그리고 캐릭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리모컨을 쥐고 싶은 마음도 조금, 연습장이라 부른 스프링 철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도 가득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었던 천사소녀 네티는 아무래도 마니아 레벨이 높은지 보이질 않았지만. 뭐, 그래도 마법소녀의 근본을 보질 않았는가. 가장 좋아했던 세일러 전사, 마스의 굿즈까지 사진으로 찍어 남기니 일본에 온 게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슬램덩크는 없나? 우리나라에서만 난리는 아니라고 들었는데.’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등에 붙일 원피스 스티커 몇 장을 사고 루피를 좋아하는 고시생 친구를 위해 작은 인형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러다 계산대 옆 벽보에 드래곤볼 쿠지(쿠폰 뽑기)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와, 미친, 드래곤볼!”

“소년 만화 취향이구나, 너.”


산리오에 이어 다시 한번 다영이와 나는 ‘다름’을 발견한다. 10년이 넘도록 서로에게 편지하고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애니메이션의 취향까진 깊게 공유하지 못했나 보다(우리 아직 얘기할 게 많이 남았구나 친구야). 키디랜드 내부를 속속들이 돌아다니는 내내 다영이는 테디베어의 옷들을 구경하고 미피 코너에서 또다시 클래식한 귀여움에 빠져들고 있었다. 각자 손에 봉투 하나씩을 들고 가게를 나오자 우리는 서로의 상기된 얼굴을 보면서 킥킥 웃어대기 바빴다. 말 안 해도 안다. 각자 생각 중이다. ‘너 그런 취향이었구나,’ ‘역시 너는 그런 걸 좋아하지?’ 하면서. 짧은 시간, 빙고 게임을 핑계 삼아 동심의 세계에 다녀온 기분이다. 다영이는 알까, 38과 17. 동심의 번짓수를.


추신: “자 이제 시작이야” 하면 자연스레 “내 꿈을!” 하며 소리치는 동년배들의 목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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