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가정엔 하나의 문화가 깃든다. 유학, 이민 없이 결혼만으로도 문화 충돌을 경험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결혼 8개월 차인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남편의 문화 중 하나는 식사 시간이었다. 마치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 그것도 영업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요즘 맛집"처럼, 하루 세 번 정확하게 지켜지는 게 식사였다고 한다. 적어도 남편과 시누이가 성인이 되어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7시, 12시, 18시의 삼시세끼 법칙이 제법 잘 지켜졌단다. 혹여나 늦잠을 자거나 다른 사정으로 정해진 식사 시간에 식탁에 앉지 못했다면, 거기에다가 상차림이 이미 다 비워지거나 치워지기까지 했다면, 그때 그 사람은 낙오자가 되어 쫄쫄 굶거나 스스로 허기를 달랠 방도를 생각해 내야 했다고 한다(냉정한 사람들!). 끼니를 제때 먹은 이후엔 굳이 다른 걸 집어 먹지 않았다고 하니, 군것질 친화적인 문화도 아니라고 전해 들었다. 간혹 자녀의 출가 이후, 시부모님 두 분 이서만 생활하실 때에도 7시, 12시, 18시의 삼시세끼 법칙이 잘 지켜지는지는 의문이지만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면 끼니를 아직 챙겨 드시지 않을 때가 있었기에) 그래도 비교적 잘 지켜지는 문화인 듯하다.
그에 비해 우리 집은 올빼미 인간 둘에 얼리버드 한 명이 구성원의 전부다. 각자의 생활 리듬과 일정, 공간을 철저히 존중하며 지내는 게 당연했기에 꼭 가족 모두가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왔다. '누가 봐도 점심시간에 뜨는 밥 한 술'이더라도 내가 눈을 떠서 그날 처음으로 먹는 끼니가 아침식사가 된다. 시곗바늘이 어느 숫자를 향하는지에 개의치 않는다. 대신 내가 하루를 시작했다는 점과 그를 좀 더 잘 해내기 위한 에너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더 중요하다. 혹 늦잠을 잤더라도 "일어났어? 어제 몇 시에 잤길래?" 하면서 직접 상을 차려주거나, 냉장고에 무엇이 있으니 알아서 챙겨 먹으라는 메모를 남겨주는 편이다. 하루에 꼭 세끼를 먹을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유독 속이 허한 날엔 간식을 아낌없이 제공하고(집안 곳곳에 간식을 비치해 두고 슈퍼마켓에 들르는 날이면 과일 코너를 꼭 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다른 이들이 야식이라 불렀을 법한 것을 '저녁 같은 거'라고 부르며 챙겨 먹는다. 또 남편의 가족처럼 한식만을 고집하지도 않기에, 상에 올라오는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바쁜 아침엔 더 그렇다.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엔 토스트 한쪽이나 펜케이크 두 장, 오믈렛이나 삶은 계란 요리를 먹고서 등굣길에 나선 적이 밥과 국을 들이켜고 나간 것보다 많았다.
이뿐일까. 식탁과 부엌의 분위기, 냉장고 관리 방법까지. 남편의 집과 우리 집은 참 다르다. 정말이지, 결혼은 가족의 확장이자 문화 충돌의 연속이다. 곧 있을 남편 가족과의 여행에서 또 어떤 충돌을 경험할지 흥미진진하다.
이래저래, 자유로운 식문화 속에서 먹고 마셨던 나는 대학생이 되면서 새로운 식습관을 가지기 시작했다. 절반은 자취생 다른 절반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성인이라는 '반 자취' 생활을 오래 했는데, 그런 내게 삼시 세 끼란 관용 표현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학업이나 대외활동, 나만의 유흥과 취미 활동에 식사는 지체되거나 무시되거나 어느 순간 문득 과장되거나 드물게 지켜지곤 했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흘러갔다. 그런데 그 흐름에도 언젠가부턴 리듬이란 게 생겼다. 그중 하나가 아침을 거르더라도 잠을 더 청한다는 거였다. 급하게 입 안에 뭘 욱여넣으며 외출 준비를 하기보단 5분이라도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아침이 좋았다 (혹 이 대목에서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 먹고 가면 든든하고 얼마나 좋아?' 하고 물으시려거든, 내가 새벽 2~3시에 잠에 드는 올빼미란 걸 알려드리고 싶다. 올빼미에게 아침잠은 소중하다 못해 필수다. 아침밥 챙겨 먹으란 소리는 제대로 잔소리란 말이다).
그런데 교토에서의 나는 달랐다. 여행지에서의 일과를 노트에 적느라 여전히 새벽에 잠이 들었지만 다음날 일찍 일어났다. 거기에다가 (맙소사) 아침을 챙겨 먹었다. 호텔 조식이었냐고? 아니. 무려 외식이었다.
아침부터 외식이라니, 무슨 일인가 이게!
다영이와 나의 숙소는 크로스 호텔 교토, 교토 카와라마치 일대에 위치한=해 있었다. (교토 역에서 지하철 1번 환승으로 20분 만에 갈 수 있는 곳으로, 카모 강변과 시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여행자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다.) 우리는 코로나 기간 동안 확실히 자리 잡았다던 셀프 체크인 기계 앞에서 입소 수속을 밟았다. 예약 번호 및 여권 정보 스캔을 마치자 팝업창이 하나 떴다. '조식 서비스를 신청하시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었다. 다영이와 나는 이미 정한 답이 있다는 듯 자신 있게 '아니요' 버튼을 눌렀다. 체크인이 무사히 끝났다. 추가 결제 없이.
호텔 숙박의 꽃은 조식이라고 우길 여행객들이 많다는 거 안다. 나도 좋아한다. 그 포슬포슬한 스크램블 에그와 적당히 데워진 햄과 빵들. 하지만 우리가 여행 온 곳은 교토다. 교토엔 아침 일찍부터 가게 문을 열거나 저녁 늦게까지 영업하는 식당이 거의 없다. 때문에 여행 루트를 미리 어느 정도 준비해오지 않으면 '영업 종료' 사인을 연달아 마주할 수도 있는 동네다. (파워 제이 두 명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다행인 건 교토가 빵 친화도가 높은 곳이란 점, 그리고 빵집들은 주로 아침 일찍 문을 연다는 거다. 아침 시간에 먹거리를 파는 곳들이 많지 않다 보니, 조식 세트를 선보이는 카페/찻집들도 덩달아 많다. 그리고 제철 재료를 적극 활용한 일본식 조식 한상차림인 오반자이(おばんざい) 문화가 뿌리내린 곳이다. 주변에 조식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 빵부터 밥까지 다양히 널렸는데, 굳이 조식 서비스를 신청할 필요가 있겠는가. 묵으려는 숙소가 조식 맛집으로 알려진 곳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일정을 빼곡히 세워두길 추천한다. 하루는 카페 조식세트, 다른 하루는 오반자이...
여행 이틀째, 다영이가 미리 전화 예약을 걸어둔 '슌사이 이마리(旬菜 いまり)'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걸었다. '아침식사는 호텔에 맡기지 않고 내가 알아서 챙기겠다'라는 결심이 우리 집 특유의 자유로운 식습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반면, 이른 시간에 잠 기운이 여전히 내려앉은 눈을 간신히 뜨고선 밥 한 끼 먹겠다고 숙소를 나서는 모습은 남편네 아침상에 더 가까웠다. 도서관처럼 조용한 교토의 골목들을 누비며, 출근러들 사이를 역주행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소소한 풍경을 관찰하다가 어느덧 식당에 도착한 것까지, 모든 게 맘에 쏙 들었다. 그것 조금 걸었다고 배도 고픈 것 같았고.
2인 손님은 오픈 키친을 마주하고 앉는 바 자리로 안내를 해주는 듯했다. 정갈한 반찬들을 하나둘씩 담아내는 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장인 정신을 맛보는 기분도 들었다. 연어 구이를 메인으로 한 상차림은 다양한 모양의 그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철 반찬들이 개성을 뽐내며 그릇마다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꼭 알록달록한 나의 스크랩북 같았다. "이타다끼마스(いただきます; 잘 먹겠습니다)"하는 인사를 맘속으로 내뱉고선 젓가락을 들었다.
예약제로 운영되기에 대기 손님 눈치를 보면서 허겁지겁 먹을 필요도 없고, 조리 도구에서 나는 소리 외에는 별다른 소음도 없이 고요한 분위기니 다도를 배우는 수련생처럼 천천히 반찬 하나하나를 음미할 수 있었다. 밥도 국도 반찬도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니 생수 대신에 제공해 주는 녹차물을 마시는 속도가 오반자이 하나하나를 먹는 속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여행의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이따금 카메라를 그릇 앞으로 들이밀기도 해야 하니, 밥 먹다가 할 일도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가마솥밥에 감탄하는 다영이에게 아침 외식을 하는 묘한 기분을 설명했다. 다영이는 혼자 여행 올 때와 다르게 둘이서 여행을 하니 맛있는 거 먹는 재미가 늘었다며 다음번엔 남편과도 와보겠다고 했다.
식사와 기록, 대화와 결심까지 많은 것들이 셰프와 마주하는 바 자리에서 이뤄졌다. 천천히 마음과 속을 동시에 데워주는 오반자이 한 상에 잔뜩 감사하며 가게를 나왔다. 오랜만에 아침밥을 먹었다.
오반자이를 먹으러 온 손님들을 반기는 '슌사이 이마리(旬菜 いまり)'의 아침풍경.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직원 분께서 예약 확인을 진행하고서 자리로 안내해 주셨다.
화려한 문양의 접시들이 하나둘씩 상에 차려지고 미리 뜸을 들였던 가마솥밥도 완성되었는지 서빙되어 나온다.
아침에도 생맥주를 팔고 있다. 오크라가 들어간 샐러드는 이날 먹었던 반찬 중 가장 맛있었다.
이런 상차림을 보면, 아침부터 외식이 웬 말이냐고 묻던 사람도 '그럴만했네'라고 하면서 침을 삼키지 않을까. 가격은 1인당 1,700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