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일본
하루에도 수십 번 드나드는 극장이 있다. 상영관에 걸린 간판에는 '회상'이라 적혀 있다. 이곳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내 머릿속에 어떻게든 저장되어 있던 기억들이다. 무엇이든 상영작이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하굣길에 셔틀버스를 일부러 놓치고서라도 친구들과 감행했던 맥도널드 아이스크림 구입기부터, 또래들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봐야만 했던 공포영화의 후기나, 외할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꿈속에 찾아왔던 외증조할머니의 모습, 대학생 시절 독일에서 새벽 기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했던 당일치기 여행 등, 상영작의 장르와 시청 가능 연령, 관람 시간도 다양하다. 평소에 회상관을 찾는 손님은 나 혼자 뿐이지만, 간혹 연인이나 가족 등 가까운 이들이 초대를 받아 입구를 서성일 때도 있다. 그럴 땐 늘 놓여있던 의자 하나 주변으로 자리가 서너 개 더 설치되곤 한다. 동행이 있을 때의 나는 평소보다 더 진지하고 아련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는데, 영화 상영이 끝난 뒤에는 옆 사람을 붙잡고 눈물을 쏟아내거나 비하인드를 설명하느라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한다.
회상관에서 상영하는 작품 중에는 유독 4D 영화라도 본 것처럼 생생한 감상 후기를 기대할 수 있는 작품도 있다. 대부분은 후각 기억이 조금이라도 얽혀 있는 작품들이다. 회상관에 걸리기까지 후각의 관여도가 깊은 기억들이다. 보는 내내 코를 킁 하고 자극하는 기억들은 그렇지 않은 기억보다 영상의 화질이 선명하고 관객이 받는 감상 또한 입체적이어서 인기가 많다. 또한 아주 작은 (후각) 자극만으로도 관객 모두를 기억 속으로 옮겨다 놓을 수 있어, 시간 여행 기능까지 탑재한 작품이다. 유의할 점은 (안타깝게도) 킁 하는 후각 기억이 향기와 악취를 가리지 않는다는 거다. 코를 벌렁 일 수도 있지만 급하게 틀어막을 수도 있으니 모쪼록 관객들은 후각 기억 작품을 시청할 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던 겨울에,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이름난 슈니첼 가게에 입장 대기를 신청해 둔 적이 있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슈니첼 한 접시를 향한 열망을 가득 안고 야외에서 두 시간 정도 대기를 했다. 오들오들 떨면서 눈에 담았던 풍경은 유럽에서도 낭만적인 걸로 유명한 빈의 골목이었다. 하지만 슈니첼의 기름 냄새가 조금도 묻어나지 않은 그 기억은 무취의 기억이다. 그것들은 대게 그저 그런 기억으로 남아 회상관 아카이브의 구석진 곳에 방치되어 있다.
대신, 오래된 독일 기숙사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2층에 위치했던 내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비상계단으로 향했던 기억은 회상관의 단골 상영작 중 하나다. 주로 한여름, 땀냄새 가득한 공간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상영되는 기억이다. 기억 속의 나는 땀냄새가 진득하게 베인 기숙사 엘리베이터 철문을 못 본 체하고 비상계단으로 도망가다시피 뛰어간다. 두 발로 높고 험한 계단을 오를지언정, 절대 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한 뒷모습에서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동시에 엘리베이터에 처음 탔던 날 느꼈던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에 맘이 짠해진다. 사람 냄새가 진득했던 상영작을 보다 보면 어느새 노란색으로 장식한 기숙사 로비에 다시 들어서 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이걸 쓰는 도중에도 그때 그 냄새가 훅 나를 한 대 치고 간다. 윽!).
후각 기억의 힘이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소 생활공간을 꾸미거나 정리할 때 향을 신경 쓰지 않는다. 향수에 돈을 쓰지도 않고, 자진해서 방향제와 향수, 향초를 산 적은 더더욱 드물다. 애쓰지 않더라도 화장품이나 세재 등 세정/청소 용품과, 봄 여름 가을 겨울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로 이런저런 향과 냄새가 나와 주변에 들이차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굳이 인공적인 향을 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맡았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 있긴 하다. 교보문고가 향기 마케팅의 일환으로 선보인 교보향이나 포레스트 블렌딩에 자주 쓰이는 삼목나무(cedarwood) 향 근처에선 남모르게 코를 벌렁거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향을 구입하진 않는다. 향긋한 무언가는 돈을 들인 것에 비해 아주 잠깐동안만 곁을 맴돌다 사라져 버리니깐. 흔적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정하게.
그런데 웬걸, 교토 여행 중에 가장 먼저 지갑을 열고 구입한 물건은 향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향 책갈피 같은 거였는데, 편지나 선물 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워 넣을 수 있는 종이 방향제였다. 여름날의 축제(마쯔리)에 어울릴 법한 금붕어 어항 모양의 하고 있는 자그마한 소품이었다. 일전에 소개했던 종이공예품점 수잔도 하시모토 본점(嵩山堂はし本京都本店)에서 사 온 물건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특정 향이 몸 구석구석을 뒤덮었던 순간이! 난생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는데, 신사나 유적지의 오래된 나무에서 맡던 향이라고 하기엔 은은하고 오묘했다. 꽃 향기와 섬유유연제 비슷한 게 뒤섞인 듯한데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오래된 물건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올 법한 세월의 무게가 향으로 바뀐다면 바로 이랬을 것 같았다. 호기심을 못 참고 코를 벌렁대는 나를 보고선 다영이는 "교토가 향으로도 유명해"라면서 익숙하다는 듯 향기 나는 종이에 코를 가져갔다.
향 주머니 또는 향낭(香囊; こうぶくろ)라 불리는 일본 전통 방향제품은 기온 거리의 게이샤들이 향수 대신 기모노에 차고 다니면서 입소문을 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교토의 문구점과 종이공예품, 관광 기념품점마다 향기 가득한 제품들이 많이 보였다. 복주머니 같은 조리개에 담긴 전통 제품부터, 정성스레 바느질한 인형 속에 향을 담아 놓은 제품, 전통 종이에 채색을 하고서 향기까지 가득 담은 편지 봉투나 간단명료한 모양의 향초까지. 어딜 가나 향이 보였다. 좀처럼 눈에 담기 어려운 것이 다양한 모양새를 하고서 나와 다영이를 맞이하니 얼떨떨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나만의 향낭 만들기' 워크숍도 여기저기서 진행 중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향낭 가게에서 때마침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놓칠세라, 다영이는 가게 사장님의 허락을 잽싸게 받더니 워크숍 풍경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평소엔 사지도 않던 향을 어쩌다 덜컥 사온 걸까. 여행지에선 뭐든 쓸모 있어 보이고 이뻐 보이는 마법에 걸리기 쉬운데, 그 때문에 지름신이 온 걸까. 물음에 답하기 전 여행 스크랩 북을 열어 금붕어 어항 향 책갈피를 꺼내 코에 쓱 문질러 보았다. 그러자 회상관에서 상영 예정작 <교토의 향>에 관한 정보를 불쑥 내걸었다. 극장에 들어서기 전, 작품 설명을 찬찬히 읽기로 했다.
상영 예정작 <교토의 향>
시놉시스: 목조 건물이 들어산 카모 강 주변에 바람이 붑니다. 딸깍 딸깍, 잰걸음으로 게다를 신고 움직이는 사람들 옆, 당신은 가던 길을 멈춰 서고서 바람이 흘러가는 방향과 강물의 여정을 함께 살핍니다. 주변을 둘러봅니다. 바로 옆에 옷매무새를 조심스레 살피는 게이샤가 있고, 그 뒤로 진하고 옅은 색의 나무 조각들이 건물이 되어 듬직하게 서 있네요. 사부작사부작, 기모노인지 유카타인지 일본어 수업 시간에 배웠을 법한 옷차림이 움직일 때마다 향기 입자가 조금씩 새어 나옵니다. 인위적인 향인 듯하다가도 자연스럽습니다. 조용히 우려내는 녹차 한잔, 기지개를 켜고 골목에 세워 둔 자전거 옆을 지나는 길고양이의 발걸음, 여름날의 변덕을 머금은 수국의 싱그러움이 떠오릅니다. 교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금붕어 어항 책갈피에서 오묘한 교토의 향은 쪽 빠져 버릴 거다. 하지만 책갈피를 볼 때마다 회상관은 어김없이 <교토의 향> 간판을 내걸고 여행지에서 처음 교토의 향낭 문화를 알아가던 그때의 나를 소환해 내지 않을까. 향은 처음 구입하거나 만났을 때만큼 진하거나 강력하지 않아, 불완전해졌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꾸준히, 그리고 오래도록 나를 향긋한 곳으로 데려다줄 기억이 아닐까.
회상관 입구의 매표소 직원에게 목례를 하고선 의자에 앉았다. 아무래도 추억하고 싶은 마음에 향기를 샀나 보다. 종종 향기롭고 싶은 욕심에 교토에서의 기억을 가져왔나 보다.
+ 중학생 때 좋아하던 테이의 노래가 생각난다 (킁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