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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이름은 녹색

교토와 우지, 일본

by 프로이데 전주현 Aug 21. 2023
교토의 여름, 녹색(みどり[미도리]) 가득한 풍경



한 손에 주걱을 들고 노래하는 밥솥 앞으로 가면 갓 지은 흰쌀밥 사이사이 수줍게 숨어 있는 완두콩들이 보인다. 표면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나 있어도 특유의 푸른 빛깔에서 생동감이 읽힌다. 밝은 빛이 잔뜩 섞여 들어간 녹색, 연두. 오래 가꾼 화분 한편에서 자그맣게 돋아난 새순이 떠오르고, 봄기운이라 부를 만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두 손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아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오이, 흐르는 물에 씻어 툭툭 털어낸 쌈 채소... 식탁 위에 오르는 녹색으로 생각이 옮겨 간다. 들리는 소문과 달리, 꽤 맛있는 색일지도 모르겠다.


녹음 아래 멈춰 서서 손부채질을 한다. 더위가 가실까 싶은 마음에서 흔들어 보는 손이 무색하게도, 여름날의 가로수가 시원한 초록으로 물들이는 건 나무 밑동 아래 그림자뿐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질릴 정도로 눈에 담았을 진녹색. 깊은 바다에 진중히 몸을 담갔다 나온 이의 파랗게 질린 입술과, 진하게 우려낸 작설차 한 잔의 표면, 비 온 자리에 계속 물이 닿고 고여 끝없이 자라나는 이끼, 지나가는 보행자에게 매미 울음을 쏟아내는 전나무 이파리까지... 여름의 골목골목마다 녹색이 가득하다.  


이제 막 여름을 끌어안은 교토에도 녹색(みどり [미도리])이 가득했다. 여름 기운을 무시한 채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이국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카메라를 정비하며 걷는 관광객들 뒤에는 매번 푸르른 무언가가 일렁였다. 상큼하기도, 쌉싸름하기도, 시원하기도, 서늘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그중 기억에 남는 녹색 풍경들은 꼭 먹는 즐거움을 수반했다. 가만히 놔두면 빨라지기 십상인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최선의 방법은 녹색으로 속을 달래고 녹색으로 속을 채우는 거였다.  



교토 카페 우메노조: (좌) 와라비모찌 세트와 (우) 와라비모찌 녹차 빙수


한낮더위를 피하려고 들어간 카페 우메조노에서 먹었던 와라비모찌(わらび餅). 한국에선 물방울 떡이라고도 불리는데, 고사리(わらび [와라비]) 뿌리에서 채취한 전분으로 만든 일본의 전통 떡이다. 생긴 것에 비해 식감이 굉장히 흐물흐물해,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녹아버린다'는 표현이 절로 떠올랐다. 콩가루를 입힌 것과 녹차가루를 입힌 것을 함께 주문하고선 음식 평론가가 된 것처럼 한 조각조각을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사실 제대로 굴려보기도 전에 입 안에서 사라진다. 피부에 들러붙지 않아 깨끗하게 먹긴 괜찮은데도, 입가에 묻어나는 콩가루와 녹차가루 때문에 괜히 입을 과하게 우물거렸다. 다영이와 나는 찹쌀떡을 쏙 닮았으나 우뭇가사리처럼 조용히 뱃속으로 들어가는 와라비모찌가 매력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진지한 시식평 중에 주문한 디저트가 하나 더 나왔다. 카기고오리(かき氷), 빙수였다. 일본식 빙수는 알록달록한 시럽이 곱게 갈아 쌓은 얼음 산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빙수에 비해 시럽의 역할이 막대해서 고소한 팥보다도 달달한 시럽이 입 안에 가득 들어차는 맛이 강했다. 대놓고 달달한 음식을 질색하는 다영이가 일본에서 좀처럼 빙수를 찾지 않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영이도 딸기, 초코 시럽이 아닌 녹차 시럽 위에, 미끄덩한 무 맛을 뽐내는 와라비모찌를 얹어 단팥의 존재감을 살리고 시럽의 입지는 줄인 녹차 빙수는 궁금했었나 보다. 기대와 달리, 녹차 시럽도 시럽인지라 녹차 빙수도 달디달았다. 녹차 빙수 한 그릇을 다 먹기까지, 다영이는 물을 벌컥 마셔대야 했다. 하지만 그 덕에 와라비모찌가 시럽이나 팥, 얼음 등 함께 쓰이는 식재료를 주인공처럼 살려주는 디저트 계의 훌륭한 조력자란 걸 확실히 맛보았다. 


떡 한 접시와 빙수 한 그릇을 비워내고 티슈로 입술을 거칠게 닦았다. 하얀 펄프가 금세 새파래졌다.



교토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여행 일정을 가득 채울 수 있었지만, 평소보다 숙소에서 좀 더 멀어져 보는 일정을 하나 추가해 여행의 분위기를 바꿔보기로 했다. 고심 끝에 선정한 반나절 근교 여행지는 우지(宇治)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녹차 마을이자, 10엔 동전의 앞면에 새길 정도로 중요한 문화유산 사찰인 뵤도인(院)이 있는 곳이었다. 교토의 골목 및 라이프스타일 탐방이 대부분이었던 일정 도중에 뵤도인을 끼워 넣으니 잠깐이나마 수학여행을 온 학생 기분을 있었지만, 역시나 우지에서도 다영이와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맛있는 녹색, 향긋한 우마미(umami; 감칠맛)의 잔, 녹차였다.


(좌) 우지 나카무라 토키치 뵤도인 점의 야외 테라스 석, (우) 우지의 녹차 아이스크림 가판대



우지역에 내려 뵤도인으로 향하는 골목의 초입부에서 나카무라 토키치 뵤도인 점(中村藤吉 平等院店)을 찾았다. 카페 내부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인데도 만석이었다. 차와 함께 소바 세트 등 간단한 식사도 함께 팔고 있어서인지, 식사 시간을 막론하고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한여름 하늘 아래 뜨거운 블랜딩 호지차 한 잔을 들고서 야외석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로 이열치열이겠거니 지레 겁을 먹었지만,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람에 '나쁘지 않은걸?' 하면서 초록 풍경에 제대로 어우러졌다. 드넓게 펼쳐진 녹차밭 풍경 하나 눈에 걸리는 것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초록이 가득 들어차 있는 우지의 풍경이 꼭 '이야기 속 여름방학' 같았다. 차의 빛깔이 가게 옆에 흐르는 우지 강의 옥색 물과 훌륭하게 어우러졌다. 순수 녹차가 아닌 탓에 입 안에 감도는 단 기운이 살짝 과했지만, 돌아보니 땡볕 산책으로 지쳤던 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준 건 블랜딩 녹차의 단 기운이었다 (일본 녹차 특유의 고소한 풍미는 가게를 나서기 전에 기념품으로 구입한 녹차 티백에서 차차 맛볼 수 있었다). 


방문했던 가게들 중 유일하게 카드 결제가 되지 않던 식당 (그만큼 작고 오래된 골목 가게인) 도리키쿠(とり菊)의 녹차 음식도 기억에 남았다. 미키마우스 문양의 머릿두건을 하고 계신 주방장 아저씨께서 무료 반찬을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고 안내해 주시면서 주문을 받아가셨다. 녹차 우동 또는 소바를 메인으로 하고, 오니기리(おにぎり; 주먹밥)과 스시 등의 오니기리를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웬만한 세트 메뉴엔 튀김이 포함되어 있었고, 나름 한 상차림림인 걸 감안하면 가성비가 좋은 편이었다. 다영이와 바에 나란히 걸터앉아 주방장 아저씨께서 움직이시는 걸 유심히 지켜볼 수 있어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덜 지루했다. 면 발의 빛깔이 녹색인데 비해 쌉싸름한 녹차 향이 세진 않아서 평소 우동, 소바 하면 기대하는 맛을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기가 막히는 맛보다도 가장 잊히지 않을 맛이란 게 '익숙한 맛, 안 먹어봐도 아는 맛'이라고 하질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도리키쿠의 한 상차림엔 힘이 있었다. 부담 없이 즐기되, 녹차 마을 우지에 왔다는 걸 일깨워주는 초록빛 면발. 우지의 풍경과 어울리는 소박한 점심 식사를 계획했다면 훌륭한 점심 식사 자리라 할 만했다.


  

(좌) 도리키쿠의 녹차 메밀 소바, (우) 우지에서 방문한 (카드 안 받는) 식당 도리키쿠



진하게 익은 초록 사이를 걷다가 더위를 피하고 싶을 땐 언제든지 가까운 초록 아래로 숨어드는 계절. 자리를 잡고 초록빛 음료와 떡을 한 입 탐했더라도, 기다란 면발에 섞여 들어간 초록 분말 하나하나를 후루룹 면치기 해버리기 충분한 시간. 6월의 교토, 그리고 우지는 푸르고 맛있었다. 여름의 색, 여름의 이름을 입 안 가득 머금었으니 과연 멋진 하루였다. 


"고치소-사미데시따(ごちそうさまでした; 잘 먹었습니다)!"





글과 사진 속 장소 정보


@교토 

[카페] 우메조노 https://goo.gl/maps/9oRznsYXe5j4xP7TA


@우지

[식당] 도리키쿠 https://goo.gl/maps/PA83jcNvJ59ppkf36 


[카페] 나카무라 토키치 뵤도인 점 https://goo.gl/maps/1xTZmfx6onLghWSZ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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