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일본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나는 안정적인 일정에 약간의 변주, 불안정함을 추가한다. 여기서 변주란 편하거나 익숙해진 것 대신 새롭고 재미있어 보이는 걸 해보려는 모험심에 불을 붙이는 일정을 말한다. 호텔 조식을 포기하고 근처 지역 찻집을 방문해 조식 세트를 주문한다거나, 번역 어플이나 영어만 써오면서 현지인들과 소통하던 태도를 벗어던지고 여행 책자에 적힌 현지어 회화 표현만으로 대화를 해보려는 시도들 같은 거 말이다.
그중 가장 즐기는 변주는 근교 여행이다. 숙소를 기준점 삼아 계산하던 동선을 무시하고선 '대중교통을 이용해 갈 수 있는 어딘가, '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어딘가, '를 새로운 여행지로 선정하는 것이다. 여행지와 낯가림이 덜해졌다 싶을 여행 이틀, 삼일 차에 주로 실행에 옮긴다. 근교 여행을 떠나는 날엔 아침 풍경부터 다르다. 왠지 모를 설렘과 부지런함이 행동에 나타난다. 그제야 깨닫기도 한다. 하루 이틀 사이에 자신이 여행지와 많이 친해졌다는 사실을.
여행의 셋 째날, 다영이와 나는 충분히 고즈넉하고 적당히 붐비는 교토에서 잠시 벗어나 보기로 했다. 행선지는 우지, 여름의 색 초록[관련 글: 여름의 이름은 녹색]을 곱게 입고 있던 녹차 마을이었다.
우지에 머무른 시간은 네 시간 정도 되었다. 유명 사찰인 뵤도인을 구경하고 녹차 우동 정식을 먹고 맛있는 호지차를 마시는 등 우지 방문객이라면 응당 했을 법한 일정을 소화했다. 하지만 우지 여행의 핵심은 다른 데 있었다. 일본을 여행한다면 구태여 찾고 싶던 흔적 같은 게 있었다. 양국 역사와 관련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서린 곳, 아마가세 구름다리. 일본에서 수학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발자취를 간직한 곳이 우지에 있었다.
1943년 윤동주는 도시샤대 친구들과 함께 송별회를 하기 위해 우지를 찾았다.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는데, 윤동주 시인이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생을 마감하기 전에 찍은 마지막 사진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링크)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를 노래했던 청년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곳이 가까이 있다는데, 가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 힘찬 옥색 물살을 자랑하며 흐르는 우지천을 왼쪽에 두고서 꽤 많이 걸었다. 편도 2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습기를 가득 머금은 여름 공기와 그늘 없는 산책로만이 눈앞에 놓인 상황. 더위를 좀처럼 타지 않는 나도 걸음이 느려졌다. '쫓길 게 없지, ' 하는 여유와 윤동주 시인을 만나고픈 간절함, 그리고 한 손에 든 손풍기와 생수 한 병에 의지가 절로 되었다. 왼편엔 우지천, 오른편엔 자동차 도로가 있어 단순해진 풍경. 원 없이 걷기 좋았다. 묵묵히, 무식하게, 앞만 보고.
다리로 향하는 길에 덩치 큰 새를 여럿 만나기도 했다. 알고 보니 가마우지 낚시로 알려진 가마우지였다. 눈싸움을 하다시피 꽤 가까이 다가갔는데 날아가기는커녕 눈만 꿈뻑이며 나를 모른 체하는 녀석. 매서운 눈매와 다르게, 인터넷은 가마우지를 덩치만 큰 겁쟁이라고 소개했다. 8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가마우지 낚시법은 가마우지가 기껏 잡은 먹이(주로 은어)를 인간이 가로채는 비겁한 방식으로 이뤄진다(내가 가마우지였으면 곧바로 인간에게 해코지를 했을 텐데, 성격도 좋다). 하지만 논란의 가마우지 낚시법도 우지에선 귀한 유산이자 관광 상품인 듯, 여기저기 관련 벽화와 설명문이 보였다. '밥그릇 잘 챙기면서 살아, ' 눈싸움을 하다시피 했던 가마우지에게 인사를 남기고 계속해서 아마가세 구름다리로 걸었다.
'아직 멀었나?' 하는 생각에 구글맵을 켤까 망설여질 즈음에 눈앞에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크게 화려하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외관. 하지만 오히려 그 편이 윤동주 시인과 더 잘 어울렸다. 지나가던 방문객 하나 없었지만 그 또한 상관없었다. <서시>의 한 구절을 읽으며 목을 축이고 사진 몇 장을 찍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나와 다영이는 사진 속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표정이네.' 사진 속 풍경이 흑백이란 점만 빼고는 모든 게 비슷해 보였다. 흑백 세상이 색색의 물감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곳에서 윤동주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진을 찍은 친구들과 재회를 다짐했을까, 고국으로 갈 준비를 점검했을까, 아리랑의 가락을 생각하며 평화를 위한 기도를 올렸을까, 다리 주변의 자연을 느끼며 잠깐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잠깐동안 묵념을 올렸다.
"영화 <동주>에서 강하늘 배우가 윤동주 시 낭독하는 부분만 편집해 놓은 영상이 있던데."
"우리 그거 들으면서 갈까?"
목적지에 도착했단 생각이 들자 '이젠 돌아가도 되겠어' 란 결심이 쉽게 섰다. 돌아갈 곳이 있어 다행이었다. 유튜브에 윤동주 시 낭독이라고 치자 원하던 영상(바로 보기)이 검색 결과 상단에 떴다. 핸드폰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나직하고도 깊은 목소리가 기계에서 새어 나왔다. 오른편에 흐르는 우지천의 물살이 힘차게 울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윤동주 시인에게 부치는 편지 한 통을 일기장에 적었다.
우지 속 윤동주 시인을 찾아서
아마가세 구름다리: https://maps.app.goo.gl/jBW6LbcGneBse7se6
기억과 화해의 비: https://maps.app.goo.gl/J8zendFac9Z4c9Z3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