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년 전의 일이다. 출근길에 꽃다발 하나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서던 동료가 있었다. “그게 뭐예요?”하고 궁금증을 내비치자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회사 근처 허름한 꽃집에 들러 산 거라고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덕분에 검은색과 진한 나무색으로만 치장한 사무실에 싱그러운 기운 한 다발이 들어섰다. 그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새로운 꽃을 들고 나타나는 그가 보였다. 꽃의 주인은 탕비실에서 머그컵을 준비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딱 봐도 무해하게 생긴 머그컵에 꽃을 꽂고 물을 받아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내 자리에서 가끔 보였다. 얼굴 표정이 어땠을지 모르지만 어쩐지 신나 보였다.
하루는 그가 수국 한 다발을 사 왔다. 은은한 보라색이 네모나다고 하기엔 꽤나 동그스름한 꽃잎들을 성실히 물들여놓았다. 그 꽃잎 하나하나가 모여 이룬 다발의 모습은 바람을 가득 불어넣은 풍선 같았다. 한껏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서 손에서 놓치기라도 하면 하늘로 두둥실 떠올라갈 듯했다. 아마 한여름 기운을 톡 하고 꺾어 선물용으로 포장한다면 수국 한 다발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제 막 입사한 그를 제외하고선 모두가 정신없이 자판을 두들기던 때였다 (안타깝게도 수국의 계절은 그런 때였다). 타성적으로 근무시간 중 꽃향기를 맡을 여유는 없을 거라고 단정 짓곤 했다. 그렇다고 수국 한 다발이 사무실로 성큼 걸어 들어와 있는 게 싫진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그런 마음이 오로지 나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그가 꽃을 사 온 날이면 사내 메신저 채팅방이 유독 시끄러워졌다. 이번에 사 온 꽃이 무엇인지, 머그컵에 꽂아둔 풍경은 어떤지, 혹시 나중에 꽃을 나눠가질 순 없는지 등, 알게 모르게 모두가 그의 꽃 쇼핑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막 지나자마자 채팅방에 우는 얼굴 표정의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그였다. 아침에 싱싱하던 수국이 풀이 죽은 것도 모자라 시들어가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수국 심폐소생술 같은 게 있다면 알려달라는 호소가 가득했다. 웬걸, 그 메시지 하나로 너도 나도 인터넷 창을 열어 수국을 검색한 모양이었다. 채팅방에 이런저런 팁들이 올라왔다. 물 수(水) 자가 이름에 쓰일 만큼 수국이 물을 좋아한다는 설명과 함께 차가운 물에 담그다시피 수국 다발을 넣어 두길 추천한다는 답장이 눈에 띄었다. 물에 담긴 수국을 냉장고에 잠깐 넣어두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얘기와 함께 어느 식물학자의 말도 인용해 놓은 블로그 글이었다.
정시 퇴근을 향한 꿈을 키우며 몇 번이고 시계를 주시할 네다섯 시 무렵, 환호성이 들렸다. 그의 책상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수국이 다시 싱싱해져 있었다. 그는 수국을 손에 들고서 동그란 육상 코스를 닮은 사무실 복도를 빙 돌았다.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톤 선수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오후 여섯 시, 나는 그에게, 사실은 수국에게, 퇴근 인사를 던지며 사무실을 나왔다. 꽃에게 인사를 건네며 집으로 향하는 시간은 제법 향긋했다.
꽃을 향한 인사도 처음이 어렵지 나중엔 쉬워졌다. 그러고 보니 올해 6월, 교토 거리 위에서 나와 다영이는 인사성이 참 밝았다.
대기 중 수분기가 가득한 계절, 어딜 가나 수국이 보였다. 니시키 시장에서 각종 군것질거리를 사다가도, 벤리도에서 엽서 쇼핑을 하고 이노다 커피 쪽으로 걸을 때에도, 고등어 스시 가게를 지나 니넨자카 쪽으로 산책을 할 때에도, 우지에서 윤동주 시인의 자취를 따라 아마가세 다리 쪽으로 강변 산책을 할 때에도, 온통 수국이었다. 사무실에서 근근이 생명을 유지했던 한 다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싱그러움이 꽃잎마다 가득했는데, 꽃잎 네 장을 한꺼번에 따서 물걸레 짜듯 비틀어 본다면 파스텔 빛깔을 한 단물이 뚝뚝 떨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언제 빗방울이 떨어질지 모르는 여름 하늘 아래, 우중충한 하늘보다는 뙤약볕이 낫다면서 테루테루보즈(てるてるぼうず: 맑은 날씨를 기원하며 베란다나 지붕 끝에 매다는 종이 인형)의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던 우리의 모습과, ‘언제라도, 비가 온다면 즐거이 맞겠어요!’ 하며 땅 속에 뿌리를 내린 진녹색 수국 줄기의 늠름한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뤘다.
다영이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꽃을 만나고야 말겠어! 사진도 엄청 찍어야지!’라면서 두 주먹 불끈 쥐고 떠나는 꽃놀이 여행을 굳이 계획하지 않는 편이다. 놀이를 핑계삼아 꼭 만나고픈 누군가가 있지 않는 이상, 출퇴근길이나 슈퍼마켓 다녀오는 길 위에서, 혹은 테이크아웃 주문을 넣은 커피를 기다리는 가게 안에서, 어쩌다 푸르고 알록달록한 것들을 눈에 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일상 풍경 속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의 모습을 이뻐하는 게 왠지 더 ‘자연스럽다'라고 여긴다. 때문에 여행을 왔을 뿐인데, 거리마다 수국이 피어 있어 산책 내내 꽃놀이 아닌 꽃놀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얼떨떨했다. 예상치 못한 보라, 파랑, 분홍, 연두 피사체가 일본의 전통 가옥과 어우러지고, 적당히 톤다운된 교토의 간판들의 차분한 분위기를 살려주는 풍경. 그야말로, 제대로 여름이었다. 운이 좋았다.
소담히 핀 수국 옆을 걸으며 괜히 코를 벌렁거렸다. 유독 품종 개량이 잦은 일본 수국은 세계에서도 상위 품종으로 꼽힌다던 말도 생각났다. 수국이 향이 나는 꽃은 아니었지만, 꽃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들이마시는 초록빛 공기 같은 게 부드럽게 콧 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은 만끽할 수 있었다. 후. 무텁지근한 여름을 닮은 생명의 호흡이 피부에 와닿는 듯했다. 이전에 사무실에선 챙길 생각조차 못했던 여유가 여행지에선 절로 생겼다. 문득 그때의 내가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 했는지 살짝 억한 심정도 들었지만, 동료가 머그컵에 꽃을 꽂는 걸 지켜보는 것에서 모르는 이의 정원에 핀 꽃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리는 상황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결단과 도전이 있었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당장은 언제 어느 거리, 모퉁이, 정원에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수국에 좀 더 집중하면서 인사를 건네보았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