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일본
종종 무언가 하질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닌 상황인데도 종종 그런다. 현상 유지를 하더라도 잃는 것 하나 없이 충분히 괜찮은데, 뭐가 문제인 걸까? 불안하고, 조바심도 나고, 에너지를 쏟는 대상이나 활동에 의구심을 품고. 결국엔 던진다. '이대로 괜찮은 건가?' 하는 물음을. 그때마다 갈림길을 마주한다.
한쪽은 어제와 오늘을 점검하면서 "현상 유지냐, 방향 전환이냐?"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는 길이다. 얼마 안 가서 표지판이 보이고 길 위의 흙먼지도 잦아드는 길, 운이 좋으면 비슷한 결정을 내린 동행과 말을 섞을 수도 있는 길이다. 반면, 다른 한쪽은 답변을 유보하며 생각에 잠기는 길이다. "잘 모르겠어, " 하면서 보행로가 나 있지 않는 숲 속으로 들어가 한동안 모습을 감추는 길이다. 발 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어느새 숲을 빠져나와 샛길에 접어드는 방향이다. 앞서 설명한 길과 결국엔 합류하는 길이다. 우회로라고나 할까.
아날로그를 찾는 건 주로 두 번째 길 위에서다. 효율을 따지기보단 과정과 그 과정 속에 임하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을 때, 한 박자 쉬어가면 다른 게 보일 지도 모른다며 제동을 걸고 싶을 때, 편안히 무언가에 몰입하고 싶을 때, 오래된 것과 이젠 지나간 것에서 역사를 읽고 삶의 자취를 느끼고 싶을 때 (그를 통해 나 또한 역사 속에 있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싶을 때),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을 회상하고 싶을 때 (그리고 그 회상이 일상 중에도 이어지게 하고 싶을 때). 결국엔 나를 잃고 싶지 않을 때.
필라테스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던 길고 깊은 호흡을 떠올리고, 좀처럼 식지 않을 것 같은 차 한 잔을 호호 불어 식히고, 아날로그의 풍경을 떠올린다. 가능하다면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기로 한다.
여행자에겐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까지도 세세히 관찰하고픈 마음이 있다. 걸음이 평소와 다르게 느리거나 빠른 것도 그 때문이다. 6월에 교토를 찾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옷차림과 메이크업, 주차장 사인과 폭염주의 공고문, 자판기에 진열된 상품의 종류와 가격, 카페 추천 메뉴, 베스트셀러의 표지, 강변에서 쉬는 사람들의 모습... 한국의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풍경이 있다면 감탄사부터 뱉는다. 우와, 오, 헐, 이야, 오호, 캬, 에, 뭐지, 왜, 음... 아주 성실한 방청객이 된 기분이다.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 중엔 일찌감치 디지털이 대체한 줄로만 알았던 아날로그가 버젓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빠지질 않는다. '아직 있구나. 저걸 잊고 지냈네. 저걸 뭐가 대신했더라? 예전엔 어땠었더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뒤따라 왔다.
새빨갛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우체통과 우체국, 우편배달 차량도 그중 하나였다. 런던 이층 버스가 떠오를 정도로 산뜻하게 빨갛다. 네모가 저렇게 귀여울 수 있었나. 영화 <wall-E>에 등장할 법한 심부름 로봇을 닮았다. 빨간 네모 위를 빼곡히 채운 일본어와 영어 안내문이 풍경에 매력을 더했다. 주변에 담배꽁초나 쓰레기 더미가 쌓인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소변 냄새도 나질 않고 깔끔하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다시 봐도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의 나는 빨간 우체통으로 수없이 무언가를 들이밀었었다. '당연히 써야지' 하면서 정기적으로 보냈던 카드 중엔 생일 카드와 어버이날 카드, 스승의 날 카드가 있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아껴두었던 편지지를 꺼낼 땐 '받는 사람을 위해 이 편지지를 쓰다니! 대단해!' 하면서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냥 보기에 이뻐서 사두었다가 특별한 날에 글자를 빼곡히 적어 보냈던 카드도 좋아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학교에서 구입한 크리스마스실을 우표 옆에 나란히 붙여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가장 맘에 들었다. (놀랍게도 집에는 우표가 늘 있었다. 수집용으로 정기 배송/구독받는 기념우표도 있었지만, 우체국에서 판매하는 우표들도 구비하며 살았었다. 돌아보니 참 독특한 집이었다. 물류 일을 할 필요가 없는데 집에 택배 송장을 한 묶음 사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어떤 이유에서건 한번 쓰기 시작한 편지는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와다다다 써 내려갔었다. 스티커로 봉투를 밀봉하고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주소까지 꼼꼼히 써 내려간 후, 오른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쓰기 근육을 풀어주며 우체통 앞으로 걸어갈 준비를 했다. 기왕이면 카드가 젖지 않을 날, 해가 쨍쨍하진 않더라도 비는 오지 않는 날이면 우편 발송을 실행에 옮겼다. 간혹 우체통으로 들이미는 우편물이 밑바닥에 '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면 '우체부 아저씨께서 방금 우체통을 비우셨나 보군, ' 하면서 '좀 더 기다려야 그 사람이 내 편지를 받겠구나' 했다. 잠시나마 우체통에서 머물러야 할 나의 메시지들을 달래주었다. 조금 늦겠지만 전달하기로 한 메시지들은 결국에 보내질 거라면서 잃을 게 없다고 했고, 그대로 기분 좋게 귀가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별다른 조작 없이는 계속해서 불이 들어와 있을 '로그인/접속 중'의 초록색 동그라미가 눈앞에 떠다니는 하루하루다. 이메일과 메신저, 원격 화상 회의가 끝이 없다. 손으로 꼭꼭 눌러쓰는 글은 나 자신을 유일한 독자 삼은 일기가 전부다. 아주 가까운 친구나 멘토에게 부치는 축하/감사 카드가 있긴 하지만, 이전과 비교했을 때 빈도수가 많이 줄었다. 즉각 확인 가능한 디지털 매체의 힘을 빌릴 때가 많아졌다. 언제든지 메시지를 즉각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은 뭐든지 쉽게 쓰고 지울 수 있게 했는데, 부담이 적어진 대신에 메시지가 짧고 가벼워졌다. 얼굴 마주 보며 나눌 수 있는 얘기더라도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통해 찍 하고 날릴 때가 많아지자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언제든지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피곤해졌다.
언젠가 나의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가 닿을 거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우편물 분실이나 스팸메일함, 반송 등의 문제는 잠시 제쳐두자). 그런데 무언가 바뀌긴 했다. 확실히. 이대로 괜찮은 건가?
그날, 교토의 우체통 앞에서 보이지 않는 편지를 부쳤다. 아무래도 두 번째 길로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