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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소개받았습니다

교토, 일본

by 프로이데 전주현

저녁 식사로 배와 마음 모두를 든든히 채우자, 교토 여행만 열한 번째인 다영이가 나란히 걷던 길을 앞장서면서 말했다.


"너한테 소개해 줄 거리가 있어."


사람도 반려동물도 아닌, 걸어 다닐 곳을 소개받다니. 처음이었다. 어떤 곳이길래 저렇게 걸음이 위풍당당해진 걸까. 친구를 따라 걷는 길 위에서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걷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여럿 보았다. 좌측통행이 익숙지 않은지 애써 왼쪽으로 걷는 나와 계속해서 충돌하며 걸었다. 우리가 평소보다 저녁을 조금 일찍 해결했으니, 저들은 이제 시내로 가서 식사를 하겠지?


"여기서 코너를 돌면, 짜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영이가 걸음을 멈추더니 가이드처럼 팔을 곧게 뻗어 보였다. 보도블록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시원시원한 길. 보도 좌우로 목조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엄청 조용했다. 구글맵에 좌표를 찍기 위해 GPS를 켰다. 확인 결과, 거리의 이름은 하나미지도리(花見小路), 기모노 상점과 레스토랑이 일본 전통 가옥에 들어서 있는 곳으로 게이샤를 볼 수도 있는 역사지구였다. 사연 있어 보이는 길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다영이의 태도가 이해가 갔다.


교토엔 17-18시에 문을 닫는 가게들이 많아서인지, 저녁 시간의 하나미지도리는 인기척이 적어 보였다. 얼마나 조용한지 빈 건물만 덩그러니 남은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터널 너머의 요괴 온천 마을에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 느꼈을 법한 당혹스러움이 이런 적막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왜 이렇게 조용해' 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도중, 이따금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면서 무언가 요리하고 있는 한 고급 식당의 주방이 나무 창살 사이로 희끗희끗 보였다. '그렇다고 잠들어 있는 거리는 아니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했다. 아름아름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거리가 어떻게 이토록 조용하단 말인가!


거리 구석구석을 구경하는데 도서관을 누비는 기분이었다. 건물 외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여행 기분이 제대로 났다. 나무라는 친숙한 재료로 지은 건물이 묘하게 이국적으로 생겼기 때문일까. 서울의 한 골목길에서 신축 한옥과 오래된 한옥을 구분하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걷듯, 하나미지도리의 오래된 목조 건물과 신축 목조 건물을 비교해 가면서 이래저래 사진을 찍었다.


목조 건물의 최대 취약점이라는 작은 불씨(화재)에도 대비하고 일본 정원 특유의 절제 미학도 챙길 겸, 건물 벽면마다 놓아둔 자그마한 연못/물통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외벽 쪽에 4분의 1 원 모양의 대나무 호가 덧대어진 것도 신기했다 (다영이 말로는, 건물 안 쪽의 소음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목조 건물의 특성을 보완하려고, 보행자들이 많이 다니는 길 쪽에 일종의 방음벽을 설치한 거라고 한다. 강아지의 노상방뇨를 막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이름은 이누야라이(いぬ‐やらい)). 현관 앞에 피어 있는 수국과 늘어 뜨려 진 차양막, 무심하게 툭 놓여 있는 자전거. 이 모든 게 목조 건물의 심플한 디자인과 어우러지면서 '일본스러움'을 자아냈다.


감탄을 연발하며 하나미지도리를 걸으니 다영이가 흐뭇하게 날 바라봤다. 본인의 가이드가 제대로 먹혔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는 표정인데, 그를 보는 게 또 재미있어 감탄을 이어갔다. 감탄이 하나둘씩 쌓일 때마다 다영이의 "내가 왜 그렇게 교토만 왔는지 알겠지?" 하는 멘트를 들었다. 자신의 취향이 통할 때의 기쁨을 애써 감추지 않는 모습, 나랑 똑같다. 이래서 같이 다니나 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하나미코지도리의 골목 구석구석. 사진을 꼭 찍고 가라는 듯한 장소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사실, 소개할 곳은 하나 더 있어."


미처 못한 고백이라도 하려는 듯 다영이가 쭈뼛쭈뼛 다음 카드를 들이밀었다. 하나미지도리 일대는 다음날 좀 더 즐길 수 있으니, 비가 내리지 않는 오늘 같은 저녁에 걸으면 좋을 곳이 숙소 근처에 있다고 했다. 어차피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가는 길에 또 하나의 거리를 소개받는다면 최적의 동선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자!" 하고 동조했다. 그렇게 걸어 걸어, 카모강변과 바로 맞닿아 있는 골목길 폰토초(先斗町)로 들어섰다.


몇 번이고 벽으로 몸을 붙여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천천히 걸었다. 하나미지도리로 걸을 때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걷던 외국인 관광객들 대부분이 아마 폰토초로 온 모양이었다. 이 좁은 골목길에선 17/18시에 영업을 종료한다는 교토 상점들의 룰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게이코들이 일하던 유서 깊은 유흥거리답게 떠들썩했다. 앞선 비유를 이어가자면, 붉은 등불로 영업시간을 알리며 활기차게 장사를 시작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온천 마을 같았다. 전통 가옥이 양 옆으로 들어서 있지만, 가게 종류는 찻집과 펍, 수공예품 등으로 다양하고, 꼭 전통적인 것으로만 이뤄져 있진 않았다.


폰토초를 걸으니 일기 예보 상 왔어야 할 비가 내리지 않은 것에 다시 한번 크게 감사했다. 우산을 들고 좁디좁은 폰토초를 뚫고 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을 거였다. 거리 구경과 행진을 동시에 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가 일전에 다영이가 가르쳐 주었던 새의 그림이 그려진 붉은 등을 발견했다.


"이 새! 이름이 뭐랬더라?"

"아, 치도리?"


치도리(千鳥)는 우선 한국어로 물떼새라고 불리는 새로 번역되지만, 물가에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새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할 때 쓰이기도 한다. 일전에 방문한 교토의 문구점들에서 이미 치도리를 굿즈로 만난 적이 있었기에, 거리에서 치도리를 다시 만난 게 은근히 반가웠다. 치도리는 날개 두 쪽을 활짝 펼치며 날아가는 모습으로 심플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담대한 몸짓이 비해 덩치가 꽤나 비대해서, 날갯짓이 상대적으로 하찮고 귀여워 보인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주로 쌍을 이뤄서 등불 위에 그리는 치도리를 보고서 다영이가 보태주었던 설명을 다시금 떠올렸다. 치도리라는 새가 한 쌍을 이뤄서 파도 위를 날아가는 모습을 많이들 그리는데, 주로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는 부부의 이미지로 많이 쓰인다고 했었다.


어쩌면, 신혼 생활 중 고등학교 동창과 3박 4일 여행을 나온 내게, 다영이가 선배 유부녀로서 신경 써서 해준 말이 아닐까. 자신도 치도리의 상징성을 어쩌다 알게 되었는데, 배우자와 함께 서로에게 멋진 짝꿍이 되어주기로 한 약속을 떠올리니 치도리 한 쌍을 거리에서 보는 게 좋았다면서. 여행의 맥락에 꼭 맞는 상징과 지식 덕분에 한국에 두고 온 남편 생각을 한 번이라도 더했다.


"맞다, 치도리!"


'아싸, 가오리!'의 텐션으로 폰토초 가운데서 치도리를 외치자 다영이가 깔깔 웃었다. 그렇지만 하나미지도리부터 폰토초까지, 천천히 자유롭게 거리를 구경하며 의식의 흐름 토크를 이어가는 중에, '나도 교토에 와서 새로 안 거 있어!' 하는 것 중 하나인 치도리를 발견한 상황이니, 반가운 척, 아는 척 좀 한다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지 않은가. 핏대를 세우기라도 한 듯 불그스름해진 거구를 파도 너머의 어느 곳으로 이동시키는 날갯짓. 어쩌면 치열하고 어쩌면 유유자적할 치도리의 비행. 그 비행이 다른 누구도 아닌 짝꿍과의 비행인 점이 맘에 쏙 들었다.




(하단 좌측과 중앙) 문구점에서 발견한 치도리 굿즈와 폰토초에서 발견한 치도리 등! 뚱뚱하고 귀여운 병아리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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