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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책방 산책: 별의 왕자님을 찾아서

교토, 일본

by 프로이데 전주현

초저녁인데도 영업 종료 사인을 내건 가게들이 많이 였다. 기울이지 않는 교토의 밤은 고요 걸까? 한낮의 일정이 행군 같았던 것과 다르게, 저녁시간은 여유로웠다. 해 볼 수 있는 거야, 뭐, 맛있게 저녁을 먹고, 카모 주변을 산책하며, 늦은 시간까지 휘황찬란한 간판을 내건 돈키호테나 약국에 들러 쇼핑을 하거나, 편의점을 종류 별로 다니면서 간식거리를 사는 것. 그 정도였다.

" 하고 싶은 없어?" 다영이가 물었다.

"<어린 왕자>를 있으면 좋은데." 내가 답했다.



여행자의 옷을 입고 걸을 의무사항처럼 서점에 들른다. 체인점이어도 괜찮고, 지역 서점이어도 좋다. 우연히 구멍가게 같은 서점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반색하며 입구부터 찾는다. 문장을 읽을 없는 상황이라도, 서점에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많다. 이방나라의 라이프스타일과 문화, 미적 감각까지! 서점 여행은 종이 냄새를 폴폴 풍기는 이야기 숲으로의 산책을 닮았다.

그리고 어느 여행지의 어느 서점을 가건, 나의 사랑하는 책, 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있다.


번을 읽더라도 질리는 법이 없는 책이다. 매번 마음의 종을 하고 울린다. 두께가 얇아 들고 다니기 좋아서 가방 속에 넣고 다니기도 좋다. 하지만 속에 담긴 이야기가 결코 가볍지 않아, 그림 가득 조금인 페이지 하나를 5 넘게 넘기지 못할 때도 있다. <어린 왕자>를 읽으면 잊고 싶지 않았으나 (어쩌다 보니) 잊고 지냈던 것들, 이를테면 진심 어린 관계, 사랑의 표현, 돈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결심 등이 떠오르기 쉽다. 그런 날에는 일기장에 회개의 기도문을 길게 적는다. 일종의 명상이다. 독서 한 번이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으로 이어지다니, 놀랍다.


<어린 왕자> 정도 되는 이야기라면 외국어로 번역했어도, 하는 울림이 변치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덕에, 지금껏 몇 번의 여행 중, 외국어 지식 유무와 상관없이, 나는 다양한 언어의 <어린 왕자> 모았다. 리추얼이라면 리추얼이었고, 강박이라면 강박이었고, 취미라면 취미였고, 쇼핑이라면 쇼핑이었고, 기뻐서 일이라면 기뻐서 일이었다. 결과, <어린 왕자>, <Der kleine Prinz>, <Le petit prince>, <小王子>, <Il piccolo principe>... 서가 한쪽에 믿음의 조각 권을 꽂을 있게 되었다.


" 시간에 책을 있는 곳이라..." 다영이는 생각에 잠겼다.

"다들 닫았겠지? 아니면, 마지막 날에, 교토역 서점에 가보는 건 어때? 체크아웃하고선 공항 , 어차피 교토역 거쳐야 하잖아." 친구에게 괜히 과제를 던진 같아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영이가 소리쳤다. "북오프가 있다! 거기 가면 있을 거야!"

"북오프?" 구글맵에 검색부터 해보았다.


북오프(Book-Off) 일본의 중고 서적 체인점으로, 일본 헌책방 체인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알라딘중고서점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값에 만화책을 구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취급 물품은 분야 도서들과 DVD, CD, LP,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생활용품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저렴한 값에 판매하는 제품들이 대부분이지만, 입고 제품 평가가 꽤나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운이 좋으면 상태가 매우 양호한, 거의 책과 다름없는 <어린 왕자> 값에 구할 수도 있다는 다영이의 추측이었다.


'<어린 왕자> 되팔 생각을 하다니! 도대체 주인은 무슨 생각을 거지?'

'누군가의 손을 거친 물건들을 구경하는 심야 책방 산책이라니, 아주 멋진 코스잖아? 새것 같은 것을 찾을 있는 행운이 따랐으면 좋겠다!'


마음이 충돌했다.


'헌책이지만, 새것 같을 수도 있잖아. 책이 낡았을진 몰라도 <어린 왕자>가 담은 이야기는 그대로일 거야. 오히려 빈티지스러운 멋이 있을지도 모르지. 현지 문구점만 다녔지, 서점은 아직 갔었으니 오늘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갖은 합리화 끝에 방앗간(서점)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여행자) 되었다. 오후 11시까지 영업이라니, 교토에선 보기 드문 야행성 서점이었다.




'어서 오세요,' 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안경을 청년이었는데, 체크무늬 셔츠에 흰색 티셔츠를 받쳐 입은 모습이 깔끔한 북오프 내부와 어울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도서들은 년째 일본어 공부를 손에서 놓았던 나조차도 어려움 없이 읽을 있는 아동 도서들이었다. 알록달록한 커버와 귀여운 그림 덕분에 세로 읽기의 불편함을 가실 정도였다. 말로만 명성을 들었던 일본의 영화 팸플릿들도 구경할 있었다. 소장용으로 손색이 없을 영화 굿즈로 보였다. 만화책의 비중이 가장 많았다. 원피스와 명탐정 코난부터 아따맘마와 도라에몽까지. 만화 강국의 헌책방에 찾아와 직접 만화책을 뒤적여 본다는 사실에 익히 봤던 장면들도 괜히 새롭게 다가왔다.


'세계문학... 따로 구분해 놓았으려나?'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더듬더듬 읽던 , 다행히 익숙한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분명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그중에서도 장발장의 딸인 코제트를 묘사한 삽화였다. 고개를 조금 아래로 향하니 양철 나무꾼과 사자, 허수아비가 소녀를 껴안고 있는 그림이 보였다. 아하,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였다.


<레미제라블>과 <오즈의 마법사> 모두 일본에서 인기 있는 책의 형태 '문고본(ぶんこぼん; [분코본])'으로 되어 있었. 문고본은 책을 보관할 때 공간을 절약할 수 있게끔 작게 만들어진 판형으로, 출퇴근길 지옥철에서도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 편한 사이즈다. 전반적으로 디자인이 귀여운 인상을 풍겨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모양의 책이다.


'여기 있을 같아. 어쩌면 문고본으로 구할 있을지도?!' 연이은 고전 발견에 갑자기 자신감이 붙었다.


구글에 <어린 왕자> 일본어 제목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星の王子様>. 직역하자면 '별의 왕자님'이었다. 독일과 미국, 이탈리아와 중국에서 '어린' 또는 '작은' 왕자로 제목 번역과 원제인 'le petit prince'를 생각해 보더라도 느낌이 사뭇 달랐다.


'호시... 노... 오.. 지사마...' 핸드폰 화면과 세계문학 서가의 책 등을 일일이 대조해 가며 일본어 제목을 읊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뎅 하고 울렸다. 하늘색 테두리의 귀여운 문고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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