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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작은 저녁을 함께 하고픈 사람을 떠올리는 것

교토, 일본

by 프로이데 전주현


일정표에 적힌 이름은 대게 두 부류로 나뉜다. 점심을 함께 하고픈 사람과 저녁을 함께 하고픈 사람.


점심을 함께 하고픈 사람과는 태양 아래에서 만난다. 밝을 때 만나도 부끄러울 게 없는 사이다. 자연광과 형광등 불빛을 마구잡이로 흡수하다가 건물을 빠져나온 얼굴. 그 위엔 혼돈이 가득하다. 훤한 시간대에 훤한 얼굴. 그의 결점과 고민도 덩달아 훤하게 드러난다. 맞은편에 앉아 그를 지켜보는 나도 형편이 다르진 않다. 당장 오늘 끝내야 할 숙제와 결코 하루 만에 끝나지 못할 고민이 뒤범벅이 된 얼굴. 너도 나도 얼룩덜룩한 시간이다.

접시와 컵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세수 같은 걸 한다. 젓가락질 한 번에, 포크로 쿡 집어 드는 야채 한 점에,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이 조금씩 닦인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식사 시간 이후, 오후를 준비한다. 언제든지 다시 얼룩덜룩해질 수 있지만, 잠깐이나마 나의 원래 모습을 되찾아보자면서 숨을 고른다. 미온수로 적신 얼굴을 수건으로 조심스레 눌러 닦는다.


하늘에 파스텔 기운이 강해지고 달이 서서히 높게 떠오르다 보면 저녁이 된다. 부드럽게 어두운 그림자가 얼룩덜룩한 얼굴 위로 드리운다. 김 대리, 박 과장, 최 인턴, 이 리더... 직함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는다. 너도 나도 그제야 좀 더 자유로워진다. 여유가 생겼는지 배가 고픈 것도 같다. 하루를 마쳤다는 홀가분함과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기쁨과 책임감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럴 때 나는 그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한다. 웨이팅을 조금 감수해야 하는 외식도 좋고,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어설프게 따라 하는 집밥 요리도 괜찮다. '오늘 하루 어땠어?' 하는 질문 하나에 각자 입으로 일기 한 편을 뚝딱 완성한다. 몇 년치 밀린 고해성사라도 하듯 재잘재잘. 시간에 쫓기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어딘가 들어가야 한다면 그곳이 집이어야 한다는 생각. 그 덕에 걸음이 묵직해진다.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저녁을 함께 하고픈 사람과는 버스를 타고 가도 될 귀갓길을 괜히 걸어서 간다.


그래서, 저녁시간을 더 좋아하냐고? 그때 시간을 보내는 사람과 더 가깝게 지내냐고? 사실 어느 쪽이 더 낫고,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점심은 점심대로, 저녁은 저녁대로 나의 일상을 채워준다. 수저를 드는 그의 모습과 그를 마주하는 나의 모습이 하나둘씩 기억의 창고에 쌓여갈 뿐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이란 점에서 일관성 있게, 재미난 일이다.



그런데 여행 기간 동안의 일정표는 뭔가 다르다. 점심과 저녁 식사의 맞은편 자리에 앉을 이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대신 생소한 장소 명이 빼곡히 적혀 있다. 대부분 식당 정보다. 함께 여행하는 이와 매 끼니를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식사 일정만 보더라도 여행은 역시나 특별한 경험이다.


점심 식사 장소는 동선을 최대한 고려해서 결정하게 된다. 아무래도 식사 시간 앞 뒤로 일정이 끼어있으니, 에너지와 시간을 아끼려고 먹고 싶은 메뉴보다는 먹어도 괜찮은 메뉴를 선택한다. 교토에서의 3박 4일간 각 잡고 먹은 점심식사가 사실상 없다는 걸 나중에 글로 정리하고서야 깨달았듯이, 여행 도중의 점심식사는 여행이란 대주제 아래 조용히 (그리고 처참하게) 무시되기 쉽다.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숙소에 체크인했던 여행 첫날. 인천공항 터미널에서 사 먹었던 순두부의 기운에 아직도 뱃속에 가득했기에 니시키 시장에서의 군것질과 시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둘 째날에는 아침으로 먹었던 오반자이 한 상의 기운이 오래 남았기에, 녹차빙수나 가리비 슈크림 빵, 두부 만쥬 등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나마 셋 째날은 우지로 근교 여행을 떠난 덕(?)에 도리기쿠에서 녹차 우동 한 상을 주문했지만, 마지막 날엔 공항으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먹는 간편식으로 점심을 대체했으니, 4일 간 나와 다영이는 점심을 거의 거르다시피 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수했을 점심시간이 '걸으며 먹기, 군것질로 때우기'로 대체되었다. 교토를 조금이라도 구석구석 보고픈 욕심 때문이었다. 그래도 점심시간을 갖지 않은 건 또 아니었으니 배고프진 않았다. 하굣길에 컵볶이 하나 손에 들고서 집으로 걸어갔듯, 고등학교 동창인 다영이와 길과 가판대 위의 식사를 이어간 셈이었다. 얼룩덜룩 찌든 얼굴로 맞는 한국에서의 점심식사와 다르게 알록달록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무언가를 우물우물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맘 바쁜 여행자라 할지라도, 저녁식사의 여유로움을 포기하기란 힘들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사진첩에는 저녁식사 때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18~19시에 문을 닫는 가게들이 많은 교토의 상점들의 바른생활도 한 몫했다. 한낮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정보단 한 박자 쉬어가는 일정이 저녁에 딱이었다. 여유를 좀 챙겨도 된다는 생각에 떠오르는 건 먹고 싶은 메뉴, 기왕이면 일본 현지의 느낌이 제대로 살리는 음식들이었다. 참고로 다영이는 그때마다 나마비루(なまビール; 생맥주)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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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저녁식사 메뉴는 충격적인 비주얼과 달리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던 니신온소바였다. 청어(にしん [니신])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데, 잘게 썬 파 고명만 올려 먹는 국수 한 그릇이다. 숟가락 없이 젓가락만 덜렁 있는 소바 한 상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서빙해 주시던 아주머니께서 "일본식으로 그릇을 째로 들고 국물을 드시면 됩니다" 하고 설명해 주셨다. "하이(아, 네 알겠습니다)" 하고 답한 뒤, 조심스레 그릇을 들어 올려 쯔유 국물을 마셔보았다. 텁텁한 기운 하나 없이 목 넘김이 깔끔하다! 가시를 따로 발라낼 필요 없다는 생선조림을 젓가락으로 뚝 끊어내 보니, 간장 조림이 제대로 되었는지 속살이 고르게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어릴 적 식탁 위에 종종 올라오던 양미리조림을 닮은 청어조림. 그대로 먹어도 훌륭하지만 소박한 메밀면 위에 얹어 먹으니 궁합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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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째날 저녁.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 두었던 식당이 만석으로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하자, 여행 도중에 오며 가며 눈에 담았던 가게 중 하나로 다짜고짜 들어가 보았다. 셰프 할머니께서 요리를 하시다가 중간중간 담배를 피우시던 것 말고는 오롯이 현지인들만 찾는 가게라는 인상을 주었던 가게. 바에 앉은 우리 뒤쪽에는 퇴근 후 동기들끼리 삼삼오오 맥주를 마시러 온 일본 회사원들이 있었다. 최근에 소개팅을 헸는데 그 사람은 어땠고 저 사람은 어땠다는 식의 대화. '어딜 가나 생맥주 하나를 곁들이는 대화는 비슷하게 흘러가는 건가, ' 하고 생각할 무렵, 주문한 야끼소바오꼬노미야끼가 나왔다. 일제히 춤을 추는 가쓰오부시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갖은양념에 잔뜩 버무려진 양배추를 한 입 가득 밀어 넣었다. 교토식 오꼬노미야끼는 재료를 잘게 손질해 반죽에 섞어 구워내지 않고, 메인 재료가 되는 토핑을 반죽 위에 통째로 얹어 굽는다더니, 과연 메인 재료로 고른 오징어가 반죽 위에 넓게 도포되어 있었다. 라자냐를 닮은 교토식 오꼬노미야끼를 삼키듯 씹으며 "우리 오늘 참 많이 걸었다, 그지?" 하고서 두툼해진 사진첩을 함께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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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저녁식사. 이즈우란 이름의 식당을 찾아가 사바즈시(고등어초밥) 정식을 먹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이즈우 본점이 수요일 휴무였다. 그런데 같은 이름의 식당이 구글 지도에 뜨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니시키 시장 근처에 위치한 백화점의 지하 식품관에 입점해 있는 이즈우였다. 우리나라처럼 일본 백화점의 식품관도 각지의 맛집을 한 데 모아놓고 파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일본의 미식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 곳이 일본 백화점 식품관이라며 다영이가 한 마디 거들었다. 본점만큼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누리며 식사를 할 순 없었지만, (다영이 피셜) 사바즈시의 맛만큼은 그대로였다. 일본에 왔는데도 스시를 먹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사바즈시 외에도 교토의 야채가 잔뜩 들어간 유부초밥과 마끼롤이 함께 제공되는 세트를 주문했다. 주문과 동시에 눈앞에서 손을 바삐 놀리시는 스시 장인의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교토 지역 사람들이 고등어를 나름대로 맛있고 신선하게 먹기 위해 소금 등으로 절이기 시작한 게 사비즈시의 시작이라고 한다. 고등어 살점을 삭히면서도 비린내 없이 고등어 특유의 기름진 고소함을 제대로 살리는 기술이 관건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먹기 전에 제거하고 드세요' 라던 해조류 잎이 비법 재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동선을 고려하다 조금 짓밟히고 찌그러지기도 한 점심식사와 일일 이만 보 걷기 후 뒤늦게 여유를 챙기는 저녁식사. 여행지에서의 일정은 그렇게 둘로 나뉘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부족하지도 않았다. 매 끼니엔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있었고, 점심 저녁을 막론하고 함께 식탁을 나눌 사람, 여행메이트가 묵묵히 자리를 빛내주었다.


어쩌면 점심이건 저녁이건 매 끼니를 함께 하고픈 사람을 여행메이트로 삼는 게 여행 계획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은 무엇으로, 아니, 누구와 할까?" 이 생각 하나로 일상 중에도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글과 사진 속 장소 정보


니신소바: 마츠바 본점 https://goo.gl/maps/fnEvPj9AJ87ubEPF9


오꼬노미야끼, 야끼소바: 鉄板料理勝屋 https://goo.gl/maps/W7F1YbdxB9XsfUgV6


사바즈시: 이즈우 본점 https://goo.gl/maps/8TGbahNMDv1SZnjy7

사바즈시: 이즈우(백화점 식품관 매장) https://goo.gl/maps/cM6nLSQwJTdBXE1q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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