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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마음과 기울어진 버스

교토, 일본

by 프로이데 전주현

인파 속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환히 웃는 얼굴 근육들, 감기 기운에 정신 못 차리는 친구 앞으로 조용히 내미는 티슈 몇 장, 오랜 편지를 파일에 넣어 보관하는 정성, 미끄러운 길 위에서 지팡이 대신 나를 잡으라며 내미는 손 … 마음을 빼앗기는 건 한순간이다. 어벙벙하게도.


경찰은 책상 맞은편에 도둑맞은 마음을 앉힌다. 마음을 빼앗아 간 게 무엇일지 추측해 보라고 한다. 보기엔 작고 사소하나, 안에 담긴 뜻은 크고 중요한 것들이 용의선 상에 오른다. 솔직한 마음,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 어린 마음, 관계를 소중히 하는 마음,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마음… 경찰은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다가 손을 떼더니 무언가 알아냈다는 듯 눈을 반짝인다.


“배려네요. 마음을 앗아간 건.”


도둑맞은 마음은 맞장구를 친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박수까지 친다. 그새 눈망울이 이전보다 조금 촉촉해진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이 배려란 녀석이 무엇이길래. 경찰이 말한다. “저희가 배려의 연락처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 중으로 도둑맞으신 것의 안부도 물을 겸 전화를 넣어보겠습니다. 집에 돌아가 계시면 사건 경위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수사망이 좁혀졌다는 안도감에 도둑맞은 마음은 경찰에게 편안히 인사를 건네고 서를 나선다. 그를 뒤에서 바라보는 경찰의 표정이 밝다. 따스하다.



나도 경찰서를 방문했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 중에도 교토는 몇 번이고 내 마음을 앗아갔다. 후유증(?)도 커서 여행앓이의 강도도 셌다. 심리 상담가를 찾은 내담자처럼 경찰 아저씨의 책상을 반복적으로 찾았다. 기억에 남는 도둑맞음의 순간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첫 번째 용의자(?)는 고즈넉한 전통 가옥이 가득한 목조 건물 거리였다. 스카이라인이 현저히 낮아지고 건물의 재료가 조금 더 자연적인 것으로 이루어졌을 뿐인데도 시티라이프가 강요하는 속도의 삶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잃었던 (혹은 잊었던) 여유로운 걸음을 되찾자,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이 생겼다. 어깨와 가슴도 괜히 한 번쯤 펴고 걷자, 거북목 증상도 괜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예스런 거리, 자연친화적인 거리, 여유로운 걸음. 네, 계속하세요." 경찰은 키보드 메모를 계속했고 나는 두 번째 용의자에 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교토는 오래된 것과 더불어 사는 곳이었다. 쉽사리 물건을 버리지 않고, 오래된 것의 별난 점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길 즐기는 나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모든 것을 새것으로 바꿔야만 직성이 풀리는 혁신(?) 정신이 결여된 도시라니 재미있었다. 재래시장부터 문구점, 화장품 가게, 조식 전문 식당, 찻집, 도자기 가게까지, 교토에는 어딜 가나 몇십 년, 경우에 따라서는 몇 백 년이 넘는 역사와 이야기가 가득했다. 오래된 것들 곁에 있으면 사람이 살아온 방식과 고민하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가 많아진다면서, 교토의 낡고 오래된 가게들을 찬양하며 걸었다.


“오래된 것, 역사 깊은 가게들. 네, 그러셨군요. 한 가지 더 있으시다고 했죠?" 경찰의 시선은 줄곧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보였다. 나는 핸드폰 사진첩에서 사진 두 장을 골라 경찰에게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만, 사실 제 마음을 가장 먼저 앗아간 게 바로 이거였어요.”


버스였다.



도시 풍경에는 빼놓을 수 없는 대중교통 버스. 그중에서도 사진이 가리키는 버스는 민트색 몸통에 진녹색 간판으로 톤온톤(tone on tone) 치장을 하고 있던 버스였다. 숙소 근처에 쇼핑가가 길게 늘어서 있는 덕에 매일같이 몇 번이고 마주쳤던 교통수단이었다. 아기자기한 일본어 텍스트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는 버스를 구경하는 것은 이국적인 경험이었다. 한국에도 버젓이 있는 버스가 교토에선 사뭇 달라 보이다니, 가까이 있는 것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여행의 통찰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김없이 민트색 버스를 오른편에 두고 걷는 낮. 왠지 모르게 버스가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분 탓인가 싶어 굽은 등을 괜히 한번 펴보고 기지개를 켜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낮에 보아도, 밤에 보아도, 왼쪽 타이어에 바람이라도 빠진 것처럼 버스가 삐딱하게 정차하고 움직이는 게 눈에 걸렸다.


“다영아, 저 버스, 바퀴 바람 빠졌나? 좀 기울어진 것 같지 않아?” 궁금함에 내뱉은 말에 의외의 답이 따라왔다.

“아 저거, 일부러 저렇게 설계한 거래."

"일부러?"

"응. 노약자와 휠체어 승객들을 배려해서 승하차 지점이 조금이라도 지면과 가깝도록 디자인한 거야. 휠체어 승객을 위해선 승하차 지점에 낮은 경사의 발판 하나를 더 대주기도 하고."

“와.” 기울어진 버스의 비밀을 알게 되자, 교토에 마음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노인 인구 비율이 많은 일본 사회는 버스 안으로 타고 버스 바깥으로 내리는 것도 큰 동작, 모험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자유롭게, 어려움 적게 이동하고픈 마음이야 남녀노소, 장애 유무를 막론하고 동일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사회가 던졌다니, 멋졌다. 모두가 편히 걷고 움직이는 도시를 위한 작은 설계. 그 안에 내재된 배려가 돋보였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내게 다영이는 노약자를 위해 달리던 버스를 잠깐 세워두고 시간을 좀 더 할애한다고 해서 눈치 주는 승객도 적은 편이라며 설명을 보충했다. 누군가의 안전한 승하차를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는 시민의식. 그를 위해 노약자 승객의 탑승을 적극 돕는 운전기사와 묵묵히 그를 기다리는 다른 승객들까지. 똑바로 서 있지 않은 버스는 올곶았고 멋졌다.





경찰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흔한 일이라는 듯 내 말에 고개를 세게 끄덕이더니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선 내게 말했다.


“배려네요. 마음을 앗아간 건.”


나는 앉은자리에서 고개만 들어 경찰에게 눈짓으로 동의의 메시지를 보냈다. 경찰은 어느 매뉴얼에 적혀 있는 문장처럼, 이전과 똑같이 안내 멘트를 읊었다. “저희가 배려의 연락처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 중으로 도둑맞으신 것의 안부도 물을 겸 전화를 넣어보겠습니다. 집에 돌아가 계시면 사건 경위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목례를 하고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다행이네요. 정말 잊히지 않는 장면 중 하나였거든요.” 경찰은 웃었고 나는 사진 속 민트색 버스를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삐딱한 외형, 그러나 올곧은 코코로쯔카이(こころづかい; 마음 씀씀이). 다음번에 교토를 또 방문하게 된다면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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