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건 고국에서건 기차는 나의 발이 되어 주었다. 저가 항공보다도, 고속버스보다도 느리지만, 빠르게. 조용하지만, 꽤나 덜커덩거리면서,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놓았다. 옮겨 주었다. 기차를 탈 땐 가급적이면 창가 쪽 자리를 선점하려고 했다. 역사에서 구입한 음료를 한 모금 들이키고 바깥 풍경을 감상하기엔 아무래도 창가가 받침대 역할을 해주는 좌석이 편했다. 뒤통수 너머로 휙휙 사라지는 전봇대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나는 공간을 뚫고 달리고 있다고. 단단한 갑옷을 입은 탈 것 안에 숨어서, 나를 갖은 변화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그런 기차에게 나는 고마워해야 한다고.
사고가 나면 굉장히 크게 날 수 있는 교통수단인데도, 나는 기차 안에서 편안해졌다. 못할 일이 없다고 여겼다. 모자란 단잠을 보충하다가 내려야 하는 역에선 기가 막히게 정차 알림음을 듣고선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지하철에서 마저 읽지 못한 소설책을 펼쳐 들고 이야기 속으로 이중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열차 시간을 맞추려고 서두른 나머지 쫄쫄 굶었던 배를 채우기도 했다. 역사에서 판매하는 간편식이 주 메뉴였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질 않던가. 기차 안에서 먹는 건 뭐든 맛있었다.
교토 여행 중에 기차 또는 전철을 탈 일은 네 번 있었다. 두 번은 교토에서 우지로 근교 여행을 떠났을 때인데, 학창 시절 외대 앞 역에 내리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했던 경의중앙선 전철을 타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을 탄 줄 알았는데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우지 행 열차 안에서 나는 금세 평범한 도시 사람이 되었고, 급기야 몸과 마음에 익은 출퇴근길에서만 선보인다던 기술, 이른바 '강약중간약 해드뱅잉'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서 소개했던 기차 여행 대다수가 한 시간반 이상은 달리던 장거리 여행이었기에, '나의 편안한 기차여행'이라 부름 직한 기차 이용은 나머지 두 번의 기차 탑승 쪽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간사이/오사카 공항에서 교토역으로 이동하는 열차 하루카(はるか; 관광객들에겐 헬로 키티 열차로 알려진 바로 그 열차를 탔을 때였다.
교토역 지하철 개찰구에 이코카 교통카드를 찍고 일반 열차 탑승 승강장으로 나오자마자, 다영이와 나는 여행자라면 응당 할 법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코카 교통카드에 남은 잔액을 확인하고, 지갑 속 남은 현금을 손바닥 위에 올려 세어 보는 일이었다. 환전 후 누릴 수 있는 무료 게임을 시작하기 위한 일련의 준비운동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에만 참가 가능한 이 게임을 나는 비우기 게임이라 부르고 싶다.
룰은 간단하다. 최대한 지갑을 비우는 데 열심을 다할 것, 가급적이면 가장 적은 액수의 돈을 남길 것, 먼지 털어내듯 잔돈을 최대한 털어낼 때의 기쁨을 만끽할 것. 그리고 깨끗하게 비워진 지갑을 보면서 비워진 자리를 대신 채워준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것.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무엇을 채웠더라. 누군가를 위한 기념품? 오래오래 간직할 사진? 여행 도중의 재미난 에피소드? 마음의 안정 혹은 격동?
이 게임의 매력은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 않는 거다. 굳이 한쪽을 골라야 한다면, 승자만 있다고 해야 하려나? 잔돈 털이 게임으로 지갑은 비웠으나, 대신 돈이 아닌 무언가가 가득 들어차 있는 기분이 들었다면, 공항으로 돌아가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가 끊이질 않을 거다. 운 좋게도 그를 기록할 에너지가 남아있다면 비행기 탑승 중에 남아 있다면, 노트를 펼치고 빈 페이지에 여행의 이유와 기쁨에 관해 몇 자 정리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 비운만큼 채워진 게 없더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게 자리를 채워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을 뒤집어 보면 '다음번엔 이런 걸로 여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사항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쉬움은 다음 여행을 계획하게끔 하는 동력이 되어준다. 여행 한 번이 어렵지, N 번은 의외로 쉽다.
'시작해 볼까.' 한 손엔 1000엔 지폐 한 장과 동전 몇 개를 들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열심히 끌었다. 혹여 손에 쥔 동전이 떨어질세라 땀이 나도록 주먹을 꽉 쥐고 걸었다. 목표물은 단 하나였다. '편안한 기차여행'을 완성시켜 줄 에끼벤(駅弁 [えきべん]; 역사나 기차 내에서 파는 도시락)과 차가운 음료 한 병을 구매하는 것!
그런데 역사 내부를 요리조리 스캔하며 돌아다니던 그때,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의 기차 하나가 보이는 게 아닌가! 알록달록한 헬로 키티로 기차 외관을 치장한 모습, 우리가 타야 할 하루카였다. 하루카의 배차 간격은 30분이다. 그런 하루카를 한 번 놓친다는 건, 잠깐이나마 여름의 습한 공기를 견디며 승강장에 서 있어야 함을 뜻했다. 열차는 15분 있다가 출발할 예정이었다. 여유로운 게임이 졸지에 타임어택이 되었다.
다행히 하루카 승강장 근처에서 에끼벤 가판대를 발견했다. 동선은 훌륭한 상황, 이제 관건은 잔돈 예산에 꼭 맞으면서도 먹고 싶은 에끼벤 구입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에끼벤은 식당에서 먹는 일본 정식 부럽지 않게 화려했고, 실속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보기에 이뻐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선을 끄는 메뉴가 많다 보니 선택이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도시락 메뉴명에 교토가 들어가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도시락을 하나 골랐다. 먹고 싶었던 우나기동(장어덮밥)을 살까도 싶었지만, 가격 대비 반찬의 구성이 너무 빈약해 보였다. 장어 몇 점을 먹느니, 다양한 반찬에 찰밥을 먹는 게 나았다.
가판대 직원은 주문 접수와 동시에 곧바로 가게 쇼윈도 뒤편 냉장고에서 도시락을 꺼내주셨다. 시간 약속에 민감한 기차역에서 일하시는 분이라 그런가, 여행 내내 만났던 그 어떤 일본인보다도 움직임이 재빠르셨다. 도시락을 다 먹은 뒤 빈 통을 넣어 보관할 수 있는 비닐봉지는 별도 구매였는데, 있는 예산 탈탈 털어 쓰는 게임 중에 있던 나는 '아, 비니루부꾸로와다이죠부데쓰(ビニール袋は大丈夫です, 아, 봉투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백팩 안에 여분으로 넣어두었던 비닐봉지를 활용하기로 했다.
(여기서 잠깐, 여분의 비닐봉지를 백팩에 넣어 다니지 않는 여행자라면, 에끼벤 구입 시 비닐봉지까지 추가 결제하는 걸 추천하고 싶다. 맛있는 기차여행의 마지막 관문은 다름 아닌 깔끔한 뒷정리인데, 봉투 없이 잔반과 도시락 통을 열차 내 쓰레기통에 밀어 넣는 건 아무래도 다른 탑승객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쉬우니깐.)
지갑 속 현금을 털어낸 뒤, 나는 교통카드 잔액 털이를 위해 에끼벤 가판대 바로 앞에 위치한 자판기 앞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교통카드처럼 충전해서 활용하는 이코카 교통카드는 편의점과 자판기에서 체크카드로 쓸 수 있는 아이템으로, 교토 여행자에겐 필수템과도 같다. 카드 보증금(500엔)이 있어서 카드를 처음 구입하고 충전했을 땐, 충전한 만큼의 금액을 사용할 순 없지만, 원한다면 카드를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도 있다. 귀여운 오리너구리 캐릭터와 산뜻한 하늘색 디자인이 맘에 들었던 나는 보증금을 돌려받는 대신 카드를 기념품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코카 교통카드 잔액을 비우는 데 더 혈안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귀국 후에는 아마도 스크랩 북에 꽂혀 있을 카드가 될 테니, 기왕이면 다 비우고 가는 게 마음이 편했다. 자판기 단말기에 이코카를 접촉시키자 음료 및 선택 버튼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여행 내내 가까이 지낸 녹차 음료 말고 다른 것들을 사고 싶던 중, 눈에 들어오는 재스민 차 비슷한 걸 한 병 골랐다.
한 손엔 에끼벤, 다른 한 손엔 재스민 차를 올린 캐리어 하나. 이제 어느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하루카 승강장까지 잘 모시고 가면 되는 상황. 잰걸음으로 달려갔다. 간사이/오사카 공항으로 향하는 사람이 지, 열차 칸 하나 전체가 텅 비어있었다. '오. 그렇다면 당연히 창가 좌석에 앉아야지.'
타임어택 잔돈 털기 게임이 무사히 끝이 났다. 이겼다.
잔돈 털기 게임 도중에 하루카 출발 시간이 지났을까 맘 졸였던 탓일까. 에끼벤 포장지를 뜯고 나무젓가락을 두 짝으로 분리하는 내내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루카가 철로 위를 달리기 시작할 땐 양 볼 가득 도시락 반찬을 물고 있었다. 자리도 많은데 널찍하게 앉자며 나란히 창가 자리를 차지한 다영이와 나는 우물거리는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 도시락엔 꽃 모양 연근이 있어!" "오, 내 건 단풍잎 모양인데!" 하며 서로의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보여주기도 했다. 아마 초등학교 소풍 이후로 도시락 자랑은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괜히 반가웠다. 그런 소박한 대화가.
차창 밖은 교토의 풍경을 조금씩 눈앞에서 밀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사카의 도심으로 시야를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배부르다, ' 하고 속으로 세 번 외쳤을 즈음이었나? 기차가 멈춰 섰다. 짐을 챙겨 일어서면서 다시금 생각했다. '역시 공간을 뚫고 달렸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