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먹을 빵의 두께는 내가 정한다

교토, 일본

by 프로이데 전주현

입 안 가득 들어차는 쫀득한 식감부터 뒤이어 차오르는 포만감까지, 밀가루는 보기도 먹기도 좋은 종합선물세트다. 건강을 위해선 과도한 밀가루 섭취를 피하라곤 하지만, 스스로에게 면 씨 성을 붙이고 빵순이란 별명을 달아주는 입장으로서, 밀가루 없는 삶은 분명 그렇지 않은 삶보다 재미없고 맛없으리라. 여행 계획 단계 때부터 반겼던 소식 중 하나는 교토가 일본에서도 단위 면적 당 빵집이 가장 많이 있는 '밀가루 친화적인 도시'라는 점이었다. 때문에 조식이 유명한 료칸을 숙소로 잡지 않은 이상,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 서비스를 과감히 포기하고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빵집으로 외식 여행을 계획하길 적극 추천하고 싶다.


3박 4일의 여행 기간 동안, 다영이와 내겐 세 번의 아침 식사 기회가 있었다. 교토 특유의 아침밥상인 오반자이를 즐긴 첫 번째 아침식사를 제외하고선 (관련 '오반자이' 에세이 읽기), 나머지 두 번 모두 숙소 근처의 카페를 찾아 조식 세트를 주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방문했던 카페들 모두 한국 관광객들 사이에선 교토 3대 카페로 꼽히는 곳들로, 오픈런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대기줄에 이름을 올려둬야만 하는 핫플레이스들이었다. 언제부터 먹는 즐거움에 푹 빠져 오픈런이란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된 걸까.


내게 오전 11시 이전까지의 아침 시간은 지난밤의 잠 기운을 억지로 떨쳐내고 싶지 않은 반항심 같은 게 세게 작용하는 시간이다. 반 자취생활로 아침을 거르는 게 습관처럼 굳어져 있어서, 먹는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큰 시간대도 아니다. 하지만 밀가루 친화적인 도시 교토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본이 동경해 마지않는 유럽에서 제빵 기술 기본기를 다진 제빵사가 "좀 더 달고, 좀 더 폭신하게!" 하는 일본 빵의 주문을 거창하게 외웠다면? 90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서 아침 식사를 팔아왔다면? 아무래도 현지인들이 출근길에 오를 때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카페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방문한 카페의 이름은 스마트 커피(smart coffee)로, 덴쇼지마에초(天性寺前町) 일대의 아케이드 상점 거리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도 꽤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갈등을 겪었다. 펜케이크냐 프렌치토스트냐 하는 간단명료한 조식 세트 메뉴판을 잠깐 스캔하고선 더듬더듬 프렌치토스트 세트(커피 한 잔 포함 구성으로 가격은 1,300엔이다)를 주문하기까지. 브런치란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메뉴들 앞에선 자주 작아지는 습관이 한국에 이어 교토에서도 똑같이 작용했다. 프렌치토스트와 샐러드, 팬케이크, 오믈렛. 다 평소 집에서도 충분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간단식인데, 그걸 밖에서 웃돈 주고 사 먹으려니 괜히 사치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도 되나?' 하는 사이, 맞은편에 앉아 메뉴판을 살피는 다영이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교토에 왔다면 응당 먹어 봐야지, 하는 단호함. '이 친구가 먹을 것 앞에서 이렇게까지 결단력 있진 않았는데.' 놀라웠다. 평소 여행지에서 식도락을 즐기기보단 대충 먹고 볼거리를 찾아 돌아다니기 바쁜 다영이도 걸음 속도나 취향이 꼭 맞는 여행메이트(훗 누구겠는가?) 옆에선 맛있는 여행을 시도해 볼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어때, 막상 해보니 맛난 걸로 채우는 여행도 꽤 괜찮지?).


금박과 짙은 초록과 흰색으로 단정하게 치장한 커피잔이 먼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식탁보 위에 하얀 접시 두 개가 올라왔다. 별다른 사이드 없이 기본 메뉴인 프렌치토스트 두 쪽으로 가득 채워진 접시. 언뜻 보기엔 투박해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메인 메뉴에 대한 스마트 커피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구성이었다. 빵 두 쪽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기본에 충실하는 게 제일이라는 듯. 100년 가게를 몇 년 앞둔 카페의 프렌치토스트를 옆에 두고 아까 전부터 끄적이던 스마트 커피의 로고 낙서를 마무리했다. 인형놀이에 쓰일 법한 크기의 아기자기한 모양의 시럽통을 살포시 집어 들고 토스트 위에서 좌우로 과감하게 움직이는 춤을 췄다. 노릇노릇한 계란물과 우유를 입힌 빵 위로 윤택 나는 짙은 오렌지빛 소스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빵의 두께가 상당했다. 이 두께로 겉면을 태우지도 않고, 속도 익히면서, 이런 황금빛깔의 프렌치토스트를 조리했다니! 그전에, 이렇게 두꺼운 식빵 조각은 어떻게 구한 걸까? 특별 주문 제작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직접 매장에서 만든 걸까? 갸우뚱 거리며 포크와 나이프를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으니, 역시나 이번에도, 교토만 열한 번째인 다영이가 전문가로서 운을 뗐다. "여긴 식빵을 자르지 않고 통째로 파는 경우가 많아. 손으로 뜯어먹어도 충분히 부드럽고 맛있는 식빵들이 많기도 있고, 손님이 원하는 두께에 맞춰서 식빵을 잘라주는 게 최상의 식빵 판매라 생각하기 때문이야."


다영이의 설명에 독일과 벨기에서 학생 신분으로 지낼 때 자주 찾았던 빵집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곳에서도 빵은 통째로 가져가는 게 기본이었다. 실온에 오래 두었다간 돌덩이처럼 단단해지는 곡물빵들을 거뜬히 잘라내는 톱니 모양의 빵 칼은 학생인 주부들의 주방 필수템이었다. 물론, 원하는 손님들에 한해선 빵집에서 커팅 서비스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기계를 쓰는 곳이 많아 스마트 커피의 프렌치토스트처럼 과할 정도로 도톰하게 썬 식빵 조각을 얻어내는 건 어려웠다.


'타시카니(과연 그러하군)!'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중, 코난의 추리를 듣고 주변 등장인물이 멍하니 내놓을 법한 반응이 절로 나왔다. 빵 한쪽을 먹더라도 취향을 한껏 살려서 먹게 해 주다니, 정말이지, 교토는 빵순이/빵돌이 친화적인 도시였다.


내가 먹을 빵의 두께를 내가 직접 정하겠다는 생각. 조식 세트 앞에서만 떠올리기엔 꽤나 당차고, 뚝심 있고, 맛있는 삶의 태도다. 때아닌 카페 안 교훈을 바깥으로 몰래 가지고 나왔다. 나와 너의 일상 풍경 중에 조금씩 숨겨 놓기 위해서였다. 기왕이면 구석진 곳에, 정신없이 지내면서 멍해진 눈동자가 멈출 법한 곳에, 하나씩 하나씩. 자그마한 쪽지 하나도 함께 남겨놓는다.


당신의 입맛에 꼭 맞는 프렌치토스트 한쪽이 기다리고 있다.
정신 차리고 힘내라.
당신이 먹을 빵의 두께는 당신이 직접 정할 수 있다.










교토 카페 추천(조식 세트 제공)


스마트 커피: https://goo.gl/maps/ZhwEPfYR12nwa85a7


이노다 커피 본점: https://goo.gl/maps/3mrFBHe9w4jHNEt46


오가와 커피 교토 산조점: https://goo.gl/maps/3ArNqEWSChBUdwFeA

keyword
이전 08화향기, 회상관에 걸린 기억의 장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