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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하는 고백

교토, 일본

by 프로이데 전주현

교토는 종이와 친하다.


지하철 열차 칸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개봉 예정 영화를 홍보하라는 미션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이라면 아마도 열차 내 모니터에 영화 예고편을 재생하고, 승강장에 비치된 전광판에 포스터를 붙인 뒤 백열등으로 그를 뒤에서 비춰대면서 '여기 이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가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을 거다. 하지만 교토는 광고판에 종이 인쇄물을 끼워두고선 에어컨 바람에 나풀거리도록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 믿는 듯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팸플릿 가판대를 설치하고 영화 홍보물을 꽂아두기 했다. 원한다면 홍보물을 가져갈 수도 있었다.

일례로, 이번 교토 여행 중 교토 역에서 숙소로 이동한답시고 지하철을 탑승했을 때, 지하철에서 <인디아나 존스>의 마지막 시리즈 포스터가 휘잉- 소리를 내며 탑승객들 위에서 나풀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노장의 인디아나 존스가 혹 채찍을 잘못 휘두른다면 저런 힘없는 소리를 내며 휘청이지 않았을까. 종이 한 장으로 영화가 궁금해졌다.


어디 이뿐인가.



교토 골목골목 위치한 문구점마다 그림엽서와 편지지, 부채, 서예지 등 종이가 가득했다. 도대체 '이렇게나 많은 종이 공예품들이 다 팔리긴 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편지지와 엽서로 가득한 가판대가 좌우로 진열되어 복도를 이루고 있었다. '1일 1 문구점'을 외치며 여행 준비 단계에서부터 '일제 문구'에 관한 환상을 꾸준히 키워온 사람으로서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라 부를 법하지 않는가!


1663년에 개업해 같은 자리를 300년 넘도록 지키고 있는 문구점 큐쿄도(鳩居堂)와, 일본 국보와 중요 문화재를 130여 년 넘도록 특수 기술로 인쇄하는 그림엽서 전문점인 교토벤리도(京都便利堂 本店), 붓을 든 토끼가 반겨주는 향기로운 종이 공예점인 수잔도 하시모토 본점(嵩山堂はし本京都本店)을 방문하는 내내 가장 먼저 주시한 물건도 역시 종이였다.


일본 특유의 세로 쓰기를 반영한 줄 노트와 편지지들이 꽤나 이국적이었다. 병풍처럼 펼칠 수 있는 화집 노트는 한지와 다르게 미끌미끌한 촉감을 자랑했다. 잉크 한 방울 잘못 흘렸다간 꽤나 고생할 것 같았다. 오돌토돌한 교토 특유의 색종이를 손끝으로 만져보기도 했다. 과연 이런 색종이로 학 한 마리를 깔끔하게, 각이 살아 있게끔 접을 수 있을까.


'이렇게 훌륭한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생각에 굴복하고선 물건 몇 개를 손에 들고 계산대로 갔다. '프레젠또 데스까(プレゼントですか; 선물입니까)?' 하고 물으시더니 물건 하나하나 정성스레 포장해 주시는 일본 분들. 그분들의 오차 없는 포장 손놀림이 꼭 한 편의 공연 같았다. 커튼콜에 박수를 보내듯, "아리가또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감사합니다)"하면서 물건을 건네받았다. 종이 몇 장만으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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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쿄도, 교토벤리도, 수잔도 하시모토 본점의 입구 풍경




이 모든 게 누군가에겐 소박한 문구 쇼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이 일련의 마음과 행동은 하나의 과정이다. 위대한 움직임이다. 내게 여행지에서 (그것도 오랜 문구점이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교토에서) 편지지나 엽서를 산다는 건, 한 때 나무였던 어떤 대상 위에 여행자의 시간과 마음을 새기는 고백과 같기 때문이다. 종이에 적은 글은 어린아이의 그림일기처럼 손으로 한 번 쓱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색이 묻어 나온다. 진심이란 이름의 색이다.


오랫동안 종이를 만들고, 가꾸고, 진열대에 정렬해 손님들에게 판매하는 것. 때마침 그 종이의 진가를 알아본 누군가가 지갑 문을 연다. 그 누군가는 수많은 골목 중에 종이가 있는 골목 가게에 들어왔고, 수많은 물건 중에 종이에 이끌린 사람이다. 물건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과 물건을 사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그 누군가는 선뜻 돈을 주고서 종이를 사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계산대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이 있다.


종이를 만든 이 종이를 사가는 이에게 감사를 표하며 종이 위에 또 다른 종이를 덧대는 작업(포장)을 한다. '오마치쿠다사이(待まちくださ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하며 다정히 인사하는 직원에게 그 누군가가 웃음으로 화답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계산대 너머로 종이를 전달받고선, 혹여나 구겨질까 비닐봉지 째로 백팩 가장 구석진 자리에 조심히 넣는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종이를 애지중지 보관한다. 그 누군가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 종이를 (기왕이면 메시지를 가득 메워서) 선물하기로 한다. 적재적소에, 받는 이를 생각하며 편지를 쓴다. 편지의 수신인들은 종이를 뜯거나 펼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누군가의 메시지를 찬찬히 읽는다. 매너 없게도 받자마자 자기 앞에서 속독을 시작하는 수신인을 보고선 "집에 가서 읽어" 하면서 쑥스럽게 고개를 돌린다.


이 일련의 과정이 느린 고백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교토는 고백과 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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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토에서 사온 종이 공예품들 중 쓰지 않은 것들. 나의 고백은 그러니깐 아직 진행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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