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일본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삼삼오오 모여계신 곳에서 나는 늘 주인공이었다. 가리는 것 없이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식성 덕분이었다. 어린아이가 처음 맛보는 것도 곧잘 입으로 가져가 꿀꺽 삼키고 "맛있다!"라고 감탄까지 하니, 어르신들 입장에선 신기한 쇼를 보는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일종의 먹방과도 같았으려나). 주름진 손들이 "어이구, 우리 강아지 잘 먹네!" 하며 나를 토닥이면 별도의 운동 없이도 소화가 절로 되는 것 같았다. 주인공 역할을 꽤 즐겼단 뜻이다.
'떡보'란 별명을 얻은 것도 비슷한 상황에서였다. 떡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던 떡은 어르신들께서 "요즘 애들이 이런 걸 좋아하려나?" 하면서 건네주셨던 절편이었다. 반듯하게 잘린 네모난 절편 조각들은 누군가 법으로 정해 놓기라도 한 듯 매번 콩고물이나 팥, 견과류 등의 군더더기 없이 청아한 모습을 하고서, 그릇 위에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한쪽엔 쑥떡, 바로 옆엔 하얀 오리지널 절편으로 편성된 2열 종대 구성이었다. 폭신하고 쫀득한 식감이 밀도 있게 입안을 가득 메우는 것으로도 충분히 즐거운데, 떡의 넓적한 부분에 기왓장 끄트머리에서 봤을 법한 문양을 올록볼록 새겨 넣기까지 했으니, 맛은 물론 멋까지 갖춘 디저트란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지금도 절편 앞에선 교양을 잠시 내려두고 달려들곤 한다).
교토 여행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웬 절편예찬론이냐고? 기다려 보시라.
숙소에서 도보로 약 5-8분 거리에는 1,3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교토의 식탁'인 '니시키 시장(錦市場)'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지 문화를 파악하는데 먹거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당장 당신의 일상만 보더라도 그러지 않은가?) 떠올려 본다면, 지나칠 수가 없는 곳이었다. 방문할 마음이 없었더라도 워낙 길게 늘어서 있는 시장이라 나도 모르게 구경하고 있을 법한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영업시간이 상당히 제한적인 교토의 카페와 식당들을 떠올린다면, 하루를 48시간처럼 길게 사용하고 싶은 뚜벅이 여행가에겐 참 고마운 곳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가게 문을 열고, 활기찬 분위기를 조성하며, 맛있는 음식과 재미난 볼거리를 마구 전시해 둔 덕에 이국적인 느낌을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행 책자에서 소개한 것처럼 '교야사이(京野菜; 직역하면 교토의 채소라는 뜻)'로 보이는 교토 전통의 절임 반찬, 채소 반찬이 많이 보였다. 한국 일부에선 '타세권'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추억의 길거리 음식으로 칭송받는 문어빵, 타코야끼(たこ焼き)가게도 교토에선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천장을 덮은 알록달록한 지붕 아래로 정사각형 모양의 형형색색 그림들이 걸려있었는데, 여름을 준비하는 건지, 7월의 마쯔리(まつり; 축제)를 염두에 둔 건지 모를 개구리와 강아지, 잉어 그림 등이 보였다. 고개를 들고 걷기만 해도 구경할 게 많았다.
좌측통행이라는 규칙이 시장 내부에서 만큼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도 많았고 여름의 호흡(윽)도 꽤나 지독하니, 시장 파사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계속해서 앞으로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 코를 찌르는 맛있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눈을 굴리고, 함께 걷는 다영이와 수다도 떨고. 멀티플레이어가 따로 없었다.
그 와중에 보았다. 절편을 사랑해 온 떡보가 궁금해했던 일본 간식, 당고(団子)를!
중고등학생 시절,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하던 나는 일본의 식문화 파트를 소개할 때마다 선생님께서 틀어주시던 일본 동요(푸드송)에 매료되었다. 단순한 멜로디 위에 얹어진 정직한 발성, 중독성이 강한 노래였다. 뮤직비디오도 매우 귀여웠기에 노래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히기도 어렵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 동요의 주인공이 바로 일본의 대표 길거리 간식이자 꼬치 음식인 '당고(団子:だんご)'다. 동요의 제목은 '당고 삼 형제(団子3兄弟; 당고상 쿄-다이)'이고.
'하얀 절편을 찰흙놀이하듯 만지작 거려 공으로 빚었다면 당고가 되지 않았을까.' 뮤직비디오 속 당고는 떡보의 궁금증을 마구마구 자아냈다. 꼬치에 줄지어 꽂혀 있는 하얀 덩어리 세 개. 각 덩어리가 두 눈을 꿈뻑이며 상하좌우를 살피는데, 그때마다 덩어리 위를 장식한 짙은 오렌지 빛깔의 액체도 함께 움직이는 게 재미를 더한다 (아마도 당고 위에 뿌리는 소스인가 보다). 절도 있게 고개를 돌리는 탱고 댄서들처럼, 꼬치 위 세 덩어리가 "따-단!" 하는 박자에 맞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그런데 니시키 시장에서 만난 당고는 삼 형제가 아닌 사형제였다. '그새 막내가 생긴 걸까?' 하는 농담을 하기에 앞서 당고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도 모자라 소리까지 질렀다. "당고상 쿄-다이!!!" 나는 단호한 눈빛을 다영이에게 건넸다. '토모다치(ともだち; 친구)여, 나는 사진을 찍을 테니, 나보다 일본어를 훨씬 더 잘하는 네가 주문을 해 다오.' 막 환전한 엔화 지폐를 쪼개는 다영이의 모습을 뒤로하고 가게 안쪽에 위치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이었더라면 아마도 컵볶이나 어묵 꼬치를 먹고 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으려나. 엄마 몰래 군것질을 사 먹던 하굣길 문구점의 구석에 자리를 잡은 기분이 들었다.
다영이가 픽업대에서 받아온 당고 '사'형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메마시테(はじめまして; 처음 뵙겠습니다).' 언제부터 넷째 막내를 달고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편을 닮은 덩어리를 하나씩 입 안으로 집어 당겼다. 동요 속 탱고 춤을 기억하며 절도 있게 하나씩! 일본 음식은 의외로 너무 짜고 달다던데, 당고에 뿌려진 소스는 적당했다. 억지로 끼워 맞춘 '단짠' 조합이라기보단 은은하게 스며드는 단짠이었다. 절편과는 다르게 밀도 있는 흰 떡이 볼 한쪽을 가득 메우는 게 재미있었다. 쌀과 밀을 섞어 만든 화과자 류에 속하는 당고는 삶거나 쪄서 반죽을 요리한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맛있다고 대충 씹다가 꿀떡 했다가는 목에 철썩 달라붙을 것 같으니 천천히 조금씩 짓이겨서 목구멍 뒤로 넘겨야겠다. 식사도 안전해야 하니깐.
오랫동안 뮤직비디오로만 듣고 보다가 드디어 맛을 보다니! 공부한 걸 직접 맛볼 수 있다니! 이게 뭐라고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당고로 끼니를 때우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살짝 심심한 뱃속에 즐거움을 선사한 후에 여행지를 힘차게 걸을 이에게는 이보다 더 괜찮은 간식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