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밖으로 나오자 섬나라의 공기가 얼굴을 강타했다. 윽. 여름의 호흡이다.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는 비행 거리였는데, 피부에 와닿는 계절감은 사뭇 달랐다. 훨씬 더 묵직했다. 땀을 흘릴 정도까진 아니고 약간의 수분감을 느끼는 정도의 습도. 다행히 나를 동요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함께 여행길에 나선 카메라 우먼 다영이는 상황이 좀 다른 듯했다. 성능 좋은 카메라에 뒤따라오기 마련인 (커다랗고 비싸고 고장 나기 쉬운) 렌즈와 (두께만 얇았지 세상 무거운) 노트북이 다영이의 두 어깨를 한껏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영이는 내가 한국에서 고이 챙겨 온 초미니 손풍기를 빌려가더니, 하루카 탑승 전까지 좀처럼 돌려주질 않았다. "그래, 이럴 땐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꼽는 사람(바로 나!)이 참는 거야!" 콘비니(편의점)에서 사 온 냉녹차를 벌컥 들이킬 최적의 타이밍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그런데 너무 벌컥벌컥 마신 건지 냉녹차가 벌써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S자 모양으로 길게 늘어선 줄이 많이 줄어들지도 않았는데. 사실 우리가 왜 티켓 발권을 위해 긴 줄을 서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생각하고 있기에, 대기시간이 더 더디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탑승하고픈 열차의 티켓을 이메일로 전달받았고, 티켓의 큐알코드와 프린트 버전 모두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다려야 했다.
에?
정황은 이러했다.
오사카/간사이 공항의 무난한 입국 심사를 마치고서 캐리어를 끌고 나와 오사카와 교토 시내로 이동할 때 이용하는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 중에는 흔히 '헬로 키티 열차'라고 부르는 '하루카(HARUKA) 열차'가 있다. 자타공인 파워 제이(J)인 다영이와 내가 이번 교토 여행에서 가장 먼저 이용했던 '일본의 탈 것'도 바로 이 하루카였다. 기차표 가격은 정찰제일 텐데도 하루카 티켓은 인터넷에서 미리 예매하는 편이 현장 발권보다 저렴하다고 여행객들 사이에서 익히 소문이 나 있었다. 여행 한 달 전부터 구글 드라이브의 스프레드시트를 공유하면서 '최적의 자유 여행 동선'을 고민하던 파워 제이(J) 두 명도 "역시나" 그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고, 입국일과 출국일의 하루카 열차 티켓을 인터넷으로 미리 구매해 두었다.
문제는 일본에선 큐알코드와 E-바우처만으로 기차를 탑승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사전 예매를 했더라도 기차 탑승을 위해선 개찰구를 통과할 때 실물 티켓을 제시해야 했고, 그를 위해선 발권기에다 큐알코드를 찍는 것도 모자라 여권 스캔까지 해야만 했다 (아노... 토테모 아날로그 데스네. 코레... 이중 티켓팅 아닙니까?). 하하. 그러니 냉녹차를 들이켤 수밖에.
다행인 건, 우리에겐 또 다른 카드가 있었단 거다. 모든 불편 사항들이 용서되는 카드, 바로 여행 첫날의 설렘이란 카드였다. 그 카드 덕에 대기줄에 있는 내내 역사 주변의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읽으며 수능 일본어 1등급 시절을 떠올렸고, 비가 내릴 거라던 일기예보가 빗나갔다는 사실에 "너 정말 하레 온나(はれ‐おんな; 날씨 요정)구나?!" 하면서 기쁨의 춤을 출 수도 있었으며, 오랜 대기 끝에 수령한 하루카 티켓을 개찰구에 통과시키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내내 콧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뽀얀 얼굴에 붉은 리본, 누가 봐도 고양이인데 제작사(?) 측에선 소녀라고 우기는 캐릭터가 기모노 차림을 하고서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티켓 발권부터 기차 탑승까지, 꽤나 "일본스럽다." (과연 이 "일본스럽다"라는 표현의 정의가 여행 전과 후로 어떻게 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