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스타즈 제2회 양말 백일장
지난 2024년 11월 6일, 삭스타즈의 스물네 번째 뉴스레터에 제 짧은 글이 소개되었습니다. 제2회 양말 백일장의 결과 발표의 일환이었는데요(원문 읽기), 그때 우수상 상품으로 받은 소소문구의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 것도 벌써 6개월 전 이야기가 되었네요. 시간 참 빠릅니다.
그간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를 브런치북으로 엮어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저런 글을 연습하며 지냈습니다(가을에 펴낼 두 권의 독립출판물을 완성할 계획입니다. 각종 공모전을 위한 글의 탑도 쌓아가야하고요.). 그러다 보니 브런치 글 발행에는 다소 소홀해졌더군요. 아무리 바쁠 때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초심을 잃은 건가 싶어 이렇게 6개월 전의 글을 가져오면서 다시 브런치에 얼굴을 내밉니다. 저 여기 있어요,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고 있어요, 하고요.
양말 백일장에 제출한 글은 연말에 적은 것이라 새해, 새 시간에 바라는 것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6월 말에 꺼내 보기엔 조금 어설플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기록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초심을 다지는데 이만한 공유도 없겠다 싶었어요.
계속해보겠습니다. 어제의 일기가 나를 구했듯이. 오늘도, 내일도, 계속 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요.
다행스럽게도 인간인 나는, 불행히도 유한의 상태로 무한을 꿈꾼다. 그리고 불안이란 이름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한두 번이 아니다. 자주 그런다. 구덩이, 덫, 함정, 그런 표현 말고, (구수하게도) ‘구렁텅이’라 적는 게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안은 어느 상상 속 털북숭이 괴물처럼 변덕스럽게 나를 덮치고, 가끔 봐도 익숙한 할머니의 흰머리처럼 고집이 세고, ‘지금쯤 돌아봐도 좋지 않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는 오르페우스처럼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잠깐이나마 불안해하지 않을 순 있다. 하지만 불안이 없는 채로 살 순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다행스럽게도 인간이고, 불행히도 인간이라는 유한의 상태에서 무한, 영원한 무언가를 꿈꾸며 사니까. 그러니 나는 하는 수 없이 불안과 동행해야 한다.
수고스러운 동행이다. 구렁텅이는 나를 넘어뜨린다. 기껏 챙겨 신은 양말에 흙이 묻고, 신발이 세게 벗겨지는 바람에 발뒤꿈치가 까진다. 부드러운 말보단 날카로운 말을 골라 내뱉기 쉬워지고, ‘왜 피하지 못했느냐?’면서 누군가를 탓하기 시작한다. 때에 따라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일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일 때도 있다.
나는 동요한다. 두 발 딛고 선 땅이 흔들리고 꺼진다면 무얼 믿고 살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한참을 그런다. 그러다 예상 밖의 행동을 한다. 기왕 구렁텅이에 빠진 거, 제대로 빠져보자고 마음먹는다. 나비다리를 하고 바닥에 털썩 앉아, 에코백에서 탈출 도구를 꺼낸다. 일기장이다.
스캐쥴러와 별도로 일기장을 갖고 다닌 지 10년이 되었다. 그 정도로 일기 쓰기는 이제 나와는 때려야 뗄 수 없는 활동이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엔 그렇게도 귀찮았는데, 지금은 일기장만 한 대나무 숲이 없다면서 주변 지인들에게 일기 쓰기의 효능을 알리고 다닌다. 방학 숙제로 쓰는 일기가 아닌 일기에는 어떤 내용을 담을 수 있냐고? 글씨를 흘려 썼다고 나무라거나, 의미심장한 내용을 썼다면서 부모님께 상담을 하자고 할 담임선생님도 없지 않은가? 뭐든 가능하다.
특히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땐, 고민할 새도 없이 종이가 빼곡히 채워진다. 무섭다, 억울하다, 익숙하다, 한심하다, 막막하다, 답답하다, 힘이 빠진다, 울고 싶다… 그만할 순 없을까? 어떻게 하면 될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지? … 처음엔 이렇게 시작한다. 그런데 털어놓을 대상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 대상이 묵묵히 나의 문장을 받아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문장이 전진한다. 변신한다. 힘이 실린다.
무서웠다면 무엇이 정확히 어떻게 무서웠는지, 그런 비슷한 경험을 이전에도 한 적이 있었는지, 없었다면 내가 어떤 부분에서 눈을 감거나 마음을 닫았는지 적어본다. 이때 중요한 건 정확히 적는 게 아니라, 솔직히 적는 거다. 이쁘게 적는 게 아니라, 솔직히 적는 거다. 어디 상세 보고서를 올릴 것도 아니고, 인증숏을 공유할 것도 아니질 않는가? 그저 나 자신 한 명을 관객으로 한 연극을 올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저런 장치를 실험해도 눈치 주는 이 한 명 없는 연극이다. 극적인 연출이 필요한 지점에선 과감히 느낌표를 세 개 이상 찍고,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순간에 관한 기록은 네임펜으로 바꿔 적거나 지난날 문구점에서 산 스티커 하나를 떼 붙인다.
이 연극에도 클라이맥스는 찾아온다. 내 나름대로 ‘일기의 구원’이라 부르는 지점이다. 대체로 일기의 후반부에 등장하며, 분위기는 차분한 편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데스노트 겸 채워나갔던 일기장이 나를 다독인 덕분이다. 아마도 일기장을 채우면서, 손을 움직이고, 일과를 되돌아보고, 그 일과 속의 나를 돌아보자, 나의 감정과 이성이 균형점을 찾은 모양이다.
일기장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구렁텅이는 온데간데없고 꺼져 있던 땅이 다시 원래대로 솟아오른 것도 모자라 아주 고르게 정비되어 있다. 마침표 근처에 적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감사하다’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그저 썼을 뿐인데 불안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하다니! 일기의 구원은 이처럼 스스럼없이, 불현듯, 나를 고른 땅에 데려다 놓는다.
오늘도 걷다가 구렁텅이에 빠진다. 한참을 삐죽대다가 앉아서 일기장을 꺼내 든다. 그 안에 마구 쓰다가 정갈히 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난다. 다행스럽게도, 불행히도, 유한과 무한을 넘나들면서, 쓰는 인간이 된다. 오늘만 해도 이 글을 썼으니, 다시 일어날 힘이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