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귀향 15화

15. 학창 시절

by 박루이


그래서 그가 찾은 곳이 봉천동에 있는 미술고등학교였다. 야간부가 있었고,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서 10시에 마쳤다. 성남에서 영등포를 오가는 36번 좌석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거의 통금시간이었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미술고등학교는 말 그대로 미술을 전공하는 학교였다. 대부분의 수업이 실기 위주의 미술 수업이었다. 그에겐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림이라고는 국민학교 시절 크레파스로 사생하던 게 전부였던 그였다. 같은 반 친구들은 대체적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우고 전공에 따라온 학교였다. 그는 조건에 맞춰 겨우 들어온 곳이라 모두가 낯설었다. 데생의 기초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일에 대한 그의 대처는 분명했다. 미친 듯이 그리는 것뿐이었다. 필사건 창조건 가릴 게 없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필력이 생길 때쯤에야 남들과 비슷한 과제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


같은 반에서 유독 친한 친구들이 생겼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했던가? 관심사나 좋아하는 분야가 같거나 취미가 같은 것이 친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와 친한 친구들은 학비를 버는 방법이 비슷한 경우였다. 대체적으로 직장에 들어가 월급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었다. 근호는 서울 YMCA에 다녔고, 성희는 책방, 상봉이는 시청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집이 먼 편이라 늦게까지 놀지는 못했지만, 밤새워 놀 때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그에게 친구라는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 준 시간이었다. 그들은 방학 때면 무전여행을 주로 다녔다. 출발하는 차비 정도만 가지고 가서 도착한 곳에서 여비를 벌어 여행을 다녔다. 농사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기차간에서는 인물화를 그려주고 여비를 벌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가장 많이 다닌 여행이 기차여행이었다. 경부선, 호남선, 경강선을 타고 종착역까지 갔다가 현지에서 여비를 벌어서 돌아오는 무전여행이었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때, 과학동아를 통해 우리나라에 행글라이더가 처음 소개되었다. 그는 그것을 만들어 타기로 마음먹었다. 어렵사리 재료비를 모은 다음, 도면을 보고 필요한 재료들을 구하러 다녔다. 천막에 쓰이는 옥스포드지와 알루미늄 파이프를 사고, 연결할 수 있는 부속품을 사들였다. 옥스포드지를 재단해서 만들어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엄마가 혼수품으로 해왔던 재봉틀을 꺼내서 엄마에게 재봉틀을 배웠다. 온 집안에 옥스포드지를 널어놓고 며칠에 걸쳐 행글라이더 날개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행글라이더를 자전거에 싣고 비행을 하러 나갔다. 성남비행장이 내려다 보이는 수정동 야산 중턱이 적당해 보였다. 행글라이더를 조립하고 경사진 들판 위에 서니 바람이 그를 날려버릴 듯 날개를 펄럭였다. 그는 행글라이더 조종간을 부여잡고 아래를 향해 힘껏 내달렸다. 행글라이더는 바람을 맞아 그를 싣고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제대로 중심이 잡히지 않은 행글라이더는 솟아오르자마자 곧장 내려 꽂히며 경사진 비탈에 그를 갖다 박아버렸다. 그는 얼굴과 팔과 무릎이 온통 까지고, 행글라이더는 박살이 나버렸다. 그의 처녀비행은 그렇게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로 다시 조립한 행글라이더를 가지고 남한산성으로, 경안으로, 여기저기 비행을 나갔지만, 과학동아에 실린 백준흠 씨처럼 멋지게 하늘을 날진 못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집에 와서 요양을 하고 계시던 외할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혼자 거동하는 것도 힘들어지자 충주에서의 살림을 정리하고 모란에 있는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외할머니는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엄마보다 더 정이 가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 늘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자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혈혈단신 월남했기 때문에 친가 쪽에는 친척이 하나도 없었고, 외가 쪽에서도 살을 부대끼며 사는 것은 외할머니가 유일했다. 그런 외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그는 상심이 너무 컸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손을 잡고 극장 구경을 다니던 일이나, 동네 어른들의 화투놀이판에서 용돈을 챙겨 주던 외할머니가 떠올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외할머니에게는 그가 위로 딸만 셋을 낳고 얻은 귀한 손주인지라 늘 우선순위에 있었다. 그를 발무등을 태우고, 휘파람을 가르쳐 주시던 일이나, 곶감을 벽장에 감추어 두고 남들 몰래 하나씩 꺼내 주시던 외할머니가 떠올라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남들은 호랑이할머니라고 무서워했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천사 같은 존재였다.


원래 그의 외할머니는 충주 시내에서 알아주는 유지였다. 젊은 새댁시절부터 장사를 시작해 집안을 일으키고, 많은 땅을 사들여 대지주 부럽지 않은 살림을 꾸렸었다. 그러나 그녀의 외동아들이 6.25 동란 때 학병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전 재산을 팔아 아들 찾는데 쓰고 말았다. 다행히 아들의 이름을 찾아 국립묘지에 올렸지만 그녀의 집안은 몰락하고 말았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서울에 살던 그녀의 막내딸이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막내딸을 살리겠다고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다니며 노력했지만, 하늘도 무심하게 그녀는 눈을 감고 말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의 외할머니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막내딸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의 온 가족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매일같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새벽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다녀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그의 아버지의 새로운 교육지침이 내려왔다. 미술공부는 장래가 촉망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그림 실력이 일천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미술학교를 중퇴하고 성남에 처음 설립된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기능사 자격증을 따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고, 보수도 괜찮은 직장인이 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조건이 너무 좋았다. 합격만 하면 모든 비용이 국비였다. 기숙사에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모든 비용이 국비로 처리됐다. 중공업이 한창 발전하던 우리나라에 턱없이 부족한 기능공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훈련교육법 덕분이었다.


1기 때는 1년 코스로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일본 히타찌에서 직접 설치한 최신식 기계 설비에, 최고의 교수진으로 구성된 시설이었다. 웬만큼 눈썰미만 있어도 기술을 익히기엔 충분했다. 기능이 우수하면 전국기능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수료를 하면 대부분 중공업을 하는 대기업으로 취업을 나갔다. 그는 방위산업체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방위산업체는 5년을 근무하면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업체였다. 직업훈련원을 수료하고 그는 20명의 동기들과 같이 인천 만수동에 있는 대우중공업에 입사했다.


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회사에 출근해서 그의 꿈 많은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직업훈련원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군대식 생활패턴이었다. 다만 퇴근 후에 생활이 자유로울 뿐이었다. 그는 인천 자유공원 바로 밑에 있는 일본식 양옥집에 하숙을 얻었다. 그 주변이 대부분 그런 일본식 주택이었다. 오래된 집이라 낡긴 했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주인 노모마저 일본 사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진짜 일본 사람인지도 몰랐다.


회사에서의 업무는 하루 종일 청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넓은 공장 바닥을 돌아다니며 쇳조각을 줍거나 자재를 정리하는 것이 일이었다. 기계 곁에는 얼씬하지도 못했다. 이미 기계를 맡고 있는 선임들 눈치를 보면서 간혹 기계를 기웃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훈련원을 수료하고 대기업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큰 꿈을 안고 들어온 회사였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무엇보다도 낮은 임금이 그들을 불안하게 했다. 일반 기업에 취업한 다른 동기들에 비해 임금 격차가 너무 심했다. 그것도 5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래를 더 암울하게 했다. 군대를 면제받는다는 것이 위안이 될 줄 알았지만, 다들 미래가 불투명한 생활에 불안해했다. 같이 들어온 동기들 중에 탭댄스를 잘 추는 녀석 하나만 남기고, 모두 회사를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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