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준식 Jul 18. 2023

우리가 전주로 간 이유(1)

[MyBizStory(9)] with 'Orot Company' 7편

[관련 글]

       [MyBizStory(4)] with 'Orot Company' 3편: DIT 이야기를 시작하다

        https://brunch.co.kr/@ventureman/51


       [MyBizStory(5)] with 'Orot Company' 4편: DIT! 참 좋은데 이야기 풀어가기 애매하네

        https://brunch.co.kr/@ventureman/52


       [MyBizStory(6)] with 'Orot Company' 5편: 자연스럽게 시작한 리빙랩, 운명적으로 시작한 DIT

        https://brunch.co.kr/@ventureman/54


       [MyBizStory(7)] with 'Orot Company' 6편: DIT로 시작해 시민이 주도하는 혁신으로 이어지길

        https://brunch.co.kr/@ventureman/55


오늘과 내일 양일간 전주에 간다. 전주와 진한 인연을 쌓게 된 지 지난 주로 딱 1년이 되었다. 


지난 1년 사이 전주를 많이 들렀다. 한동안 제주를 많이 드나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제주 일정은 가성비 좋은 항공권-여정-렌터카-숙소 4가지 준비가 잘 되어야 의미있다. 무조건 가격에만 맞추면 가는 날과 오는 날 일정이 사라지기에 자칫 시간의 손해가 이루어진다. 


전주는 육로로 연결되다보니 교통편 면에서 훨씬 편리하다. 적절한 인구규모로 인해 도시의 문화적 기능도 대도시에 뒤떨어지지 않고, 관광도시로도 자리매김해 여행자에 대한 편의성, 다양하고 저렴한 숙소 등 체류하기 좋은 도시다. 그래서 호감도가 많이 높아졌고, 올해엔 꽤 많이 드나들게 되어 월 2~3회 전주를 오갔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이 전주의 관계인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아직 털어놓기 애매하지만, 전주를 거점화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서 전주에서의 만남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겼는데, 그게 지금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마이비즈스토리를 계속 연재해나가다 보면 왜 전주를 거점으로 삼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때가 올 거다. 열심히 연재를 따라와 주시라는...)


전주가 나의 또 다른 활동무대가 된 것은 전주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이다. '로컬'이라는 키워드가 난무하는 현 상황 속에서 보다 깊은 탐구를 위해 로컬과 로컬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플레이어들을 찾아나섰는데, 전주의 플레이어들은 로컬리스트와 로컬크리에이터가 합체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만남 자체에서 접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여기까지는 나의 사연이고, <오롯컴퍼니> 입장에서는 로컬을 향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유는 새로운 비즈니스 아이템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생산시절이 필요해서다. 수도권 인프라 속에서는 적절한 공간확보와 지원여건을 마련할 수 없었다.


앞서 DIT에 대한 이야기만 했던 터라 <오롯컴퍼니>가 하는 일이 건축 시공이나 커뮤니티 디자인에 국한되는 것으로 여겼을 수 있다. 실은 이보다는 더 복잡한 여러가지 사연과 사정이 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오롯컴퍼니>와 관계된 인물 중에서도 정작 <오롯컴퍼니>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비전을 향해 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조금 이상한 회사, 돈 못버는 기업, 일부러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한다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런 문제로 이종건 대표와는 많은 논쟁(실제로는 말다툼)을 했다. 비즈니스 행위가 어렵게 설명되는 건 돈 버는 것도 힘들지만, 브랜딩하기도 어려워서다.


오롯컴퍼니 시즌-1 시절의 크루들


쉽게 설명하자면, <오롯컴퍼니>의 태동은 시민활동가(이종건 대표)가 지속가능한 활동을 하기 위해 기업의 형태로 가기로 마음 먹으며 시작했다. 활동을 지속하고 싶은 동료들을 초기 크루로 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처음에는 상도동 마을에 필요한 일을 찾으려다보니 커뮤니티 활동을 전개해야 했고, 커뮤니티 활동을 하려다보니 주민들과 함께 모일 모임공간이 필요했다. 


공유공간을 조성해 여기가 거점화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주차장 공간을 빌리게 되었고, 공간을 꾸밀 돈이 없다보니 직접 공사를 했다. 마침 어느 언론사에서 지역의 창업가들을 인터뷰할 일이 생겼고 인터뷰이를 섭외하는 일을 '용역'의 형태로 받게 되었는데, 당시 받았던 수십만 원 정도의 공간대관료를 이용해 확보한 공간을 예쁘게 꾸미고 인터뷰 장소로 활용하게 된다. 소액이지만 아주 요긴한 돈이었고, 시간차 공격(?)을 잘 한 덕에 적절한 공간조성과 공간활용으로 이어졌다.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 공간이 공개되면서, 공간디자인을 눈여겨 본 한 지역 창업자의 의뢰로 공간조성 용역을 수주하게 된다.(우연히 알게 되었는데도 아이러니하게도 이때의 창업자분은 현재 나와 협업하고 있는 분이다. 인연의 고리는 돌고돌고돌아 이렇게 연결되기도 한다. 이후 <오롯컴퍼니>의 과거 사진을 다시 살펴보니 현재 협업하고 있는 분의 뒤통수가 선명히 보이더라는...) 이게 처음으로 의뢰받은 인테리어 공사 의뢰였는데 이를 시작으로 연속으로 몇 건의 인테리어 의뢰를 수행하게 되었고, 인연이 이어지며 강동구 암사동으로 이전하는 일로 이어졌다.


암사동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지하공간을 무대로 하게 되었다. 


활동가들이 모이다 보니 지역의 현안에 시선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서울 강동구는 서울시에서 청년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40세 이하의 인구가 30%에 달하고 있고, 청년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소득수준이 낮은 청년 입장에서는 아무리 변두리라고는 하지만 강동구의 주거임대료도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다들 다세대 주택의 원룸 수준에서 살다보니 먹고 자고 씻는 단순한 주거기능 이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한동안 청년층 사이에서 확산되던 '살롱문화'는 공유공간에 대한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도시 속 유휴공간으로 나타난 옥탑, 반지하, 지하창고를 타겟으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거다. 앞서 이야기했던 '옥.반.지. 프로젝트' 이야기가 다시 등장했지만, 어쩔 수 없다. <오롯컴퍼니>를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의 리바이벌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다. 그리고 이런 공간을 청년들이 스스로 만들고, 유지보수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DIY 함께만들기'를 통해 DIT가 시작되었던 거다.


<오롯컴퍼니>가 등장한 EBS 다큐의 한 장면. 옥반지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
옥반지 프로젝트로 탄생한 오로시하우스


이런 활동과 맞물려 사회적기업으로서의 발걸음도 더욱 바빠졌다. 사회적기업을 목표로 설립했지만, 정식 사회적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예비 사회적기업 단계를 밟고,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는 길을 향해야 했다. 현실과 이상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매출을 발생시키고, 고용을 창출해내야만 한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2가지를 창출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오롯컴퍼니>는 취약계층 고용창출을 목표로 하는 사회적기업이 아니라 좀 더 어려웠다.('기타형'에 해당하는데, 이 이야기는 또 다른 기회에...)


그런데 '옥.반.지. 프로젝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과다한 언론노출이 이루어지면서 기쁨과 괴로움, 희비의 쌍곡선이 마주하는 지점에 자주 처하게 되었다. 회사가 알려진다는 점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이미지가 고착된다는 점은 위협적인 일이었다. 언론노출을 두고 일부에서는 '도시재생 아이돌'이라고 웃기도 울기도 애매한 표현으로 <오롯컴퍼니>를 표현하기도 했다. 나도 내부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이종건 대표와의 첫 만남에서 그의 얼굴을 보고 '유병재와 류승룡을 섞어 닮은' 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으니...


여튼 이런 딜레마 속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며 팬데믹 상황이 벌어졌고, 집합금지로 인해 DIT 프로그램을 비롯한 교육 프로그램이 무기한 중단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팬데믹 이전만 해도 위탁 운영 건 등 밝은 미래를 전망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모두 백지가 된 것이다. 이 와중에도 팀원들을 독려하며 할 수 있는 일들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나무젓가락 재생'이었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나무젓가락을 회수하여 합판으로 재생하고 건축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구상이었다.


손가락 품을 판 덕분에 해외 선행사례를 찾을 수 있었고, 고생 끝에 간단한 시제품을 제작했다.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기 위한 기초 자료도 만들어졌다. 기쁘고 신나고 새로웠다. 그러나 구상한 것을 현실화하려면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었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시제품을 내놔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생산설비와 공장이 필요했다. 대략 산출해 보았을 때, 최소 3억 원 정도의 장비를 들여놔야 시제품을 만들어 보기라도 할 수 있었다.


난감스러웠다. 상황은 급박스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눈을 돌려야만 할 때였다.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로컬을 탐색해야 했다.  (계속)


나무젓가락을 세척, 압축해 만든 우드블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