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콘텐츠다(3)
마을 콘텐츠를 발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원의 단계적 발전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컬의 진화』라는 책에서는 이를 '부존자원', '발굴자원', '창조자원'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부존자원(Existing Resources)
부존자원은 이미 마을에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 활용되지 않은 잠재적 자원들을 말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연자원: 동굴, 해변, 계곡 등 자연환경적 요소들입니다.
-사회문화자원: 폐광, 폐교, 폐양조장, 폐공장 등의 유휴공간과 지역의 역사, 전설, 인물 이야기 등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부존자원은 마을에 이미 있지만, 그 가치가 인식되지 않거나 활용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2. 발굴자원(Discovered Resources)
발굴자원은 부존자원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자원입니다. 부존자원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발견하고, 이를 지역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폐교를 단순한 버려진 건물이 아니라 문화공간이나 체험시설로 활용할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발굴자원화의 과정입니다. 또는 지역의 전설이나 이야기에서 현대적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이에 해당합니다.
3. 창조자원(Created Resources)
창조자원은 발굴자원에 창의성과 혁신을 더해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한 자원입니다. 단순히 자원을 발견하는 것을 넘어,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는 단계입니다.
폐교를 문화예술 공간으로 리모델링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또는 지역의 전설을 바탕으로 축제나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창조자원화의 예입니다.
이 세 가지 자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창조자원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의 새로운 부존자원이 되고, 이것이 다시 발굴되고 재창조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원의 진화 과정을 이해하면, 마을 콘텐츠를 어떻게 발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가능해집니다.
마을의 역사와 이야기가 어떻게 콘텐츠로 발전하는지 경상남도 진주의 '의암'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경상남도 진주 남강에 있는 '촉석루' 옆에는 '의암(義岩)'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는 원래 '위암(危岩)'이라고 불렸습니다. '위험한 바위'라는 뜻의 이 바위는 약 600년 전부터 이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져 왔습니다.
이 바위의 특징은 큰 바위 옆에 작은 바위가 거북이 머리처럼 튀어나와 있는 형태인데, 지역 주민들은 이 두 바위 사이의 틈이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벌어진다고 믿었습니다. 홍수나 가뭄, 전쟁 등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 이 틈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위험을 예측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험을 알려주는 바위'라는 의미로 '위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이 바위의 이름은 '의암(義岩)'으로 바뀌게 됩니다. 의기 논개가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 후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이 바위에서 투신해 순국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의로운 바위'라는 의미의 '의암'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을의 부존자원(바위)이 역사적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발굴자원으로 변화한 사례입니다. 논개의 이야기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기록되며 문화적 콘텐츠로 발전했습니다.
논개의 이야기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어우야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가 끝나고 그때 현감 사또의 애첩이었던 관기(기생)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일본 장수를 이 바위로 유인해 함께 투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어 논개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또였던 최경회의 문중 족보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고 하여, 논개는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 여부가 아니라, 이 이야기가 지역 정체성과 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입니다. 오늘날 이 의암은 단순한 바위가 아니라 진주 남강 유등축제의 중심이 되고, 이 바위 위에서 '의기논개' 뮤지컬이 공연되는 창조자원으로 발전했습니다.
진주 남강 유등축제도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바깥과 소통하기 위해 등을 강에 띄웠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은 국제적인 축제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마을의 역사와 이야기가 어떻게 현대적 콘텐츠로 재창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앞서 2장에서 언급한 경상도 고성의 돌부처 전설도 마을 콘텐츠가 어떻게 공동체의 규범과 가치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는 이 전설에 따르면, 점차 확장되던 두 마을이 농토 경계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한 스님이 와서 돌부처를 세워놓고 다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주민들이 돌부처를 옮기자 마을의 젊은 여성들이 미쳐버리는 일이 생겼고, 돌부처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자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전설은 단순한 미신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토지 분쟁을 막고 마을 간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이 전설의 형태로 전해진 것입니다. 전설 속에서 여성들이 피해자로 등장하는 것은 농토 분쟁이 식량 문제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다음 세대 출산과 양육에 영향을 미친다는 은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을 전설은 윤리적,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으며, 공동체의 평화와 지속가능성을 위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전설은 마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민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콘텐츠로 작용합니다.
마을 콘텐츠를 효과적으로 발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방법론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마을 콘텐츠 발굴을 위한 주요 방법론과 실천 전략입니다.
1. 자원 조사와 목록화
마을의 유형 자원(자연환경, 건축물, 문화재 등)과 무형 자원(역사, 이야기, 전통, 기술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합니다. 이렇게 발견된 자원을 목록화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합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의 구술 채록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마을 어르신들의 생애사를 인터뷰하거나, 전통 기술이나 음식 제작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한 마을의 옛 사진, 문서, 유물 등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입니다.
2. 주민 참여형 발굴 과정
마을 콘텐츠 발굴 과정에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합니다. 마을 회의, 워크숍, 포커스 그룹 등 다양한 형태의 참여 플랫폼을 제공하고, 세대 간 대화를 통해 노인 세대의 기억과 청년 세대의 창의성을 연결합니다.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의 자원을 함께 발굴하는 과정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마을 콘텐츠의 진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민들은 자신의 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갖게 됩니다.
3. 맥락화와 스토리텔링
발굴된 자원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단편적인 사실이나 자원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구성합니다. 이때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되, 원래의 가치와 의미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살펴본 진주 의암이나 고성 돌부처 전설의 사례처럼, 단순한 사실이나 이야기를 넘어 그것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와 연결하고, 미래로 이어가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4. 디지털 기술의 활용
구술 채록, 촬영, 3D 스캐닝 등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마을 콘텐츠를 기록하고, 온라인 아카이브, 가상 전시, 증강현실 등을 통해 접근성을 높입니다. 또한 소셜 미디어를 활용해 마을 콘텐츠를 널리 알립니다.
디지털 기술은 마을 콘텐츠의 보존과 확산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사라져가는 전통 공예 기술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이를 온라인 플랫폼에 공유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AR/VR 기술을 활용해 마을의 역사적 장소나 사건을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할 수도 있습니다.
5. 네트워킹과 협력
마을 내부의 다양한 주체들(주민, 전문가, 공무원, 학생 등) 간의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타 지역의 성공 사례를 연구하거나 경험을 공유합니다. 또한 공공기관, 대학, 기업 등 외부 자원과의 연계를 모색합니다.
마을 콘텐츠 발굴은 어느 한 주체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의 역할과 전문성을 발휘하며 협력할 때, 더 풍부하고 가치 있는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외부의 전문가나 기관과의 협력은 마을 콘텐츠에 새로운 시각과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마을 콘텐츠는 그 영향력과 범위에 따라 점(點), l선(線), 면(面)의 형태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는 작은 지점에서 시작된 콘텐츠가 어떻게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개념입니다.
1. 점(點)의 콘텐츠: 특정 장소 중심
점(點)의 콘텐츠는 마을 내 특정 장소나 시설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콘텐츠입니다. 예를 들어, 마을의 오래된 우물, 특별한 나무, 역사적 건물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런 장소들은 그 자체로 마을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주민들의 추억과 이야기가 담긴 공간이기도 합니다.
점 형태의 콘텐츠는 그 장소만의 고유한 특성과 이야기를 강조함으로써 차별화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런 콘텐츠는 단독으로 존재할 때보다 다른 콘텐츠들과 연결될 때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2. 선(線)의 콘텐츠: 경로와 연결성
선(線)의 콘텐츠는 여러 점(點)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경로나 흐름을 만드는 형태입니다. 마을 산책로, 역사문화 탐방로, 음식거리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런 선형 콘텐츠는 방문객들에게 더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선 형태의 콘텐츠는 흐름과 연속성을 강조하여, 단편적인 경험이 아닌 스토리텔링이 있는 여정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마을의 다양한 역사적 장소를 연결한 '역사 탐방로'는 방문객들에게 시간의 흐름에 따른 마을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3. 면(面)의 콘텐츠: 지역 전체로 확장
면(面)의 콘텐츠는 마을이나 지역 전체를 하나의 콘텐츠로 발전시키는 형태입니다. 지역 축제, 마을 브랜드, 지역 전체의 테마화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런 콘텐츠는 지역의 다양한 자원과 이야기를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통합합니다.
면 형태의 콘텐츠는 지역 전체의 정체성과 브랜드 가치를 강화하고, 다양한 경험을 한 공간에서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을 전체가 '생태마을' 또는 '예술마을'이라는 테마로 발전할 경우, 마을의 모든 요소(경관, 건축, 프로그램, 주민 활동 등)가 이 테마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일관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 선, 면의 전략은 마을 콘텐츠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고 확장하는 데 유용한 접근법입니다. 작은 점에서 시작하여 선으로 연결하고, 궁극적으로는 면으로 확장해나가는 단계적 접근이 가능합니다. 물론, 모든 마을이 같은 방식으로 발전할 필요는 없으며, 각 마을의 특성과 여건에 맞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을 콘텐츠의 발굴과 재창조는 지역의 고유한 자원과 이야기를 재발견하고, 이를 현대적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며, 체계적인 방법론을 통해 확장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한 관광 상품 개발이 아니라, 마을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