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장농 속.
지친 더위를 달래보고자 메로나 하나를 뜯는 순간, 주르륵하고 녹아버리는 2015년의 여름이었다. 경주와 포항에 사는 여사친들이 서울로 놀러 왔을 때였다. 또 어디 블로그에서 봤는지, 연남동이라는 곳이 서울에서 요즘 핫하다며 집에서 쉬고 있던 나를 데리고 갔다.
뜨문뜨문 작은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는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둘러보고, 그녀들이 좋아하는 독특하고 유니크한 상점에 들려 잠시나마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기도 하고, 더운 여름이지만 나베를 먹어보고 싶다며 들어간 작은 일식집에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처음 맛보는 나베에 푹 빠지기도 하며, 처음 마주하는 이 동네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더운 여름이라 돌아다니는 것도 지치고, 땀에 젖고, 목이 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들어갔다. 더위에 지쳐 어느새 말 수도 줄어든 우리는, 블로그에서 본 카페를 찾아 헤매다 실패하고 눈 앞에 보이는 자그마한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의 이름은 '장농 속'. 이 더운 열기를 식힐 수 있는 마치 작은 장롱 안에 만든 우리 만의 아지트 같았다.
어릴 적 들어가 놀던 장롱 속을 떠오르게 하는 그 가게는 옛 한옥을 개조해 만든 것 같았고, 상당히 앤틱 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장농 속'을 들어서자마자 '우와!'를 연발하며 연신 가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작은 가게의 벽면, 타일, 천정 등 그녀들은 모든 것을 눈과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다행히도 가게 안에는 우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들이 가게를 둘러보는 동안 사장님으로 보이시는 훤칠하고 젊은 남자분께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혼자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는 듯 보였으나, 우리가 들어오자 서둘러하던 일을 정리하고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메뉴판으로 들고 다가왔다.
"날씨가 많이 덥죠? 천천히 고르세요!"
친근한 말투, 그리고 해맑은 미소를 띠며 메뉴판을 가져다준 그는 우리가 메뉴를 고를 때까지 자신이 하던 일을 마저 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뭐가 그리 좋은 지 연신 '우와!', '예쁘다!',를 연발하는 그녀들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카메라와 휴대폰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단 메뉴판을 넘겨 메뉴로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고 그가 가져다준 메뉴판을 한 장씩 넘겨보았다. 메뉴판을 펼치자 맛있는 수제 피자 메뉴들이 눈에 들어왔다. 브런치로 먹기 좋을 것 같았지만, 이미 나베를 먹고 왔기에 다음 장으로 넘겼다. 다음 장에서는 수제 크로켓과 각종 사이드 메뉴가 준비되어 있었고, 다음 장에는 수제 맥주들이 종이 한 장 가득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그것이 마지막 페이지였고, 점점 닫혀가던 내 땀샘이 다시 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일단 나는 다시 한번 메뉴판을 살폈다. 꼼꼼하게 두 번을 더 살펴보았지만, 커피에 관련된 메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가게 이곳저곳을 찍고 있는 그녀들을 조용히 불러 자리에 앉혔다.
"있잖아, 여기 커피가.. 없어."
그녀들은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다시 한번 그녀들에게 지금 상황을 알려주었다.
"여기 맥주 파는 곳인가 봐. 마실 게 맥주뿐이야."
이미 우리는 가게에 들어왔고, 그녀들은 열심히 이곳저곳에 발도장과 사진을 찍었으며, 나가기에는 너무 민망하고, 어찌해야 할지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대낮에 가게 문을 열어 놓냐고!'
지금 우리가 유일하게 주문할 수 있는 건 콜라와 사이다. 아무리 대낮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수제 맥주집에서 콜라와 사이다만 주문해서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조심스레 사장님께 여쭤보기로 했다.
"저기, 사장님. 혹시 커피 메뉴나.. 맥주 말고는 음료 메뉴는 따로 없나요..?"
그 잠깐의 정적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내 머릿속에 그려진 계획은 마실 게 없다고 하면 일단 죄송하다고 한 뒤, 카페인 줄 알고 들어왔다고 말을 하면서 조심스레 짐을 챙겨 쭈뼛쭈뼛 문을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장님의 대답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네, 맥주 말고는 탄산음료 밖에 없는데. 카페인 줄 알고 들어오셨구나."라며 해맑게 웃으시더니, "아니면 생과일주스 한 잔 드실래요?"라고 우리에게 물어왔다.
내 기억 속의 메뉴판에는 생과일주스는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아, 메뉴판에는 생과일주스는 없던데.."라며 말을 흐리자, "생과일주스를 메뉴에 넣을 예정이었는데 괜찮으시면 시음 한 번 해주실래요?"라며 우리에게 생각지 못한 역 제안을 해왔다.
우리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지만, 사장님의 의외의 제안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살짝 당황스러워하던 그녀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와, 진짜요?"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했다.
"과일이 준비가 아직 안되어 있어서 자리를 잠시만 비워도 될까요? 그동안 가게 좀 잠시 봐주실래요? 아마 손님은 안 오실 거예요."
"네!!!"라며 우렁차게 대답한 그녀들의 모습에 사장님과 우리는 크게 웃어버렸다. 사장님은 신난 얼굴로 앞치마를 벗고 가게를 나설 채비를 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쉬고 계세요!"라며 에어컨 온도를 한껏 낮춰주시고는 쌩하고 가게를 나가버리셨다.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우리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너무나 즐겁고 신나게 느껴졌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일들을 겪는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장님은 우리가 처음 가게에 들어왔던 모습처럼 땀샘이 한껏 열려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과일을 한가득 사 오셨다. 괜스레 미안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카페인 줄 알고 잘못 들어온 손님을 위해, 없는 메뉴를 만들어주려고 가게를 맡기고 나가 식재료를 사 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이렇게나 더운 여름에.
"죄송해요, 좀 늦었죠? 금방 해드릴게요. 잠시만요."
오히려 우리에게 미안해하는 사장님은 곧바로 앞치마를 두르고 음료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괜찮아요! 저희가 더 죄송하죠. 천천히 해주셔도 돼요!"
음료를 만들기 시작한 사장님과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사장님과 우린 서로 고향이 같았고, 우리가 카페인 줄 알고 들어와 있는 이 '장농 속'이라는 수제 맥주집은 오픈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우연찮게 우리가 그 날 그 가게의 첫 손님이었다.
그는 신기한 인연이라며 연신 즐거움 가득한 모습이었고, 우리 또한 굉장히 즐거웠다. 타지에 놀러 와 고향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 첫 손님으로, 그것도 그 가게의 업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들어와서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시음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자, 한 번 드셔 보세요!"
그는 오렌지주스 한 잔, 자몽 주스 두 잔, 그리고 작은 접시에 싱싱한 오렌지와 자몽을 잘라 함께 내주었다.
그녀들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제일 먼저 카메라를 꺼내 들었고, 나는 그녀들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카메라를 내려놓는 순간 자몽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한 모금을 들이키자마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들어 준 주스는 내가 맛 본 자몽 주스 중에 가장 맛있는 주스였다. 함께 맛보라고 과일도 너무 달고 맛있었다. 자몽이 이렇게 맛있는 과일이었나 싶었다. 여담이지만 지금까지도 '장농 속'의 자몽 주스보다 맛있는 자몽 주스를 먹어본 적이 없다.
사장님은 싱글벙글 음료를 마시는 우리에게 "저도 같이 앉아도 될까요?"라며 맥주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
"그럼요!"
그는 우리의 대답과 동시에 의자에 앉으며, 생과일주스 세 잔과 맥주 한 잔으로 건배를 제안했다.
"짠! 반갑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괜찮으면 맥주도 한 잔 먹어보라고 권했고, 맥주 기계가 새 거라 아마 최상의 맛을 볼 수 있을 거라며 우리를 유혹했고, 우린 그 유혹에 넘어갔다.
대낮에 맥주라니.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고, 그는 우리에게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닌, 가게를 위한 테이스팅이라는 명목으로. 아주 객관적으로,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였다.
'당신이 그곳에 있었다면 어떠한 평가를 내렸을까?'
그 날, 그 순간 그가 우리에게 내어준 음식들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지아식 수제 피자, 그리고 정말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수제 맥주였다.
사장님은 잘 먹는 우리가 보기 좋았는지 사이드 메뉴의 크로켓도 준비해주었다. 신라 호텔에서 일하던 주방장님이 만드신 수제 크로켓이고, 수제라서 하루에 들여올 수 있는 양도 아주 적어 구하기가 힘든 크로켓이라고 했다. 귀한 크로켓이라 그런지 그 감동은 배로 다가왔고, 맛은 말할 것도 없이 환상 그 자체였다.
그 날, 우리는 여러 잔의 수제 맥주,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물론 중간중간 손님들이 다녀갔다.)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친해졌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한 가게의 사장과 손님이 아닌, 인간적인 면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혼자 일하는 그가 심심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교과서적인 서비스가 아닌 진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주었고, 그에게 받은 건 단지 공짜 음식이 아니었다. 더 큰 무언가를 우린 서로에게 얻었을 것이다.
친구들이 고향에 내려간 뒤에도 나는 그곳을 자주 찾았고, 그때마다 사장님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나는 가게 내부를 찍거나, 음식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음식 가격, 가게 운영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조언도 하는 친한 형, 동생 사이가 되었었다.
물론 지금은 각자의 생활에 치이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 연락 조차 잘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언제 한 번 형에게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잘 지내느냐고, 어떻게 지내느냐고.'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울컥했던 걸까.
아마 내 인생의 그 짧은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곳은 서울살이에 지친 나에게 아지트가 되어 준 작은 '장농 속'이었으니까.
* '장농 속'의 표준어는 '장롱 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