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집에서 장 보는 건 신세계
몇 주 전부터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게 귀찮게 느껴지고 있다.
매번 배달을 시키자니 금액이 부담되고.
밀키트를 사면 나오는 쓰레기가 어마어마하다.
가족들도 각자 입맛이 다르기 때문에
이제는 그 입맛을 충족시킬 레시피가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장을 보려고 인터넷 창을 열어도 뭘 사야 할지 몰라 금세 창을 닫는다.
나에게도 요리 슬럼프가 온 것일까.
내 입맛에 딱 맞는 요리가 다른 식구들에게는
좀 짜기도 하고, 싱겁기도 하고, 고기가 너무 많은 찌개일 수도 있어서
음식을 만들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지도 벌서 10년이다.
어제 냉장고 안 야채칸을 열어보니 남은 재료들이 몇 개 보였다.
쥐포 3장, 건새우 한 웅큼, 버섯 4개, 양파 반 개.
배달을 시킬까 라면을 먹을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
일단 야채 칸의 재료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앞치마를 둘러맸다.
쥐포를 가위로 잘라 간장,설탕,마늘,올리브유를 넣어 쥐포볶음을,
대파 기름을 내 건새우를 볶다 소금,마늘,설탕을 넣어 건새우볶음을,
양파를 볶다가 버섯을 넣고 숨이 죽으면 마늘,소금,설탕을 넣어 버섯볶음을.
묵은지를 물에 헹궈 들기름,설탕,마늘,고춧가루,매실을 넣어 묵은지무침을.
만든 요리를 반찬통에 넣어보니 딱 두 끼 먹을 양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 점심과 가족들의 저녁이면 끝이다.
그래도 이렇게 남은 재료를 후딱 해치우고 나니 야채칸이 드디어 텅 비었다.
일주일 동안 얼마나 그곳을 째려보고만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식탁에 흰쌀밥과 갓 만든 반찬들을 그릇에 하나씩 담았다.
국 대신 동치미를 한 국자 뜨고 김도 잘라서 옆에 놓았다.
내 입맛에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인데,
나 혼자 먹으면 정말 훌륭한 반찬들인데
10년 동안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알게 모르게 지쳤었나보다.
늦은 저녁, 인터넷 창을 열어 장 보기를 다시 시도했다.
평소라면 습관적으로 '자주 구매' 버튼을 눌렀겠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사보지 않은 것,
사 보고 싶었으나 조리법을 몰라 망설였던 것,
나만 좋아해서 굳이 안 해먹었던 밀키트 등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오늘 오후에 도착하는 재료들이 아직까진 반갑지 않지만
그래도 몇 주간 지속됐던 요리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