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회사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덕분에 평일 낮에도 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금요일 오전, 시골에 계신 어머님께 보내드릴 물건들을 챙겨 가장 가까운 우체국으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정오에 가까운 시간. 해는 머리 위로 높이 떠 있었고, 아스팔트 위엔 열기가 가득했다.
걸어서 25분 거리. 짐을 손에 들고 가기엔 무리고, 버스를 타자니 정류장까지 걷는 것도 번거로웠다. 결국 전기자전거를 빌려 타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실수였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 택배 상자를 올려놓고 페달을 밟는데, 웬일인지 잘 나가지 않았다. 분명 전기자전거인데 왜 이러지? 순간, 짐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 모터 레벨을 조절하고 다시 힘껏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땀이 삐질삐질 흐르기 시작했다.
오르막, 내리막을 오가며 겨우 우체국에 도착했는데…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은행처럼 교대로 식사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체국은 점심시간에 아예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땀은 흘러내리고, 공유자전거는 반납할 곳이 없어 근처를 몇 바퀴나 돌았다. 짜증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그런데 우체국 앞 ATM 부스 안에 에어컨이 나오는 작은 공간이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의자도 두 개나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창구가 다시 열리려면 아직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부스 안에는 이미 한 할머님이 먼저 와 앉아 계셨다. 좁은 공간에 둘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할머님은 인근 단독주택에서 오셨다고 했다. 그 동네는 비교적 부촌으로 알려져 있어서 순간 ‘할머님, 부자시구나.’ 속으로 생각했지만, 할머님의 차림은 정말 소박하고 편안했다. 마치 동네 슈퍼 나가듯 아무렇지 않게 나오신 모습이었다.
“내가 여든넷이야.”
할머님은 말하며 바지를 쓱 걷어 올렸다.
“어제 목욕했더니 피부가 다 벗겨졌어.”
말씀대로 다리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내가 피부가 좋아. 친구들은 다 아프다고 누워있는데, 나는 이렇게 멀쩡히 걸어 다녀. 이렇게 걸어 다니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
할머님은 정말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으셨다. 얼굴도 밝고, 눈빛도 또렷했다.
“와, 그렇게 안 보이세요. 피부도 진짜 좋으세요!”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그 말이 기분 좋으셨는지, 할머님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내가 전쟁도 겪고, 정말 힘들게 살았지. 예전에는 다들 힘들었잖아. 우리 집이 안동이었는데, 대구까지 피난도 갔었어.”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라 나도 귀를 기울였다.
“근데 우리 집이 좀 잘 살았어. 내가 어릴 때 성악을 전공해서, 그 시절에 개인 교습도 받고 그랬다니까.”
말끝마다 묻어나는 세월의 무게와 자부심. 짧은 기다림이지만, 그 시간이 뜻밖의 대화로 채워졌다.
그러다 할머님은 갑자기 웃으며 새벽 운동 중 귀신을 만났던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와, 진짜 귀신을 보셨어요?” 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운동을 열심히 하거든. 아침 6시면 일어나서 뒷산을 올라가. 근데 글쎄, 그날은 하얀 소복 입은 젊은 여자 둘이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어디 가세요?’ 하고.”
그 말을 듣자마자 등줄기에 소름이 훅 끼쳤다.
할머님은 눈을 흘기며 장난스럽게 웃으셨다. “진짜 귀신 있어~ 내가 봤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귀신이면 내가 어디 가는지도 알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둘이 깔깔 웃더니 이러는 거야. ‘그럼, 네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살고, 어디로 가는지도 안다.’ 그러는 거야.”
할머님은 마지막으로 말끝을 흐리며 “이 근처 암센터 병원에서 사람이 많이 죽거든. 그래서 귀신도 많은가 봐.” 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셨다.
에어컨 바람은 약해서 춥지도 않았는데, 그 말을 듣고 난 순간 팔에 닭살이 쫙 돋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1시가 되었다. 우체국 창구 문이 열렸고 우리는 각자의 용무를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택배 상자를 사서 짐을 포장했고, 할머님은 창구로 가 막내아들의 세금을 내기 위해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사람이 많지 않아 대화가 들려왔는데, 직원이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할머니, 이거 우체국이 아니라 신한은행으로 가셔야 한다고 몇 번 말씀드렸잖아요. 지금 네 번째 오신 거예요. 여기 말고 은행으로 가셔야 해요.”
그 순간, 조금 전 대화 중에 어딘가 소통이 어긋났던 이유가 떠올랐다. 단순히 연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할머님은 이미 같은 일로 네 번째 이곳을 방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12시에 맞춰 이곳에 도착해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눈 것도 네 번째였을까?
혹시 이 기다림이 할머님에겐 익숙한 일상이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무료한 하루에서 벗어나기 위한, 할머님만의 작은 방법은 아니었을까.
그저 건강한 모습으로, 재미 삼아 잠깐씩 이곳에 들르는 일상이었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