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방향을 바꾸면 다른 게 보인다
회사를 그만두자 조금 가난해진 대신 시간이 많아졌다. 거짓말처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경제적인 욕심을 버리자 미래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내 손으로 가치를 만드는 일을 하며 소박하지만 작은 기쁨이 고이는 삶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필요하다 싶으면 고민 없이 물건을 사던 습관도 바뀌었다. 소비에 앞서 몇 번을 멈추었다. 구입을 미루는 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책을 좋아해 책 사는 데엔 망설임이 없었는데 책도 가능하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았다. 가난해져서 조금 불편했지만 가난해지자 삶은 단정해졌다.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을 챙기고, 살림에도 정성을 들이자 하찮고 귀찮게 여겨지던 일상에도 반짝하고 불이 들어왔다. 빳빳하게 셔츠를 다려준 날엔 남편의 어깨에 더 힘이 실릴 것 같았고 마른 볕에 말린 이불을 덮고 자는 밤엔 더 따뜻한 꿈을 꿀 것 같았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을 했다. 좋아하는 서울의 골목을 찾아, 동네 산책로로 손을 잡고 걸었다. 미래를 걱정하기엔, 현재가 충만했다. 그렇게 쌓인 순간들로 미래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걸으면서 우리는 여행 이야기를 많이 했다.
제과 학교 중급 수료를 앞두고 상급반으로의 진급을 고민할 때 남편이 감기에 걸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겨울에 시작된 기침이 봄이 되도록 지속되었고 어딘가가 계속 아팠다. 회사일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어느 날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에게도 휴식을 주자.' 남편에게도 멈춤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심의 순간
한 번은 수업을 마치고 건물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여자 대학교의 정문이 있고 그 사이에 일 차선 도로가 있었다. 점심시간 즈음이었을까. 갑자기 긴 생머리에 스키니진을 입은 앳된 여대생들이 밀물처럼 밀려 나와 도로를 가득 매웠다. 그들 얼굴에 고인 화사한 웃음이 파란 하늘과 햇살 아래 선명하게 빛났다. 순식간에 도로를 채운 싱그러움이 나에게도 번져 들었다.
가만히 서서 빛나는 청춘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한 시절이 아스라이 스쳐갔다. 시간의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 같아 어쩔 줄 모르면서도 내 앞에 놓인 낯설고 새로운 세상에 한껏 도취했던 시절, 나의 청춘이 겹쳐 보였다.
모든 게 가능했지만 그땐 그걸 몰랐다. 그래서 막막하고 두려웠다. 도전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놓쳐버렸고 쓸데없는 방황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자유로웠지만 자유를 누릴 줄 몰랐고 열정 가득했지만 제대로 태울 줄 몰랐다. 실패할까 두려웠고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세상을 벗어나는 게 무서웠다. 답답해하면서도 시도하지 못했고 바꾸고 싶었지만 맴돌기만 했다.
자유와 열정, 에너지와 총기가 가득하던 시절은 지났다. 어느새 청춘은 흘러가버렸다. 청춘과의 이별이 서글프던 날들도 지났다. 그러자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엔 어렵던 것이 한결 쉬워졌다. 시작과 끝냄, 떠남과 돌아옴, 받아들이고 거절하는 것.
거기서 청춘의 무리를 보며 나는 안도했다. 눈부시게 빛나지만 어지럽게 흔들리고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날은 통과했다는 마음이었다. 무한한 가능성이 오히려 버거웠던 시간은 지났다. 가능성은 작아졌을지언정 세상과 나를 명확하게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제야 더 잘할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이기에 가능한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 긴 여행의 결심이 나에게 왔다.
그날 오후 여대 앞에서 떠남을 결심했다. 지금이라면 괜찮겠다고. 떠나기에 꽤 괜찮은 때라고.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던 꿈을 꺼내 보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뉴욕과 파리, 피렌체에서 한 달씩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꿨었다. 뉴욕까지는 아니더라도 파리와 피렌체에서 한 달씩은 살아볼 수 있겠다 싶었다.
몸이 안 좋던 남편은 퇴사까지 결심했지만 운 좋게 3개월 휴직을 받았다. 그 휴직이 우리 결심을 확정 짓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제과 학교에서의 기초적인 배움을 끝내고 창업을 위한 나만의 아이템을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디저트의 본 고장이며 최신 트렌드를 엿볼 수 있는 파리 여행이야말로 실질적인 배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나를 위해 파리에서 한 달,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피렌체에서 한 달, 그 사이로 보르도와 바르셀로나를 끼워 넣어 3개월의 여정을 계획했다. 제과학교 상급반 진학 대신 여행을 선택한 것이다.
여행의 이유
회사를 그만두면서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다. 나만의 속도로 삶을 꾸리기로 결심했다. 여행은 그런 결심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다. 장기 여행을 떠나는 불안감조차 이겨내지 못하면 새로운 방식의 삶을 꾸린다는 계획 또한 실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삶을 정지시키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두려웠지만 마음먹은 일을 시도하지 않게 될 까봐 더 두려웠다.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친구와 '왜 여행을 떠나는가'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무언가에 짓눌려 있거나 쫓기는 일상이 지속된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불필요한 것에 신경을 쏟는다. 때로는 남들만큼 달리지 못해 패배감에 빠진다. 그럴 때 떠나고 싶어 진다. 시작은 도피이거나 휴식이다. 하지만 낯선 곳으로 떠난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일상과 조금씩 다를 뿐이다. 햇살도, 공기의 냄새도, 바람의 온도, 매일 마시는 물의 맛도 아주 조금 다를 뿐이다. 그런데 마음만은 많이 달라진다.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쓸데없다고 여겼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조금 더 다정해지거나 조금 더 용감해진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활짝 웃게 된다.
왜 여행을 가냐는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여행을 떠나면 작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타인과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어 좋다. 낯선 길 위에 새긴 발자국 수만큼 나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자주 등을 떠밀었다.
여행을 결심하고 예전에 보았던 파리에 대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우연히 뒷 표지를 먼저 넘겼는데 작은 메모가 적혀 있다.
“파리의 향기가 전해지는 고즈넉한 책이다. 네 덕분에 잘 봤어”
누군가에게 빌려 주었나 본데 기억에 남은 게 전혀 없다. 글씨체를 꼼꼼히 들여다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성 들여 눌러쓴 작은 손 글씨 메모를 이제야 발견한 내 마음은 아차 했다.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책 표지 한 장 들춰볼 여유가 없었을까. 그렇게 살아오는 사이 내가 놓치거나 잃어버린 순간은 도대체 몇 개나 될까.
책 표지를 한 번 더 펼쳐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 숨겨놓은 글귀를 놓치지 않고 찾아 읽는 사람.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여행을 떠나면 그런 눈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발 밑의 돌멩이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