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by 춤추는바람



파리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를 하고 짐을 찾아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비행기가 도착하고 심사대 앞으로 승객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지만 단 2개의 창구만이 열려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서두르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는 곳, 파리다.


여기가 처음은 아니다. 불편한 시스템과 더러운 골목, 코를 찌르는 악취(소변 냄새)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머물다 떠날 게 아니었다. 한 숙소에 짐을 풀고 내 집처럼 한 달을 지내야 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파리를 여행하기엔 최적의 위치에 있었다. 주요 명소에 걸어서 갈 수 있었고 집 근처에는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식료품점, 치즈 전문점, 고기전문점, 야채가게, 해산물가게에서 블랑제리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더러워도 너무 더러웠다.


거실 바닥에 깔린 털매트는 먼지와 때가 뒤엉켜 있고 마루 바닥 틈새에도 먼지가 가득했다. 소파 커버는 때가 찌들어 끈적거렸고 부엌 싱크대와 화장실 세면대도 찌든 때가 앉아 있었다. 세면대 아래 깔려있는 매트는 맨발로 도저히 밟을 수 없을 지경이었고 화장실 샤워부스는 머리를 감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도 못할 정도로 작았다. 작은 세탁기 안에는 정체불명의 수건들이 쳐 박혀 있었다.


밥을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아 집 근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파리지앵처럼 노천에 있는 테이블 중 남아있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테이블 위엔 바람에 날려온 홀씨 같은 것들이 잔뜩이었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하는데 바람이 거세게 불자 차양이 흔들렸고 테이블 위로 먼지바람이 날아들었다. 먹던 음식이 가슴에 쿡 얹힐 것 같았다. 더러운 것만 빼면 다 좋은 곳이 파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 마음이 움찔했다. 곳곳에 켜켜이 쌓인 먼지와 더러운 자국들이 마음을 움츠러들게 했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참았던 한마디를 뱉어 내고 말았다.


"잘 지낼 수 있을까?"
파리에 도착한 지 다섯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여행은 아무것도 바꿔주지 않는다. 파리에서의 한 달은 바뀔 수 없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한 달을 낯선 도시에서 보내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파리라는 도시에 흐르는 예술적 감각과 독특한 감수성이 내게 옮아와 독창적인 영감을 샘솟게 할 것이라고. 남들은 발견하지 못하는 특별한 장소와 물건을 찾아내고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행의 날들은 평범했다. 비 오는 골목을 혼자 걷던 어느 날 내가 나인 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 시간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이 여행을 왔다고 달라지진 않는다. 그 깨달음은 씁쓸했지만 효과는 있었다.


특별한 여행에 대한 기대를 버리자 여행의 빛깔은 달라졌다. 하루가 꽉 차게 만족스러운 날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하지만 매일이 잠깐씩 좋았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해졌다. 여행의 절반이 지났을 때 생각했다. 딱 한 장의 사진이 남는 하루면 된다고.


한 번은 하루 종일 허탕만 친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기운 없이 카메라 속 사진을 열어보니 생각지도 못한 ‘순간’들이 그 안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여행의 많은 날들이 그랬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들이마셨을 것이다. 카메라를 다시 들여다보았기에 그날의 사소한 기쁨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책장 속에 숨어 있던 메모를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평소와 다른 감각 하나를 열어두는 게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비결일 것이다. 왠지 한 번- 하는 예감을 따라가 보는 것, 거기에 우연한 기쁨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루는 잠깐 침대에 누워있었다. 서울에서 듣던 익숙한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남편이 설거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얼른 상체를 일으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청회색의 지붕과 굴뚝이 한눈에 들어왔다. 8시가 넘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그래, 파리야! 그 사실만으로 기분이 들떠 올랐다. 마음의 빛깔은 사소한 것으로 바뀐다.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창문 하나 정도의 좋아하는 풍경만으로도 마음의 창을 가득 채우는 기쁨을 만들 수 있다.


길을 걷다 대뜸 곁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좋지?”
천천히 길을 걸으며 하늘에 둥둥 떠가는 구름을 보다가 공기의 내음을 맡았다. 그러자 울컥할 정도로 좋아졌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되묻는 남편에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이 길과 공기, 그리고 하늘.”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텅 빈 길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시키던 하늘은 여행의 풍경 중 손꼽히는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겨졌다.


저녁 장을 보고 먹을거리가 잔뜩 든 종이백을 가슴에 끌어안고 길을 걸었던 순간, 블랑제리에서 바게트를 주문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연습했던 불어를 말하고 그 주문이 효력을 발휘했을 때, 크로와상과 커피를 사 들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불어로 길을 물어 왔을 때,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루 종일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어둠이 내린 후에야 광장에 나가 회전목마를 타며 꼬맹이들 사이에서 장난을 치며 큰 소리로 웃던 밤이나, 빨래방에서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소설을 읽었던 시간, 피자 가게 종업원이 “벨라, 벨라!”하고 외치더니 하트 모양으로 구워진 피자를 내주었을 때처럼 사소해서 완벽했던 순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생 여행을 하지 않고 한 도시에 머물며 같은 정물을 반복해서 그렸던 화가 조르주 모란디는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를 여행한다 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다.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많이 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것이다." 많이 다니려 애쓰기보단 천천히 머물기를 택한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엑상 프로방스에 간다면 길바닥에 박힌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예쁜 무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여행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발밑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 이건 엑상 프로방스에서만 통하는 여행법이 아니다.


여행은 아무것도 바꿔주지 않았다. 늘 좋았던 것도 아니다. 잠깐씩 좋은 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느려진 발걸음과 여유 있는 마음이 그걸 발견했다.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스마트폰만 바라보며 바삐 걷는 서울에서라면 쉽사리 놓쳐버렸을 것들. 내 앞에 놓인 풍경 속에서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내려는 여유로운 마음이 좋은 시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찾은 사소하지만 완벽한 순간 때문에 내가 좋아졌다.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가 나를 사랑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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