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바람 Dec 04. 2023

위반의 즐거움

벤 샨 <해방>



유년의 기억위반의 즐거움      


궁금해지는 장소가 있다. 이층 양옥집 아래 어두컴컴하던 보일러실과 학교의 찰흙실과 과학실, 후문으로 이어지던 길과 커다란 병원, 트램펄린이 있던 폐허. 그곳은 대체로 어둡고 한낮의 빛이 훤하더라도 괴괴했다. 마음대로 갈 수 없었던 곳이지만 가면 안 된다고 마음으로 금기를 세웠던 곳. 어둠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어린 내게 어둠은 무서운 대상이었다.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게 하나 더 있다. 나쁜 아이가 되는 것.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가지 말라는 곳에 가는 것. 엄마를 화나게 하는 일이나 선생님 말씀을 어기는 행동은 어린 내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감정은 나를 어둠에 가두는 것과 유사했다. 어둠이 무서웠던 나는 스스로 착한 아이가 되고자 하는 아이, 내 안에 자라는 나쁜 욕망을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정문에서 유년의 집에 이르는 길은 지금도 지도를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후문으로 이어지던 길은 흐릿하게 지워져 풀리지 않는 미로처럼 남았다. 나는 마음속 그 길 앞에서 여전히 어떤 끌어당김을 느낀다. 학교 정문과 운동장, 건물의 정면이 보이는 쪽은 양달에 드러나 있던 반면 건물의 뒤편과 후문으로 이어지던 길은 응달에 잠겨 있었다. 기억 속 후문은 한낮인데도 초저녁처럼 어스름하다. 그 길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일 테지만 함부로 가면 안 되는 곳,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후문으로 내려가 큰길에 닿는 지점에는 하얗고 커다란 병원이 있었다. 사람들이 갇혀 있데,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더라, 병원을 탈출한 사람들이 있데… 어린 아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소문이 무성했다. 병원 때문에 그 일대가 개발이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은 기억도 난다. 병원 앞은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을 만큼 차갑게 고요했다. 병원 담벼락의 모퉁이를 지나 길을 건너 폐허가 시작되었다. 무릎까지 오는 잡초로 뒤덮이고 듬성듬성 흙바닥이 드러나 있는 버려진 땅. 낡은 소파나 고철이 덩그러니 놓인 빈 터에서 몇몇의 아이들이 어슬렁거렸다. 한 편에는 대형 트램펄린이 설치되어 있고 아이들은 50원인가 100원을 내고 그 위로 올라가는 허락을 받았다.      



그때 주머니에 있던 동전은 어디서 난 걸까. 나는 정말 그 위에 올라갔던가. 덕희의 생일날이었나, 미진이나 혜신이네 집에 놀러 갔던 날이었을까. 많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도 트램펄린에서 한참을 뛰고 내려오면 발바닥에서 느껴지던 얼얼한 감각만은 생생하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운데 발에는 고철덩어리가 매달린 듯 묵직했던 느낌이. 땅으로 돌아왔다는 강력한 현실감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시무룩해지고 말았던 기억이. 그러니까 잠시 눈을 감으면 바로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트램펄린 위에서 발을 구르자 하늘에 닿을 듯 솟구쳐 올랐을 순간으로. 신나게 뛰는 사이 내가 어디 있는지, 무얼 하는지 따위 생각도 나지 않았겠지. 허공으로 떠오르는 감각에 몰두하면서 세차게 발을 구르며 속으로는 ‘더 높이, 더 높이’ 하고 외쳤겠지. 그날 어디까지 다녀왔는지 무얼 했는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서움을 넘어서는 짜릿함. 두려움 뒤에 숨어 있는 황홀경. 그런 감정을 경험하는 일은 나를 해체했다 다시 세우는 일 같다. 빈에서 프라하로 가던 야간기차처럼. 그 밤 기차는 어둠을 뚫고 달리는 유령 같았다. 곁에 있던 떠들썩한 가족이 어딘가에서 내리고 나자 6인석인 기차 칸에 나만 홀로 남았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기차는 내부 조명을 모두 끄고 자신이 어둠인양 비명을 지르며 질주했고 창 밖으로는 까만 어둠 위로 일그러진 내 얼굴만 보였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정차역에서 한 남자가 들어와 맞은편 구석 자리에 앉았다. 어두운 실내에 더 어두운 점 하나가 찍혔다. 두려움에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던 나는 가방을 끌어안고 자는 척을 했다. 밤의 기온은 서서히 낮아졌고 그러다 졸음이 덮쳤다. 추위에 떨다 잠이 들고 바르르 떨며 깨어나길 반복하는 사이 밤은 영원처럼 늘어졌다.     



그 끝에 닿은 프라하의 아침은 나를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했던가. 어둠과 두려움을 버티어 내고 맞는 빛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역사를 걸어 나오며 새로 태어난 듯한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누구도 내 얼굴에서 그런 낌새를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시치미를 떼 듯 무표정하게 걸었으니까. 엄마 몰래 나쁜 짓을 하고 난 어린아이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프라하의 아침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벤 샨의 <해방>, 비극을 견디는 아이들의 순전함    


<해방> 벤 샨


벤 샨의 그림 <해방>에는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간 듯 허물어져 기운 건물과 부서진 돌덩이들이 쌓인 폐허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가난과 고통, 슬픔 같은 건 모른다는 듯, 텅 빈 표정과 눈빛이 시치미를 떼는 얼굴처럼 보인다. 어른들의 고통과 낌새를 눈치챘지만, 가난이 지긋지긋하다는 걸 이르게 감지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모르고 싶은 얼굴들이다. 밖에 나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엄마는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과 즐거움에 목마른 아이들은 위험을 무릅쓴다. 놀이에 빠져들어 순간의 아슬한 감각을 즐긴다.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발을 구르는 아이의 몸짓에서는 박력과 패기마저 묻어난다. 건물이 무너지더라도 쓰러지지 않을 강인함이 그렇게 아이들 내면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 순전함에 비극을 견디는 힘이 깃들었을 것이다.         


<핸드볼> 벤 샨



위반하는 즐거움 때문에 아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기도 한다. 어른들만 마음대로 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되바라진 아이들, 어른도 모든 걸 알지 못한다는 걸 일찍 알아버린 맹랑하고 용감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은 서둘러 부모가 그어 놓은 선을 넘는다. 하지만 어떤 성장은 기존의 세계를 무너뜨려야만 가능하지 않던가. 위반하며 그려지는 세계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름답지 않던가. 가지 말라는 곳으로 자석처럼 이끌려 담을 넘고 모험을 일삼는 아이들이 나를 유혹한다. 그게 진짜라고. 안전한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위태롭게 매달리는 그곳이 우리를 키우는 장소라고. 나를 유혹하는 장소 앞에 스스로 선을 그었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떤 담을 두르고 사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릴 적 그 길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졌다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그늘에 잠긴 과거의 길은 사라졌지만 내면의 어둠만은 여전히 내 안에 흐른다.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어떤 어둠은 끈질기게 나를 끌어 당긴다. 지나친 경계와 방어로 세운 담을 허물어 보라고, 어둠에 갇히는 대신 그 속을 유영하는 은빛 물고기가 되어 보라고 나를 부추긴다. 눈을 감으면 까만 어둠이 펼쳐진다. 밤의 국경을 건너 어둠을 향해 질주하려는 기차가 출발을 알린다. 월경(越境)의 꿈에 탑승하는 티켓이 주머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벤 샨(1989~1969)
리투아니아 태생의 미국 화가로 정치 사회적 문제를 테마로 작업했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뉴욕에서 활동하던 석판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일했고 1925년에서 1929년까지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사회적 사건으로 눈을 돌려 극명한 사실적 회화를 발표했는데 드레퓌스 사건이나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다룬 연작 등이 유명하다. 판화수업에서 얻은 색채의 평면적 사용과 그림에 대한 애착에서 나온 섬세한 선이 특징으로 작품에서 표현하는 비판 및 풍자 정신과 애수를 띤 인간성이 높이 평가된다.
[네이버 두산백과 참고]





*그림사진 출처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38547









매거진의 이전글 고독의 풍경을 발명하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