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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Dec 28. 2023

시간의 겹

시간이 머무는 곳



매일의 날은 늘 처음으로 내게 온다. 서른의 내가 그랬듯, 마흔의 나도 내겐 처음이었다. 쉰의 나 또한 처음일 것이다. 삶에서 나는 언제나 초보일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고 좌절하고 헤매기 일쑤지만 내내 배우고 겸손하면 되지 않을까 싶고.


새 날 위로 과거의 시간이 얇게 막을 얹기도 한다. 이를 뺀 아이가 이 요정의 마카롱 선물을 받았던 날, 그 환호하는 얼굴에 나의 어린 시절 시장통에 있던 치과와 바나나 우유를 먹던 시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시간에 겹이 생겼다. 아이의 시간 위로 나의 어린 시절이 덧대이고 그러면 나보다 어렸을 엄마와 아빠가 떠오른다. 그 위로 현재의 나와 주름이 깊어진 그들의 얼굴이 또다시 시간의 층을 쌓는다.


요즘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휘감아 돌고 겹쳐져 돌림노래로 흐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십 년 단위의 시간이 중첩하여 화음을 만든다. 과거와 현재, 때로는 어떤 미래가 지금 여기서 공명하면서. 나의 노래가 아니라 우리라는 노래가 흐른다. 내 안에는 나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쪽 가슴 안 쪽에는 아빠가 왼편 무릎에는 엄마가, 뱃속 깊고 아늑한 곳에는 나도 기억할 수 없는 나의 작은 어린 시절과 내 아가의 태곳적이 산다. 나의 갈비뼈 사이로 사랑했던 이들이 골을 이룬다. 나의 각막에는 너의 현재와 미래가 날마다 새겨지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모든 이야기가 노래처럼 흐를 것 같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앞서 간 누군가의 그림자에 그림자를 덧대어 길게 늘이는 일이나 끝없이 풀려나오는 실을 겹겹이 감아내는 일 같다. 둥글게 둥글게 감겨 도타워지는 일. 시간의 겹으로 조밀해지는 일.


어떤 아침에는 이를 닦으러 화장실을 가던 아이가 학교에 가면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며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순전한 사랑에 뭉클하고, 그런 막막함에 울음이 나오는 아이의 마음이 짠하고. 그러면서도 기쁘게 웃음이 났다. 이런 순전한 사랑을 나도 언젠가 했는데, 이 사랑도 돌림노래였구나 깨달으면서. 그러니 나를 키운 실타래에 이 노래도 감는다. 감고 또 감아 도탑게, 언젠가의 너를 지탱해 줄 실 기둥을 짓는다. 내가 아닌 너를 기대하는 일, 내 삶이 아닌 네 삶을 밀어주는 일, 자신을 무대 뒤로 보내는 삶의 의미가 무언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으로.


지금의 허물어진 얼굴이 낯설 만큼 젊은 시절의 엄마 아빠가 내겐 더 생생한데 그들을 향한 나의 마음이 여전히 아이처럼 순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순전했던 마음으로 내 아이를 사랑하고 있구나. 내 안의 사랑이란 그렇게 탄생한 것이구나 깨닫는다. 처음 태어나 사랑을 배우던 시절처럼 내 앞의 아이의 몸짓과 표정으로 여전히 사랑을 배운다.


나이 든 부모를 마주할 때의 슬픔과 허무한 한탄을 이제 조금씩 지워낼 수 있을 것 같다. 사랑만은 건너가며 끝없이 흐를 테니까. 삶과 시간은 한 존재를 허물어뜨리는 게 아니라 비어 내며 깊어지게 하는 것, 드넓게 풍성해지는 일, 겹을 만드는 일이라고 달리 부를 수 있으니까. 그건 하강이 아니라 가뿐하게 상승하는 일일 수도 있다. 메마르는 것이 아니라 도타워져 누군가를 따뜻하게 품는 일일 것이다. 그런 품 하나 지어볼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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