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바람 Jan 30. 2024

모든 삶이 애도(哀悼)라면

영화 <러브레터>를 보고




첫눈이 내렸다. 서서히 눈발이 굵어지고 눈송이 간격이 촘촘해지더니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일순간 소거되는 세상. 눈으로 덮인 하얀 세상은 갑자기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는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익숙한 현실이건만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전체의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일까. 세계를 구성하는 다채로운 색과 모양을 눈이 지우고 나면 흰 도화지 같은 세상 위로 움직이는 것과 멈춘 것의 대비가 선명해진다. 생(生)과 사(死). 한 해가 끝을 향하고 살아있는 것들이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겨울, 그리고 눈, 그것들은 삶 곁을 맴도는 죽음을 기억하라고 해마다 돌아오는 것 같다.  



‘눈’ 하면 떠오르는 영화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1999)가 있다. 이십여 년 전 보았던 영화를 오랫동안 아꼈다. 이름이 같다는 인연으로 스친 두 사람, 첫사랑을 잊지 못했던 남자와 그랬던 애인을 잊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여자. 이루어질 수 없는 두 개의 사랑이 돌림 노래처럼 흐르는 영화는 눈 덮인 풍경을 담아낸 영상과 오케스트라 선율이 더해져 수려했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만 영화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지난 11월의 끝자락에 재개봉한 <러브레터>를 영화관에서 다시 보았다. 첫사랑의 기억 너머로 죽음과 애도라는 겹들이 정교하게 덧대어진 것을 이제야 들춰 볼 수 있었다.





영화는 ‘후지이 이츠키(가시와바라 타카시 역)’의 추도식에서 시작된다. 가없이 눈이 내리는 날, 온통 흰 것으로 뒤덮인 화면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등장한다. 눈밭을 홀로 걷는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따라가던 카메라는 서서히 뒷걸음질 쳐 온통 하얀 세상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여자의 검은 옷과 흰 세상, 검고 하얀 것의 대비가 그려내는 숭고한 미감은 죽음에 바쳐진다.



이 년 전 산에서 조난당한 이츠키(가시와바라 타카시 역, 남성 이츠키)를 기리기 위한 추도식. 여자는 그의 애인 와나타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역)다. 히로코는 추도식 후 이츠키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다 주면서 이츠키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발견하고 당시 살았던(국도가 지나가는 공사로 이젠 사라지고 만) 오타루의 집 주소를 몰래 적어온다. 그리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집으로 세상을 떠난 애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뜻밖에도 히로코가 쓴 편지는 그의 애인 이츠키와 동명이인인 여성에게 전달된다. 때마침 심한 감기를 앓고 있던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역, 여성 이츠키)가 “잘 지내고 있나요?”라며 안부를 묻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영화에서 ‘이츠키’라는 이름이 남성과 여성 두 명의 인물에게 부여되고 나카야마 미호라는 한 명의 배우가 여성 이츠키와 히로코 두 인물을 연기하면서 영화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로를 모르는 히로코와 이츠키(여성),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츠키(가시와바라 타카시 역, 남성)와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역, 여성)와의 관계, 그리고 이츠키와 히로코 사이 숨은 비밀에 다가간다. 이츠키(남성)와 이츠키(여성)는 중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고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하거나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고는 했는데...... 히로코의 편지를 계기로 그 시절을 되감아 보던 이츠키(여성)는 묻혀 있던 진실 앞에 당도한다.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는 히로코가 쓴 편지는 죽음의 흔적을 싣고 이츠키(여성)에게 닿은 걸까. 중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이츠키(남성)와의 기억은 이츠키(여성)의 기억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추출하고 자신이 앓는 심한 감기로 아버지의 죽음과 유사한 상황에 이른다. 이츠키(여성)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그의 가족들은 다시 한번 죽음이라는 고비에 다가간다.



영화에서 이츠키(여성)는 마지막에야 이츠키(남성)의 죽음을 알게 되고 그와 동시에 지난날 알아채지 못했던 진심 혹은 진실의 조각을 발견한다. 그것은 수신인은 있지만 발신인은 없는 편지처럼 그녀에게 도착한다. 영화에는 두 개의 낯선 편지가 등장하는데 히로코가 죽은 이츠키(남성)에게 보낸 발신인은 있지만, 수신인은 없는 편지와 중학생의 이츠키(남성)가 이츠키(여성)에게 그려 보낸 발신인은 없지만, 수신인만 있는 도서 카드이다. 이들 사이 ‘죽음’이 가로 놓여 편지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보인다.   



편지란 발신인의 메시지를 수신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는 편지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존재하려면 인식하고 발견되어야 한다. 영화에서 히로코의 편지(존재와 사랑)는 이츠키(여성)에게 발견되고 이츠키(남성)의 편지(도서카드)도 뒤늦게 이츠키(여성)에게 발견된다. 히로코에서 이츠키(여성)로 이츠키(남성)에서 이츠키(여성), 그리고 이츠키(여성)에서 히로코(여성)로, 시간과 대상은 미세하게 어긋나지만, 편지의 메시지만은 마침내 제 주인을 찾아간다. 동시에 관객에게도 그 메시지는 인식되고 발견된다.  


 

이렇듯 영화는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라진 존재를 인식하고 발견하게 하여 죽음으로부터 잠시 잠깐 그를 소생시킨다. 죽은 이를 떠올림으로써 그를 살게 하는 일, 영화에서 편지가 하는 일은 삶에서 계속되는 추도식, 즉 애도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츠키(남성)가 이츠키(여성)의 옆모습을 그려 놓은 도서 카드가 꽂힌 책의 제목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혹은 화자)는 과거를 회상한다. 과거란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닫힌 시간, 죽음의 시간이지만 기억하는 순간 기억하려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기억으로 숨을 불어넣으면 사라지려던 기운조차 한순간 생명을 얻는다. 그러므로 과거를 기억하려는 우리는 그 자신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場)이며 과거를 소생시키는 구원자가 될 수 있다.   



침대에 누워 기침을 토해내며 과거의 기억을 끌어내 히로코에게 편지를 쓰던 이츠키(여성)는 또 한 명의 ‘프루스트’이며, 히로코가 사랑했던 이츠키(남자)는 질베르트처럼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모두의 첫사랑(이츠키(남성)가 사랑했던 이츠키(여성) 또한 그렇고)임을 영화는 마지막에 고백한다. 러닝 타임 내내 과거와 죽음에 숨을 불어 넣어 관객 앞에 소생시키고자 했던 영화는 관객을 애도를 위한 추도식에 초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영화에는 여러 죽음이 얽혀 있다. 이츠키(남성)의 죽음과 이츠키(여성) 아버지의 죽음, 이츠키(여성)의 유사 죽음과 근미래에 다가올 이츠키(여성) 할아버지의 죽음까지, 현존하는 삶과 함께 흐르고 있는 죽음을 여러 장면과 장치로 암시한다. 이츠키(남성)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와 아버지의 죽음을 품고 사는 이츠키(여성)(마치 그 자신의 죽음 혹은 죽을 운명을 기억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의 존재도 그렇다. 삶이란 나와 얽힌 모든 죽음을 기억하는 일, 죽음을 간직하는 일이라고 영화는 알려 준다.   



나라는 존재에 덧씌워진 모든 죽음-나를 태어나게 한 죽음과 나를 스쳐 간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 삶이라면 살아가는 모든 날이 애도일 수 있겠다. 어떤 애도는 충실히 진실하게 살아가는 일로 가능하지 않을까. 죽은 이를 기억하고 언젠가의 죽음을 감지하며 경건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순간을 산다면, 그것도 애도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삶이란 앞서 간 죽음에 대한 애도로 쓰이는 시인가 보다. 죽음 없이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없고, 우리 삶이란 누군가의 죽음 뒤로 이어지는 시간이기에.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추도식 같다. 영화관을 나서 길을 걸으며 나를 스치고 관통한 무수한 죽음을 떠올렸다.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는지. 삶과 죽음 사이 막막하게만 보이던 간극이 실은 미농지 한 장 차이라는 아찔한 깨달음에 먹먹했다. 이츠키(남성)가 사라진 눈 덮인 산을 향해 울부짖으며 달려가던 히로코처럼, 망자(亡子)가 된 그리운 이들에게 입 속으로 물었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건네준 삶에서 잘 지내겠다는, 살아내겠다는 다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위반의 즐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