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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Mar 05. 2024

너는 자라 네가 될 거야

혼자가 되어가는 날들





늦은 오후 공원 잔디밭을 여섯 바퀴 달렸다. 아직 쌀쌀하다고들 말하지만, 빛과 공기에는 봄기운이 확연하다. 빛은 폭을 늘려 낮의 길이를 길게 했고 공기는 무게를 줄여 한 뼘 즈음 날아올랐다. 벤치에 앉았거나 강아지와 거니는 사람들의 수도 늘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속살거림이 낮은 진동으로 번지는 것 같다. 태어나려는 움직임, 깨어나려는 소리가. 그런 세계로 성큼 나아가듯 보폭을 넓혀 보았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고백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딸아이의 2학년 첫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과 떨림이 공존하는 순간. 처음이란 그 알 수 없음으로 인해 두려우면서도 기쁠 수 있다. 선생님은 어떤 분 일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했다. 첫날이니 단정하고 깨끗하게 입으면 좋겠다는 내 말에 아이는 청바지와 하얀 카디건을 골라 입었다. 학기 내내 운동복만 입었던 1학년 때를 생각하면 아이 가슴 또한 ‘처음’이라는 말로 노란빛이나 연두 빛으로 물들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용기가 필요한 어떤 순간을 위해 작은 쪽지에 메모를 적어 필통에 넣어 주었다. 처음이라는 순간을 홀로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멋지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교하는 아이를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렸다. 키가 큰 남자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하여 나오셨다. 담임 선생님이 배정되었다는 안내문에서 선생님 이름을 확인하고 남자 선생님인가 보다 짐작은 했는데, 눈에 띄게 커다란 키가 낯설었다. 선생님께서 건물 앞에 멈춰 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머리를 한 명씩 어루만져 주셨다. 아이들의 대열 중간 즈음에 딸아이가 보였다. 어린이집에서부터 알던 친구와 나란히 걸어 나왔다.



멀리 서는 조금 얼은 듯 보였는데 나를 보자 아이는 금세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종알거렸다. 선생님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착한 것 같다고, 아영이가 내 앞에, 슬기가 내 뒤에 앉았다고. 번호 순서대로 한 달씩 돌아가며 선생님 도우미를 하는데, 자신이 이번에 도우미라고, 3번이 되었다고 했다. 아이의 발랄한 목소리에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처음이라 긴장도 되고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괜찮았구나 싶었고. 타고난 밝은 성정이 아이를 지켜준 것 같다.



아이는 하교 길에 만난 친구 몇몇과 바로 놀이터로 직행했다. 무사히 첫 등교를 마친 아이에겐 선물 같은 시간이지 않았을까.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노는 것만큼 아이를 기쁘게 하는 건 없으니까. 그렇게 놀고 들어와 피아노 학원을 갔다. 오늘은 아이 혼자 학원을 오가기로 한 첫날이다.



가까운 거리지만 아직은 혼자 다니는 게 걱정되어 며칠 전 핸드폰을 마련해 주었다. 가능하면 핸드폰을 늦게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이러저러한 사정과 아이의 바람을 고려해 전화와 문자메시지만 이용할 수 있는 기기로 시작해 보기로 했다. 핸드폰이 있어도 길에 아이를 홀로 내보내는 게 걱정되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새 학기를 계기로 도전해보자 싶었다.



잠시 후 아이가 학원에 도착했다는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수업이 끝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아이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제 집으로 간다는 아이의 말에 주변을 잘 살피며 걸으라고 일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열리는 소리가 나고 상기된 얼굴로 아이가 등장했다.  


 

아이는 넉살 좋게 웃으며 혼자 오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처음이었는데, 엄마 딴엔 긴장도 했는데 이렇게 쉽게 넘어갈 줄이야. 스스로도 뿌듯한지 아이의 목소리에 으스대는 낌새가 느껴졌다. 엄마가 언제 오나, 늦게 오면 어떡하나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너무 좋단다. 그랬구나,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고 엄마가 늘 곁에 있었으면 하는 아이 마음이 영영 자라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랬던 나의 마음과 달리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자기만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어떤 두려움과 걱정이 내내 아이 마음에 머물렀다는 걸.



아이는 하나의 장막을 찢고 나선 듯 들떠 올라 말을 이었다. 돌봄 교실에서도 엄마가 언제 오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 너무 좋다고. 언젠가 한 번 볼 일이 늦어져 한 시간 정도 늦게 간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아이는 엄마가 늦게 올지 모른다는 불안을 내내 지니고 있었다. 그때를 빼고는 매번 시간 맞춰 가는데도 날마다 시간을 재차 확인하고 걱정을 멈추지 않았던 아이.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힌 아이가 안타까웠는데, 엄마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헤아려졌다. 날마다 엄마를 기다렸다는 아이의 말과 그랬을 아이의 마음이 다른 빛으로 아름답게 읽혔다.    



슬프고 아릿하지만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시간 속에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아이. 그랬을 아이가 어여쁘고 애틋하면서 기다림의 대상이 나였다는 사실이 슬프면서 기쁘다. 기다림이 사람을 키우는지 모른다. 일 년 간 엄마를 기다리던 조바심과 걱정, 막연한 두려움과 희미한 상실감을 통과하며 아이는 자랐을지 모른다. 그 감정들이 차곡차곡 아이 내면에 쌓여 조그맣고 얄팍하던 마음을 도타워지게 했을까. 엄마와 함께 다니던 길을 홀로 씩씩하게 오갈 용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기다림이 쌓여 피어난 것이리라.



내가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 미처 헤아릴 수 없고 아무리 더듬어도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 아이 안에 존재한다. 그것이 나와 아이 자신을 두렵게 하고 때로는 걱정을 넘어선 고통을 안겨주기도 할 테지만 그것만이 아이를 아이 자신으로 만들 것임을 안다. 내가 모르는, 영영 알아챌 수 없는 비밀한 영역이 아이만의 무엇이 될 테니까. 결핍이나 아픔, 위축과 방황의 영역이 아이를 키우고 아이 자신을 만들 것이다. 그것들 쌓이고 다져져 아이의 가장 소중한 무엇이 될 테지. 그러니 아이에게 생기는 상처나 흠집에 안절부절못하지 않기를. 그 모든 걸 아이가 자신만의 무늬로 다듬어갈 수 있다고 믿어 주기를. 그런 나이기를 기대해 본다.



아이는 또다시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갔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환한 얼굴이라니. 생기가 뚝뚝 떨어지는, 삶의 온전한 감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얼굴이라니. 빛을 내뿜는 유리알 같은, 어둠이 내리는 하늘에 막 떠오른 달 같은, 말간 얼굴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 아이를 안고, 오늘 참 오랜만이다 말했다. 혼자 씩씩하게 오가느라 분주한 너를, 품에 한 번 안아볼 새가 없었다고, 이제 진짜 언니 같다고.



아이와 문구점에 가서 새 학기에 필요한 공책과 준비물을 구입했다. 길에서, 저녁 먹는 식탁에서 아이는 내내 종알거렸다. “선생님은 서른여덟에서 마흔세 살 사이야”, 무슨 수수께끼 같은 아이의 말에 “뭐라고?” 되물으니, “나이는 알려줄 수 없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있는데 빵살 이래”, “빵 살이라고?” 어리둥절해하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데, 돌도 안 되었데.” 하는 답. 빤한 이야기를 이토록 미스터리하게 풀어내는 재주도 신기하고. 너는 어느 별에서 와 이렇게 재미나게 말을 하는 건지. 너는 무얼 먹고 자라 이토록 빛이 나는 건지.



아이의 첫날이 내게도 어떤 처음처럼 다가온다. 새롭게 배우고 경험하며 채워갈 한 해를 비로소 시작하는 기분이다. 아이가 내면의 장막을 찢고 성큼 어떤 세계로 입장한 것처럼, 그처럼 내게도 어떤 장막이 찢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 또한 비로소 다시금 혼자가 되는 시간으로 입장하고 있는지도. 너는 나날이 자라 무럭무럭 네가 되어 가고 있으니 나도 열심히 자라 내가 될 게. 너는 그저 네가 되렴. 나도 그저 내가 될 게.



또다시 처음. ‘처음’이라는 깨끗하고 선명한 마음을 선물 받았다. 새 공책을 펼쳐 첫 장을 적어 내려가듯, 공들여 정갈하게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 이 좋은 예감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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