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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Aug 24. 2023

우울할 땐 하늘을 봐

하늘이 건네는 위로와 기쁨



고등학교 시절 여름캠프에서 밤에 있을 캠프파이어를 준비하는 선생님을 도운 적이 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봐라. 저게 은하수란다."

밤하늘에 희붐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별들의 강, 별들이 모여 우유처럼 흐르는 자욱.

"와아!"

고개를 들고 선생님이 가리키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밤 어떤 행사가 있었는지, 친구들과 무얼 하며 웃고 떠들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님의 한 마디와 숨이 막힐 것 같던 기분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마음속 환등기를 돌려볼 때면 종종 은하수를 보았던 그 밤이 떠올랐고 여러 번 되감아 보는 사이 더욱 선명해졌다.



하늘과 하늘 위에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기만의 원리도 돌아가는 존재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구름과 저녁놀, 반짝이는 별과 바람, 눈(雪)과 비까지. 흐린 날이 이어지다가도 거짓말처럼 맑은 날이 돌아오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된 하루에도 어김없이 해는 진다. 그것들은 내 마음의 상태와 관계없이 일정한 리듬으로 흐른다.



인간이 조절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도 없는 하늘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자주 위안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원리 안에서 세상은 변하고 흐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변하거나 흐르지도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불변의 진리라는 게 감춰져 있어 밤과 낮이 오고 계절이 가고 만물이 순환한다. 그것이 삶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울타리 같다.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아름다운 존재들이 인간의 통제 너머에서 우리를 보살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의 맛, 구름의 맛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내내 하늘을 보며 ‘여름의 맛’을 즐겼다. 온갖 진귀한 모양으로 양감을 뽐내며 하늘을 채우던 구름들.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한 번, 장 보러 오가는 길에 한 번, 저녁 무렵 산책하면서 또 한 번. 하루에도 수시로 구름을 보며 사진을 찍었더니 핸드폰 사진 폴더에 구름 사진이 잔뜩 쌓였다.








































지난여름 나를 가장 즐겁게 해 주었던 건 구름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대지의 열기로 터질 듯 팽창했다가도 저녁 무렵에는 실뱀처럼 가느다랗게 흐르거나 깃털처럼 폴폴 흩어지던 구름들. 변화무쌍한 구름의 쇼를 보는 건 여름이라 가능한 일. 살뜰히 구름의 모양을 감상한 하루라면 꽤 괜찮은 날을 보낸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찜통 같은 더위에 그 정도의 여유와 기쁨을 챙긴 것만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러다 운이 좋은 저녁에는 고운 파스텔톤의 핑크빛이나 살구빛으로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을 마주했다. 구름이 층층이 떠 있고 그 아래로 붉게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마주하는 풍경이지만 하늘의 표정이 바뀌면서 낯설기도 그립기도 한 기분이 찾아오는 것이다. 익숙한 대상 앞에 잠시 멈춰 그날의 특별한 표정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여행의 순간임을 여름 저녁을 맞으며 깨달았다.



얼마 전에는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는 걸 보았다. 우리나라 하늘에서 볼 수 있는 3대 유성우 중 하나인 페르세우스 자리 유성우. 유성우는 혜성, 소행성 등이 지구 궤도에 남긴 잔해물이 지구 대기를 통과하면서 평소보다 많은 유성이 떨어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대개 8월 12일을 전후하여 1년 중 가장 화려한 유성우를 볼 수 있다는데 운이 좋으면 한 시간 동안 100개의 유성을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올해는 8월 13일 이었다.)



내 생애 실제로 별똥별을 본 적이 있던가 가물가물했다. 시간당 100개라니. 이건 꼭 가족들과 봐야 해, 생각하며 밤이 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날은 밤하늘에 구름이 많았고 서울에는 밤에도 빛이 많아 실제 관측은 어려웠다. 마침 국립 과학관에서 하와이 하늘에서 관측되는 유성우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해주어 그걸 보는 걸로 대신할 수 있었다.



별똥별을 세던 여름밤의 기억


거실에 넓게 자리를 펴고 남편과 나, 딸아이 셋이 나란히 엎드려 아이패드 화면으로 별똥별을 보았다. 까만 모니터 화면 촘촘하게 박힌 별들 사이로 문득문득 길게 꼬리를 그리며 유성이 떨어졌다.


“떨어진다!”

“어디 어디?"

"여기!”

“여기도!”


셋이 번갈아 가며 유성이 떨어지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환호했다. 실제는 아니지만 지금 어딘가에서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쏟아지는 걸 바라본다는 게 조금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분 단위로, 때로는 초 단위로 떨어지는 별똥별이 있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 본 나는 아이처럼 흥분했다.









어떤 유성은 유난히 또렷하고 길게 꼬리를 그렸다. 하얀빛이 아니라 오로라 빛을 내며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 유성을 발견한 순간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원을 빌었다. 간절한 소망이 있어서 더 열심히 별똥별을 기다렸다. 별똥별을 기다리는 간절함, 놓치지 않고 소원을 비는 절실함이 소원을 이뤄줄 것만 같아서. 다른 건 몰라도 그 오로라 빛 유성만은 내 소원을 꼬리에 달고 밤하늘 너머로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날은 평소보다 한참 늦게 자정이 가까워서야 잠이 들었다. 내겐 간절한 소망과 함께 더욱 특별한 밤이 되었는데 아이에겐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흔히 볼 수 없는 별똥별을 아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지구라는 곳이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멋지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늘 너머 우주라는 광대한 공간이 존재하고 그곳에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물체가 있다. 땅 위에서 인간의 시계에 따라 살아가는 동안에는 인식할 수 없지만 고개를 들어 막힘없이 이어진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곳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발견하는 순간, 세계는 비가시 영역으로 한없이 확장할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세계가 있고 그곳은 이해할 수 없는 원리로 흐르고 변하고 팽창하고 수축한다는 걸 알아채면서. 그러면 닿지 않는 곳에서 빛나는 것들이 먼지처럼 보잘것없는 인간 삶의 배경을 아름답게 꾸며준다는 사실에 경이와 감사를 느끼게 된다.



살면서 우리가 즐겨야 하는 것이 있다면, 버킷리스트 속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연의 얼굴이 아닐까 싶다. 계절마다 다른 빛과 모양을 보여주는 하늘과 구름, 해와 달과 별을 통해 고단한 인간사 너머 변함없이 존재하는 진리와 대가 없이 베풀어지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놓치지 않고 감상하는 일. 그 울타리 안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삶의 원리 또한 하늘과 우주를 이해하는데서 찾아지는지도 모르겠다.  



잠잠히 제 할 일을 하는 하늘을 보며 습기와 무더위로 고갈되려는 온유한 기운을 회복했다. 자신의 원리에 충실한 존재들이 제각각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세계, 불협화음 속에 완벽하게 아름답기도 한 세상.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빛으로 채색되는 하늘을 보며, 다채로운 모양과 부피로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구름을 헤아리며, 우리가 사는 지구가 그런 곳이라는 걸 불현듯 깨닫고는 한다. 8월 말에는 '슈퍼블루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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