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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Mar 06. 2024

운명을 찾아, 끝없는 항해

구본창 <항해>전






“문학이란 잘 대화하는 일이라 믿고 있습니다.”

-황인찬





우연히 집어 든 그림책, 소개 글에 적힌 시인의 문장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문학이 잘 대화하는 일이라니. 문학을 거창한 무언가로 여겨 며칠을 끙끙 앓았는데. 문학이 잘 대화하는 일이라면, 자신과 타인과,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소소한 이야기를 써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하던 대로 쓰면 될 것 같다. 특별하고 남다른 이야기를 찾겠다고 손을 놓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도 무언가를 찾거나 어딘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시인의 문장이 내게 다정한 용기를 건넨다. 급작스런 점프나 순간이동이 아니라 여기서 잠잠히 걸으라고. 묵묵히 내 자리를 파내려 가라고. 제자리걸음인 듯한 속도로만 닿을 수 있는 곳도 있을 것이다.










오직 나로서만 내가 될 수 있다. 오직 나로서만 나만의 무엇을 만들 수 있다. 나로서, 내 삶으로만 창작이 가능하다고, 내가 모여 예술이 되는 거라고 알려주는 전시를 보았다. 구본창의 <항해>. 한 사람이 관심을 두고 지속한 무엇이 결국 그의 삶이라고 보여주는 전시. 삶이란 자기만의 박물관을 짓는 일이라고 언제가 썼는데, 그 문장을 또 하나의 현실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평생에 찍은 사진으로 채워진 미술관은 그 자체로 그의 삶이었다. 송두리째 그 자신이자, 그의 삶이었다.











전시는 ‘호기심의 방’(분더카머)에서 시작해서 ‘열린 방’으로 끝난다. 일흔이 된 사진작가의 삶을 돌아보며 그를 사진으로 이끈 실마리부터 이후 지속된 사진 작업의 흐름을 총망라하는 대규모 전시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미술에 대한 관심, 이미지에 대한 끌림으로 독일 유학을 떠나 사진을 공부하게 된 이력도 남다르지만 보잘것없는 사물이 지닌 미감에 사로잡혀 끝없이 물건을 수집하고 자신의 시선에 아름다운 것이라면 어떻게든 간직하려 했던 구본창의 성정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구나 생각했다. 자신을 사로잡는 대상을 흔들림 없이 좇았던 내면의 단단함이 사진이라는 그만의 박물관을 짓게 한 힘이라고.





섬세한 시선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사물에 관심이 많고 아름다운 물건을 모으는 소년이었다. 시간의 흔적을 품고 아름다워지는 물건들에 사로잡혔다. ‘호기심의 방’에는 그가 사로잡혔던 물건들, 그의 수집품이 모여 있다. 그중 닳아버린 비누를 모아 둔 상자가 눈길을 끌었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아름답다면 수집하여 간직하는 사람, 자신의 시선을 소중하게 지키며 탐구하고 연마했던 사람이라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그랗게 혹은 기다랗게 변형되어 제 모양을 잃은 비누들. 본래의 색에서 조금 더 투명해지거나 조금 더 탁해진 조각들이 투명색 아크릴 상자에 담겨 있다. 얼핏 보면 유리 조각이나 돌멩이, 보석처럼도 보였다. 화장실에 낱개로 놓여 있을 때는 알아챌 수 없는 미감이 그것들을 감싸고 있었다. 시간에 마모되어 저마다의 모양이 된 조각들을 모아두었기에 비로소 탄생하는 어떤 아우라. 그제야 우리가 읽어내는 아름다움을 그는 낱낱의 사물에서 발견하고 예견했던 것이다. 닳아가는 비누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미(美)로 재탄생한 건 아닐까. 자기만의 모양과 색으로 녹아내려간 비누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물건이다. 평범한 대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걸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구본창은 비누처럼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대상을 꾸준히 사진에 담았다. 유럽 건물의 입구에 세워진 샤스루부터 사용감이 있는 비누, 손과 발이나 곤충, 탈과 백자, 그리고 금관까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사물을 긴 시간을 들여 지켜보았고 사진으로 찍음으로써 대상에 숨을 불어넣었다. 관심 있는 대상이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으며 자신에게 특별한 말을 건네는 대상만을 사진에 담았다. 같은 백자더라도 자신만의 미감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선별했고, 사진 촬영 후 현상의 과정에서도 자신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작품을 찾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감각을 연마했다.




"존재했던 모든 생명체는 부패하고 사라지고 재생되고 순환한다. 그리고 그 시간과 삶이 지나간 자리에는 상처와 흔적이 남는다. 나는 이 자국들을 더듬어 의미를 찾아내고 싶다. 단순한 풍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하는 우주와 생명의 흔적을 발견하고 싶다. ...... 나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최소화하면서 렌즈 너머로 펼쳐진 화폭 안에 시적인 함축을 담으려 한다. 생명의 숨소리가 들리는 순간들에 인위적인 파격을 가하지 않고 스트레이트하게 찍지만, 오히려 추상에 가까워진 단순화된 이미지 속에는 더 깊은 공간과 많은 이야기와 흔적들이 담긴다."

-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컬처그라퍼, 2014)





















그는 대학에서 경영을 전공했지만 미술과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덮어둘 수 없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생이라는 이방인의 신분,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감,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요소를 발굴하고 탐색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 고군분투했다. 그 과정을 견디며 자신이 뜻한 대로 삶을 끌고 나갈 원동력을 구하지 않았을까. 누가 뭐라든 하고 싶은 일에 투신하고 끝까지 버티어 내면서 자신의 삶에 ‘사진’이라는 길을 내었을 것이다.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 자리를 잡기까지 어려운 시간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돌파해 낸 시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든 상황에서도 사진 작업을 계속하면서 꾸준히 새로운 창작을 시도했고 다양한 재료와 사진을 접목시켜 자신의 작업을 예술로 자리매김시켰다. 여러 장의 사진을 콜라주 하거나 직물이나 실로 연결하면서, 자신이 흥미를 둔 대상을 연작으로 촬영하면서 그만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예술가라면 어떻게 자기 분야라는 걸 개척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을 파고들어 확장과 도전을 지속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전시였다.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 내는 일"

<데미안>, 헤르만 헤세





구본창이라는 사람이 ‘사진’으로 자신만의 박물관을 짓기까지 그 원동력에는 ‘호기심’이 있다. 자신을 사로잡는 사물에 대한 끝없는 관심, 수집과 탐닉. 자신의 감(감정이나 느낌, 생각)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그걸 좇고 탐구했던 과정이 그를 만들었다. 예술가라면, 창작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그처럼 자신의 직관을 믿고 따라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만의 무엇, 그만의 작품을 얻는 방식일 테다. 나의 시선이 이끄는 방향을 의심하지 말고 하염없이 따라가 보기. 누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게 좋은 것, 나를 흔드는 대상에 순전하게 이끌리기. 그렇게 보낸 시간과 노력만이 나만의 세계를 쌓는 벽돌이 되어 줄 것이다. 그의 삶을 톺아보며 무언가를 창작하려는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고심했다. 





나를 흔드는 것을 향해, 오직 나만 알아채는 신호를 따라 하염없이 이끌리고 있는가? 그런 자신을 믿어줄 수 있는가? 스스로를 의심하던 자신을 다잡아 보는 질문을 얻었다. 그러니 다시, 나를 파고들어 더욱 날카로워지기. 자신의 감각을 믿는 대신 고유한 신호를 얻을 때까지 연마하기, 뾰족해지기. 그런 주문을 외워본다.





다시 시작하기 좋은 3월이다. 욕심을 내지 말고 매일 한 걸음. 제자리걸음인 듯 나아가는 일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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