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바람 Apr 09. 2024

삶은 상실의 언덕 위에 세워진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 past lives>를 보고






초등학생 둘이 언덕길을 오르는 장면에서 시작해, 12년이 훌쩍 지나 모니터 속 작은 창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연락을 기다리며 들떠 오르고, 연락을 놓치고 기다리다 풀 죽는 모습을 지나. 각자의 시간을 살다 12년 후에 다시 재회했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벅차오르는 두 사람.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하는 영화의 매 장면에 깊숙이 빠져들어 주인공들의 내면을 비추는 서울과 뉴욕의 풍경을 보고 음악에 젖어드는 사이, 내 안에서도 지나간 삶들(past lives)의 조각이 낚아 올려졌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 Past lives> (셀린 송 감독, 그레타 리(나영), 유태오(해성))는 삶에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떠올리게 한다. '이민자'의 삶을 다루지만, 모두가 삶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감내하는 게 있고, 그에 합당한 것을 버리거나 포기해야 하니까. 우리가 얻은 것은 버린 것들의 언덕 위에 세워지지만, 얻은 것으로 지은 삶이라는 건축물조차 언젠가는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삶의 본질은 획득이 아니라 상실이다. 삶은 잃는 일, 잘 떠나보내는 일로 완성되는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들은 어떤 관계일까?”


늦은 밤 뉴욕의 바에서 두 명의 남자와 둘 사이에 앉은 한 여자가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한 목소리가 묻는다. 저들은 어떤 관계일까, 누가 연인이고 누가 친구일까. 그다음 카메라는 어딘가 먼 곳으로 이동한다. 과거의 서울, 어딘가로.







초등학교 5학년인 나영과 해성은 한 반에서 일 이등을 다투는 사이. 줄곧 일등을 하던 나영이 해성에게 밀려 이등을 하고 만 날, 나영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그런 나영을 해성이 쫓아가 달래 준다. 서로 경쟁하며 곁에 머무는 사이 의지도 하고 호감도 쌓인다. 나영이 갑작스레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화 난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해성. 그렇게 둘은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다.


12년이 지나 작가 지망생이 되어 뉴욕에 입성한 나영(노라 ; 나영의 영어 이름)은 우연히 SNS에서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음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인터넷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며 다시금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는다. 하지만, 12년의 시간이 가져온 변화와 서울과 뉴욕이라는 거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각자의 현실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은 둘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지 못하고, 아쉽게 연락은 끊어진다.


나영은 작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레지던시에 머물다 아서를 만나 결혼하고 해성 또한 중국 어학연수에서 여자 친구를 만난다. 어린 시절 서로 좋아했던 두 사람이 12년 만에 우연히 연락이 닿았지만 관계는 쉽게 지속되지 않는다. 인연인가 싶었는데 아닌 걸까. 영화에서 나영은 아서에게 ‘인연’에 대해 설명한다. ‘옷 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고. 인연이란 사람들 간 관계를 맺어주는 섭리나 운명 같은 것으로 불교의 윤회 사상에서 유래했다고.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은 전생에서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고, 깊이 맺어지는 관계는 8천 년이라는 시간이 겹겹이 쌓여야 가능하다고. 8천 겁을 지나 이어지는 관계, 그걸 인연이라고 한다.


나영과 해성 사이 인연의 끈이 이어진 듯 보였지만 나영은 아서와 결혼하고 뉴욕에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나영의 운명, 인연의 끈은 어디선가 해성이 아닌 아서에게로 변경된 게 아닐까. 어쩌면, 해성이 아닌 아서와 연결될 운명이었던 건 아닐까. 한국에 태어나 누구나처럼 한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운명의 경로를 벗어났던 순간, 캐나라로 그리고 또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가던 매 순간, 나영의 인연은 새로운 상대를 향해 운명의 항로를 변경해 버렸는지 모른다.







또다시 12년이 흘러 해성이 뉴욕으로 나영을 만나러 온다. 나영은 아서와 결혼해 극작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해성은 결혼 문제로 여자 친구와는 잠시 휴식기를 갖은 상태.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한 나영과 해성 사이 묘한 기류가 흐른다. 반가움과 아쉬움, 애틋함과 안타까움,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두 사람의 표정은 흔들린다. 해성을 만나고 돌아온 저녁, 두 사람의 이력을 아는 아서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묻는다.


“이 삶에 만족해?”

“이게 내 삶이야.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나영 앞에 등장한 해성은 어린 시절의 모습을 지닌 채 어엿한 성인으로 남성적인 매력을 풍긴다. 하지만 나영은 안다. 그가 지닌 그 모습이 지나치게 ‘한국적’이라는 걸. 살아온 시간과 환경이 조합되어 그라는 사람을 빚었으므로. 한국적 정서와 사고방식, 관습과 문화, 그 모든 것의 복합체가 ‘해성’이라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나영이 단지 ‘한국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말에는 복잡하고도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가부장제와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 외아들이라는 해성의 위치와 그로 인한 가족 내의 역학과 관계, 뉴욕과 서울이라는 선택지, 두 사람이 더 일찍 만났더라면 맞추었어야 할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까지... 어느 시점 나영이 해성과 연결되어 그와 함께 하는 인생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나영과 뉴욕에서의 삶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24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의 앞에서 잠시 찬란하게 빛난다. 잃어버린 영혼의 반쪽을 되찾은 듯 서로의 빈 부분을 채워 환해진다. 나영에겐 잃어버린 유년, 그녀 안에 버리고 떠나왔던 어떤 정체성의 빈자리. 해성에게도 누군가를 떠나보낸 유년, 빠져나가 움푹 파여 채워질 수 없었던 자리. 그 자리는 24년 전, 혹은 12년 전의 형태로 고정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삶을 통해 꾸준히 커지고 빚어지고, 다듬어지고 깎여 나갔다. 서로가 애타게 그리워했던 존재는 24년 전, 혹은 12년 전으로 돌아가야만 유효하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은 만료 기간이 지난 티켓처럼, 손안에 티켓을 쥐고 있어도 서로에게 입장할 수 없다. 빙산이 물 위로 떠올라 드러난 부분보다 바다 밑에 잠긴 부분이 훨씬 더 큰 것처럼 서로가 볼 수 없는 부분에 각자의 많은 삶이 잠겨 있으므로. 24년 전의 어린 나영을 해성에게 남겨 두고 떠나온 거라는 노라의 말처럼, 지금 해성의 앞에 있는 나영은, ‘노라'가 되었다. 나영의 안에 노라의 삶이 채워졌다. 해성 또한 그럴 것이다.  







과거는 지나가지만 사라지거나 지워지는 게 아닐지 모른다. 어떤 시절은 때가 되면 되돌아와 우리의 등을 두드리고는 한다. 흘러가길 바라도 떠나지 않는 끈질긴 시간들이 있다. 그건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피하거나 미화하지도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는 노크가 아닐까. 어떤 시점에는 돌아보며 미워하고 슬퍼하고, 후회하고 애틋해도 하면서, 충분히 아파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응시하며 그때엔 알 수 없었던 감정과 경험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 줘야 한다고. 우리가 이름 불러줄 때 비로소 그때의 나와 시절은 내 것이 될 수 있다. 명쾌한 결론이나 뚜렷한 결말이 없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끌어안아야 떠나보낼 수도 있다. 24년이 지나 어긋난 인연인데도 매듭을 짓기 위해 서로를 만나야 했던 두 사람처럼.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니라 눈을 맞춰야 작별은 가능하다.


유년과 첫사랑, 청춘과 열정, 그리고 방황까지, 떠나고 버렸다고 생각했던 지나간 삶들이 내 안에서 떠올랐다. 모두 지나가버렸다.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너무도 빠르게(fast) 가버렸다. 그 삶들이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 시절 그곳으로 잘 보내주었으니까. 기억의 저장소이자 유년의 언덕, 떠나온 것들이 빼곡히 쌓인 기억의 언덕으로. 언제든 우리는 그곳으로 시절을 만나러 돌아가 볼 수 있다. 우리는 언제든 잃어버린 시간으로 가볼 수도 있다. 버리고 떠나고 그러면서 잃어버렸지만 그 모든 것이 여전히 어딘가에 비밀스레 살고 있어서. 눈앞의 장면이나 한 소절의 음악, 책과 영화, 그림을 통해 우리는 시간 여행을 떠난다.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일순간 사라진 기억을 풀어내는 요술 램프 같은 게 있다. 그런데 그곳은 삶에서 무언가를 잃을수록 풍성해진다. 잃을수록 채워지는 기억이라니. 그래서 상실은 아프지만 아름다울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해성과 헤어져 돌아온 나영(노라)은 아서의 어깨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린다. 지나간 삶들이 한순간 나영에게 덮쳐왔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기 위해 버리는지도 모르고 떠나왔던 시간들이. 어쩌면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유년과 청춘의 시간,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달리느라 감내하고 포기해야 했던 시절이. 성취했다고 생각했던 이 삶이 실은 상실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는 걸 그제야 마주했는지도 모른다. 상실이라는 언덕에 쌓여 있는 어떤 시간들이 후드득 떠올라 그녀를 세차게 두드렸을 것이다.


결혼하고 남편과 처음 간 해외 여행지가 뉴욕이다. 영화 속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며, 허드슨 강변과 자유의 여신상 근처를, 고층 빌딩의 불빛이 수놓은 거리를 다시 걸었다. 지금의 나와 같으면서 다르기도 한 나를 그곳에 남겨 두었는데.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사람과 같으면서 또 다르고. 그때의 우리와 이후의 많은 경험을 겪어낸 우리는, 각자의 시절에 충실해 제각각 아름다울까. 무언가는 잃으면서 무언가를 얻는다. 그러므로 살아낸 것으로 무엇이 된다. 우리는 머물지 않고 잃고 얻고, 덧붙이고 닳으면서 무엇이 되어 간다. 나영이 노라가 되고, 소년 해성이 어른 해성이 되듯이. 그것이 삶이 건네는 아픔이자 기쁨이기도 하다는 걸, 가슴 뻐근하게 끌어안는다. 잃은 것으로 찬란한 지금이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운명을 찾아, 끝없는 항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