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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쿠키에 꽂힌 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마카롱에 꽂혀 베이킹 스튜디오를 차렸던 사람입니다만,

by 춤추는바람



“엄마 내가 꼭 만들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딸아이와 베이킹을 하기로 한 날. 마카롱을 만들기로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이가 우물쭈물하며 아이패드를 내민다. 스크린 속엔 거북이 모양 쿠키가 있다.


“그럼 네가 영상을 보고 재료랑 만드는 방법을 확인해 봐.”

“알았어!”


아이는 금세 메모지에 재료와 분량을 적고 만드는 방법을 숙지해 온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해줄 일은 수납장에서 재료를 꺼내고 보조를 맞춰주는 정도.


아이가 무언가에 꽂혔을 땐 대체로 거기 맞춰주는 편이다. 가능하다면 시도해 보라고 격려한다. 접혀 있는 종이쪽지라면 펼쳐보면 좋겠고, 닫힌 문이라면 열어보면 좋겠다. 넘어지더라도 달려 나가 보고, 울게 되더라도 부딪히며 배워 보길 바란다.


삶은 두꺼운 백과사전처럼 우리 앞에 놓이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자주, 많은 장을 펼쳐보는 게 좋지 않을까. 펼치면 새로운 장이 놓이고 몰랐던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거기서 끝까지 파고들지 않는데도 괜찮다. 또다시 다른 장을 펼칠 수만 있다면. 다른 곳으로 넘기면 낯선 세계가 다시금 시작될 테니까.


마카롱에 꽂혔다가 베이킹 스튜디오를 냈다


마카롱.jpg 마카롱에 꽂혔던 때, 열심히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던 마카롱


한때 마카롱에 꽂힌 적이 있다. 작고 동그랗고 알록달록한 것이 어찌나 예쁘던지. 맛보다 생김새에 꽂혀 날마다 그걸 만들었다. 마카롱은 동그란 꼬끄 두 개 사이에 크림이나 잼, 가나슈 등을 채운 쁘띠 푸르(작은 사이즈의 디저트)다. 꼬끄는 머랭(달걀흰자에 설탕을 넣어 휘핑한 것)에 아몬드 파우더와 슈거파우더를 섞어 만든다. 그래서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디저트이기도 하다.


머랭에 아몬드 파우더를 섞는 과정을 마카로나주라고 하는데 마카로나주를 과하게 진행하거나 부족한 경우 속이 비거나 표면이 매끈하지 않은 꼬끄가 만들어진다. 제대로 팽창하지 않아 옆으로 퍼져버리기도 하고. 적당한 마카로나주 상태를 찾기 위해 반죽 표면의 윤기와 점성도, 반죽을 휘젓는 손의 감각을 활용한다. 그러려면 여러 번 연습해 감을 익혀야 한다.


꼬끄 만들기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무수한 연습이 필요하다. 속이 꽉 찬 상태의 잘 부풀고 표면이 반질반질한 꼬끄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 법. 회사에 다니던 때라 일찍 퇴근한 날이나 주말이면 어김없이 오븐을 켰다. 반죽이 오븐에서 구워지는 사이 꼬끄가 제대로 나올까 설렘과 걱정 사이를 오가며 기다렸다. 여러 날 속이 빈 꼬끄, 표면이 찌그러진 꼬끄가 나와 속을 앓았다. 실패할수록 더 매달렸다. 작고 동그랗고 알록달록한, 완벽한 꼬끄를 굽고 싶어 안달했다.


최적의 마카로나주를 위해 매의 눈으로 반죽을 들여다보고 오븐 앞에서 지켜보며 온도와 시간을 점검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 끝에 속이 꽉 찬 꼬끄 만들기에 성공했다. 그러고도 색이 더 곱고 모양이 완벽한 마카롱을 만들고 싶어 계속 도전했다. 잘 구워진 마카롱은 남편과 친구들 손에 들려 남편 회사 동료들과 친구의 친구들에게 건너갔고 “파는 것보다 맛있어.” “너무 예뻐서 못 먹겠다.” “어디서 샀어?”라는 후기로 돌아왔다.


연습을 거듭하면 원하는 경지에 도달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된 그때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을까. 파는 것만큼 맛있다고, 판매해도 되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은 가게에 대한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제과를 전문적으로 배운 상태는 아니었는데, 마카롱만 파는 작은 가게라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나는 인생이라는 책의 완전히 새로운 챕터, 예상치 못한 페이지를 펼치고 있었다. 날마다 마카롱을 굽다 보니 거기서부터 온갖 아이디어가 피어올랐다. 매일 보는 마카롱 모양으로 손수 로고를 디자인하고 가게 이름을 지었다. 틈틈이 내부 인테리어까지 고민하며 없던 미래를 그려나갔다.


회사에 다니는 와중에 온갖 궁리와 딴생각에 빠져 있던 셈인데 그 ‘궁리’와 ‘딴생각’이 현재를 뜻밖의 미래로 이었다. 속이 빈 꼬끄에 실망해 굽고 또 굽던 날들이 현실에 없던 문을 그린 셈이다. 회사에서 고비를 만났을 때 내 안에 쌓인 ‘궁리’와 ‘딴생각’이 없었다면 퇴사와 제과 학원 진학이라는 선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궁리와 딴생각이 모여 새롭게 펼쳐지는 삶


마카롱 가게에서 선로가 변경되어 베이킹 수업을 하는 스튜디오를 열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스튜디오를 열고도 즐거움만큼 실망과 실수도 잦았지만 거기서도 미래를 향한 다음의 문을 그려나갔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베이킹보다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과 수업 후 시식하며 사람들 이야기 듣는 일이 더 좋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날마다 아침 9시면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수업을 위한 재료를 계량했는데 그 시간이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 같았다. 홀로 하루를 위한 바탕을 준비하는 시간엔 어제의 슬픔과 괴로움이 잊혔고 오늘을 위한 깨끗한 마음이 떠올랐다. 수업을 마치면 수강생들과 둘러앉아 베이킹을 좋아하는 이유와 취미와 꿈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의 꿈 이야기를 듣고 응원하는 게 좋았다. 꿈과 꿈이 연결되는 상상으로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랬던 경험이 지금도 아침의 첫 일에 성의를 기울이게 한다. 홀로 깨어 책상 앞에 앉아 시 한 편을 필사하고 짧게라도 일기를 쓴다. 어제에 매듭을 짓고 오늘을 위한 깨끗한 종이를 펼친다. 그 위로 이야기와 이야기를 연결해 글을 써나간다. 누군가의 삶을 응원하고 이곳과 저곳을 잇고 싶어 계속 쓴다. 지금 하는 온갖 궁리와 딴생각은 나를 어디로 이끌까.


IMG_9100.JPG 아이가 만든 거북이 쿠키


귀여운 거북이 쿠키가 완성되었다. 아이의 따스한 손에서 쉽게 반죽이 질어져 성형이 어려웠다. 구워진 쿠키의 절반 이상은 모양이 허물어졌지만 네댓 개는 아이가 원하던 대로 예쁘게 구워졌다. 한 번쯤 만들어 보고 싶던 걸 해본 뒤 아이에겐 어떤 생각과 기분이 떠올랐을까? 오늘의 경험은 내일의 아이에게 어떤 마중물이 되고 있을까?


아이 앞에는 새것 같은 백과사전이 있다. 다양한 카테고리가 담긴 삶이라는 책. 아이는 한 챕터를 거듭 펼칠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어나가거나 내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펼칠지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 책을 적극적으로 탐험하면 좋겠다. 여러 번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최애 책처럼, 삶에서도 살고 또 살아 새로운 것을 발견하길.


펼치고 펼쳐도 끝없이 펼쳐지는 게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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