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들렌과 피낭시에, '갸또 드 보야쥬'에 깃든 기쁨
그림 앞에 서자 제주의 바람이 불 것만 같았다. 그림 작가 곽명주의 개인전 <바람의 휘파람, 풀의 춤>(알부스 갤러리, ~10월 19일까지)에서다. 2020년 제주에 정착한 그는 철마다 아름다움을 지어내는 자연에서 경이로움을 느꼈고 그걸 자기만의 선과 색으로 표현했다. 매끄럽고 유연한 선과 맑은 색채를 지닌 그림이 따스함을 건넨다.
바다 위로 윤슬이 부서지는 광경, 초원의 풀이 바람에 원호처럼 기우는 모습, 커다란 나무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숲, 화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파랗게 맑은 하늘.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서 잔잔하고 고요한 기쁨이 떠올랐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작가가 지녔을 감정, 그가 그림에 불어넣었을 감정이 내게로 건너왔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림과 나 사이로 홀로 캔버스에 색을 입히는 작가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손바닥만 한 그림 한 장이더라도 그림은 낱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람자 앞에서 그림은 겹을 지닌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뒷모습과 그림, 그림 너머로 펼쳐지는 제주의 자연까지, 시공간이라는 입체를 갖춘다.
그림을 감상하는 건 그 겹을 읽는 일이다. 겹 사이로 오간 것들을 헤아리는 일이다. 그림 앞에서 풀이 기운 방향의 반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움직임과 햇살의 강도와 들리지 않는 소리를 상상한다. 자기 앞의 풍경과 사람, 대상을 골똘히 바라보며 선을 긋고 색을 골랐을 작가의 시간으로 스며든다. 선과 색으로 한 올 한 올 채워갔을 시간. 그림에는 작가가 보낸 시간이 담긴다. 작가가 세상을 사랑한 시간이다.
작은 기쁨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갤러리에서 제공하는 리플릿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랑을 발견했을 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는 작가의 말이 적혔다. 그림에 그려진 하늘과 바다, 풀과 숲, 집과 산과 수영장, 고양이와 새와 말, 수선화와 벚나무, 목련에서 어떤 기척을 느꼈다. 잔잔한 물결처럼, 살랑이는 바람처럼, 봄날의 햇살처럼 내게 온 것.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랑이구나 싶다.
작가는 자연과 일상의 평범한 장면 안에서 사랑과 다정을 찾아 날마다 그림으로 옮겼다. 특별하다기보단 익숙하고 흔한 대상이 그림에 포착되어 더 좋았다. 어딘가 멀리 떠나거나 어렵게 찾아야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라서. 어디서든 작은 기쁨의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전언 같았다. 당신의 발밑과 하늘을 보라고, 당신 곁의 한 사람의 움직임과 가만히 잎을 틔우는 식물에 눈 맞추라고, 거기서 세상이 숨겨 놓은 사랑을 찾으라고 그림이 내게 속삭였다.
전시회를 다녀온 뒤 ‘작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머금고 지냈다. 커다란 무엇을 하기보다 지금 가능한 사소한 일로 나와 타인을 기쁘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사랑은 그런 식으로 자라고 어떤 낙원은 자잘한 기쁨으로 그 영토를 늘린다고.
하루는 공원을 걷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에 두 눈을 감고 귀 기울였다. 하루는 미루어 두었던 주방의 커튼을 빨았다. 하루는 집 안의 식물들에 물을 주고 위치를 옮겨 주었고 하루는 친구를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마다 잔잔하고 고요한 기쁨이 내게 왔으니 귀 기울임, 움직임, 멈춤과 바라봄의 사소한 행위에서 사랑을 발휘하거나 발견했다.
곽명주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음을 확인했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맞추고 잠시 귀를 기울이면 주변의 많은 것들이 ‘작은 기쁨’을 건넨다. 하늘의 구름, 맑은 햇살, 빛과 그림자의 나란함, 참새들의 종종거림, 길고양이의 낮잠, 누군가를 부르는 명랑한 목소리,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
어떤 장면은 모서리가 접힌 책장처럼 우리 안에 남아 잔잔하지만 고요한 기척을 부린다. 무심하던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일상의 대상과 장면, 움직임과 기척, 소리와 스침, 거기 사랑이 숨어 있나 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이 우리 곁에 살 것이다. 커다란 사랑 말고 작은 사랑, 잔향처럼 전해지는 기쁨이라면 언제든 찾고 행할 수 있다.
발견해야 존재하는 사랑, 곳곳에 깃든
명절을 앞두고 무얼 좀 만들어볼까 생각하다 화려한 것 말고 소박한 것, 익숙해서 좋은 것을 고민했다. 큰 힘을 내지 않아도 행할 수 있고, 그런데도 말간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것. 밀가루, 설탕, 버터와 달걀 같은 기본 재료만으로 만들 수 있고 나누어 먹기에도 좋은 메뉴, 구움 과자가 제격이다.
구움 과자는 발효 과정 없이 오븐에서 구워내는 작은 디저트로 마들렌, 피낭시에, 쿠키, 까눌레 등이 여기 속한다. 상온에서 2~3일간 보관이 가능한 과자로 프랑스에서는 여행을 다닐 때 들고 다녔던 디저트라 '갸또 드 보야쥬(Gâteaux de Voyage, 여행용 과자)'로 불렸다.
여행을 위한 과자라니 낭만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동인 선물도 여행이라면 여행. 이름처럼 선물하기에도 좋은 과자다. 과자의 여행은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당신에게서 또 누군가에게로 기쁨을 잇는다.
마들렌에는 레몬 글라사주를 입혀 새콤한 맛을 더하고 피낭시에에는 태운 버터와 꿀을 넣어 깊은 맛을 입혔다. 과자를 굽는 사이 버터 향이 집안을 채웠다. 그 향이 외출했다 돌아올 당신을 가장 먼저 반길 것이다. 향이 품은 기다림을 발견해 당신 안에 작은 기쁨이 떠오를까. 그것이 사랑의 낌새임을 알아챌까.
우리가 서로에게 곁을 내어 주는 건 상대에게 굉장한 걸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잠연히 자신의 삶을 사는 한 사람을 지켜봐 주는 것으로 곁을 나누는 의미는 충분하다. 유난히 고된 하루나 가슴 벅찬 어느 날, 그저 그런 보통의 날들에 돌아보면 당신이 있어 다행스러웠으니까. 곁을 내어 줌으로 마땅한 자리가 생긴다. 한 사람의 자리를 합당하게 해 주기 위해 당신은 거기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잔물결이 되기 위해.
갈색빛이 도는 마들렌과 피낭시에를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놓았다. 전시회에서 본 케이크 한 조각이 든 접시 그림이 연상되었다. 작가의 시선으로 내 앞의 대상을 재응시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랑’이 접시 아래로 숨는다. 숨은 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당신의 시선이 닿을 만큼 멀지 않은 곳이다.
* 모두에게 넉넉하고 편안한 한가위이길 바랍니다.
서로의 곁에서 잔물결이 되시길요.
* [글 굽는 오븐]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다음 연재일은 10월 20일입니다.
읽고 응원해주시는 작가님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