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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식 Oct 16. 2020

생각도 죄가 되나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2020

모처럼 좋은 작품을 만났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영화 제작과 개봉이 밀리고 극장은 닫거나 제한적으로 운영되는 상황이다. <테넷>은 3개월째 스크린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위축되고 심심한 극장가에 배턴을 이어받을 작품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 등장했다.

네이팜탄에 의해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다. 팔에 베트남 민간인을 의미하는 'VNC Female'이라는 꼬리표가 부착됐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군과 싸우던 호찌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프랑스가 마지막 왕인 응우옌을 내세우며 인정하지 않자 나라는 분단된다. 이어 내전이 발생하고 공산주의 진영이 북베트남을 자본주의 진영이 남베트남을 지원하면서 대리전쟁의 양상을 띤다.


그러던 중 1964년 8월 2일 베트남 앞바다인 통킹만에서 미 구축함이 북베트남 해군에게 공격을 당한다. 일명 통킹만 사건이자 베트남 전쟁의 서막이다. 이를 구실로 삼아 미국은 전투병력의 파병을 늘리고 네이팜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와 화학무기인 고엽제를 사용하여 북베트남군을 공격한다.


미군은 1965년 3월 해병대 3,500명의 다낭 상륙을 시작으로 병력을 확대한다. 1968년에는 약 54만 명이 주둔했고 당시 참전 군인의 평균 연령은 23.11세였다. 청년들은 징병제로 모집됐으며 이 전쟁으로 약 6만 명이 전사하고 15만 명이 부상을 입고 그 가운데 2만여 명이 장애를 얻었다.


병력 증강과 동시에 대량 폭격도 진행됐다. 미 공군은 1965년 3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100만 톤의 폭탄과 미사일을 퍼붓는다. 전쟁 기간에 사용한 전체의 양은 700만 톤이다. 이중 네이팜탄으로 민간인의 피해가 컸고, 고엽제는 주민뿐만 아니라 참전 군인에게까지 암과 기형의 고통을 받게 했다.

1966년 10월 26일 미 대통령 린든 존슨(36대)이 베트남 캄란 베이 기지를 방문하여 둘러보고 있다.

당신이 미국 시민이라면 이 같은 전쟁에 동의하겠는가? 친구와 아들, 손주를 베트남에 보내겠는가? 많은 병력과 자원을 투입해도 전장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연일 전사자 수가 늘어났다. 반전 여론도 걷잡을 수 없게 높아졌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이 아닌 국내에서도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베트남전의 전면전을 지시한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의 린든 존슨이다.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인 1968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시카고에서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민주당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미 존슨 정부의 부통령이자 베트남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험프리의 당선이 유력했다.


반전 단체들은 시카고에서 시위를 열 계획을 세운다. 민주당 관계자가 묵는 힐튼호텔 근처에서 메시지를 보낼 의도였다. 각 대표는 시카고 시청에 방문하여 미리 집회를 신고한다. 하지만 민주당 소속 시장 밑에서 일하는 담당자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경찰이 최루탄을 터트린 현장에서 이피당 공동 창립자 제리 루빈(제러미 스트롱)이 동료를 챙기고 있다.

자유로운 표현과 집회는 민주주의의 뿌리다. 미국은 수정 헌법 제1조에서 '종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다. 우리 헌법 제21조에는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됐다.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베트남전을 보면 전쟁을 반대하는 측의 말에 설득력은 있다. 수많은 전사자와 민간인 피해, 그리고 무엇보다 명분이 약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말이 맞고 틀리고는 자유와 별개다. 틀린 말도, 아니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시민의 권리다.


이 나라는, 그 제도와 더불어, 이 나라에 사는 국민들의 것이다. 국민들이 기존의 정부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헌법적인 권리를 이용하여 혁명적인 권리를 사용하여 정부 자체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반전 시위의 대표들은 집회를 강행한다. 경찰이 밤 11시 통금을 공고했지만 공원에 텐트를 치고 공연과 행사를 이어간다. 참석자는 15,000여 명에 이르렀고 민주당 본부가 설치된 힐튼호텔까지 행진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경찰이 진압을 위해 곤봉과 최루탄을 사용하면서 양측 수백 명이 다쳤다.

왼쪽부터 루빈, 애비, 톰, 레니, 보비 실, 리 와이너, 존 프로이스, 데이비드 델린저(1968).

그리고 37대 대통령 닉슨이 취임한다. 여전히 반전 여론이 높은 상황이다. 이때 신임 법무부 장관 존 미첼은 연방 검사 토마스 포란(J.C. 맥켄지)과 리처드 슐츠(조지프 고든 레빗)에게 시카고 집회에 참여한 단체의 대표 8명의 이름을 주면서 기소를 지시한다. 그들에게 폭동을 일으키고 경찰을 폭행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톰 헤이든(에디 레드메인), 레니 데이비스(알렉스 샤프), 애비 호프만(사챠 바론 코헨), 제리 루빈(제러미 스트롱), 데이비드 델린저(존 캐럴 린치), 리 위너(노아 로빈스), 존 프로인스(대니 플레어티), 보비 실(야히아 압둘 마틴 2세) 등이다.


이중 보비 실을 제외한 7명을 '시카고 7'이라고 부른다. 보비 실은 흑인 인권 운동을 펼치는 흑표당의 리더. 그가 시카고에서 연설하고 머무른 시간은 4시간에 불과했다. 거기다 변호인의 조력을 얻지 못한  재판이 진행되다가 다시 무효로 처리되고 그의 판결은 미뤄진다.

보비 실(야히아 압둘 마틴 2세)이 변호사 월리엄 컨슬러(마크 라이런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컨슬러는 이때 재판에서 244건의 법정 모욕죄로 기소를 당한다.

인종차별은 여전히 미국의 불치병이다. 피고인에게는 변호인의 변호와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때 판사 줄리어스 호프맨(프랭크 란젤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직접 자신을 변호하고 증인을 심문하겠다는 보비 실의 요구를 묵살했다. 오히려 보안관을 시켜 폭행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에 쇠사슬을 채웠다.


당시 보비 실을 돕던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장은 체포 과정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석연치 않은 죽임을 당했다. 보비 실의 과거 살인 혐의는 무죄로 드러났다. 52년이 지난 올해 5월에도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경찰의 무릎에 짓눌려 사망했다.


시카고 7의 죄목은 폭동 모의와 선동이었다. 정확히는 랩 브라운 법 위반이다. 검사 측은 흑인 운동가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폭력을 목적으로 주 경계를 넘으면 처벌한다'는 사문화된 조항을 내세워 기소한다. 그렇다면 폭력이 목적인 것을 어떻게 판단할까? 국가의 형벌권이 개인의 생각에 적용되는 게 맞는 걸까?

검사 리처드 슐츠(조지프 고든 레빗)가 검사장 토마스 포란(J.C. 맥켄지)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슐츠 검사는 이피당의 창립자 애비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정부를 증오하나요? 경찰과 대립 상황을 바랐나요? 이게 어려운 질문인가요? 왜 대답을 못 하죠?" 애비는 대답한다. "...... 좀 기다려봐요, 친구. 생각 때문에 재판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서요."


생소하지 않다. 국제사회는 우리의 국가보안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개정 또는 폐지돼야 한다고 권고한다. 국제사면위원회, 유엔 인권위원회는 물론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도 같은 입장을 냈다. 당연하다. 널 때리면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널 때리고 싶다는 생각에 벌을 내린다면 누가 수긍할 수 있겠는가.


사실 시카고 7은 폭동을 모의하지도 폭동을 선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작된 증거와 증언이 쌓이면서 그들의 혐의는 유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극본대로 진행되는 재판이라면 판사가 바로잡고 공정하게 진행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판사 줄리어스 호프맨(프랭크 란젤라)이 재판봉을 두드리고 있다. 매년 2회 시카고 변호사협회에서 진행하는 평가에서 78%가 공정하지 않은 부적격 판사라고 의견을 냈다.

판사 줄리어스 호프맨은 고약했다. 흑인 피고인을 탄압했고 변호인의 선임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검사 측에 유리한 증언만 채택했으며 피고인들의 의견은 뭉갰다.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울 거란 판사가 가장 불공정하고 편파적으로 재판을 진행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권위를 믿는 경향이 있다. 판사도 검사도 경찰도 그 누구도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고 반칙을 행할 수도 있다.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니 그러한 잘못을 관리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판사가 재판을 공정하게 하도록 검사가 기소를 올바르게 하도록 말이다.


시카고 7에 대한 정치 재판이 진행될 때 그들의 모습도 볼만하다. 흔히 진보 진영 내부에서 벌어질 만한 논쟁이 연출됐다. 학생 단체 대표인 톰 헤이든과 히피 복장의 반문화 운동가 애비 호프만은 가치와 현실의 우선순위를 놓고 과격한 토론을 벌인다.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회장 톰 헤이든(에디 레드메인)이 변호사 윌리엄 컨슬러(마크 라이런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톰은 이후 6선 의원을 지낸다.

톰은 세상을 바꾸는 법은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최우선 순위에 선거를 놓는다. 애비는 빈곤, 공정, 평등, 복지 등의 문제는 일단 제쳐놓고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냐고 되묻는다. 결과가 중요할까, 의미가 중요할까. 타협이 필요할까 투쟁이 필요할까. 무엇하나 놓칠 수 없기에 그 대화가 인상 깊었다.


말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미장센이다. 최근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돼 버립니다.'라는 작가 조정래의 발언이 논란이다. 주어와 맥락을 생략해 의도적으로 뜻을 곡해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과 글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진실이 될 수도 있고 상대방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톰은 친구 레니가 경찰에게 얻어맞자 '피가 흐를 거라면 시카고 전체에 흐르게 하자.'면서 시위대를 선동한다. 이 녹취는 검사 측의 증거로 제출되는데 우리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치 경찰을 때리자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사실은 맨 앞에 '우리의'라는 단어가 생략된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영화가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다. 표현의 자유, 말과 글의 오염, 그리고 권위의 배반에 관한 교훈은 검찰개혁, 사법농단, 공수처 설치, 광화문 차벽을 마주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작과 각본을 맡은 애런 소킨이 조지프 고든 레빗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소재가 지루할 거라는 염려는 지워도 좋다. 지적인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만드는데 특화된 애런 소킨이 제작과 각본을 맡았다. <뉴스룸>, <머니볼>, <웨스트 윙> 등 그가 참여한 작품명을 들으면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사실 첫 제작자는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2006년 스필버그는 소킨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 폭동과 재판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본을 소킨에 맡겼으며, 보비 실의 배역에 윌 스미스를 캐스팅하려고 했다.


2007년 미국 작가 협회의 파업과 예산 문제가 생기자 스필버그는 제작을 중단한다. 그러다 2018년 10월 소킨이 감독까지 맡으면서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채용하여 비용을 아꼈고 시카고와 뉴저지 주변에서 주로 찍었다. 그리고 코로나 19 유행으로 파라마운트 픽쳐스의 배급권이 넷플릭스에게 팔린다.


국내에서는 배급을 맡은 M 극장에서 단독 상영 중이다. 다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이라는 평가답게 실 관람객의 호평이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가장 감명 깊은 작품, 테넷과는 다른 의미로 미친 영화라는 댓글은 과찬이지 않다. 넷플릭스 공개는 10/16(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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