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의 발리Bali
자바섬 ketapang에서 발리 길리마눅 항구로
적도와 가깝지만 해발고도가 높아 다른 곳에 비해 연중 서늘한 기온을 유지하는 수마트라의 부키팅기Bukittinggi를 뒤로하고 적도가 관통하는 수마트라Sumatra섬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면 길게 누워있는 자바Java섬이 나온다. 수마트라 섬의 파당Padang에서 수도인 자카르타Jakarta와 역사도시 족자카르타Yogyakarta, 그 섬 끝자락에서 아직도 긴 숨을 토해내는 브로모Bromo 화산과 이젠Kawah Ijen 화산이 있는 자바섬을 떠나 이번 여행의 목적지 발리까지는 국내선 비행기 2회와 배 등을 이용하여 약 2주가 걸렸다.
자바의 동쪽 끝자락 바뉴왕이Banyuwangi시 ketapang항구에서 40여분, 최단 폭이 약 3Km에 불과한 좁은 해협을 건너 발리의 Gilimanuk 항구로 건너오니 시간대가 바뀐다. 인도네시아의 국토는 서쪽 수마트라에서 동쪽의 뉴기니까지 약 5,100km로 3개의 시간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건성으로 훑어봐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릴 거리이다. 실제로 컴퓨터 모니터에 인도네시아 전도를 펼쳐놓기도 수월치가 않다. 인구 또한 만만치가 않아 2017년 통계로 약 2억 6천만 명을 넘어선다.
발리-길리마눅 항구에서 꾸따Kuta
발리가 제주도의 3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발리의 북서쪽에 있는 길리마눅에서 꾸따까지 이렇게 멀 줄은 생각지도 않았다. 길리마눅 항구에서 덴파사르 터미널까지 4시간 이상이 걸렸다. 외길에다 심한 트래픽으로 짧지도 않은 시간이건만 해안도로변에 나타나는 발리다운 풍광은 에어컨도 없는 나이 먹은 버스를 타고 들어온 여행자의 혼을 사로잡아 버린다.
나지막한 담장 위로 주홍빛이거나 이끼가 까맣게 앉아있는 지붕들, 간간히 보이는 알록달록 장식을 해 놓은 이국적인 사원들의 모습, 바다로 경사진, 논둑에 찬 물은 넘어가는 햇살에 붉은빛을 품은 연한 푸딩 같다. 구름까지 닿아있는 야자나무들은 병풍처럼 둘러있는, 짙푸른 바다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감처럼 뻗어있다. 노란색, 분홍빛, 흰색 꽃잎들은 길 위에, 지붕 위에 하늘까지 뿌려져 있다.
발리 덴파사르 응우라 라이 공항이 가까운 Kuta는 발리에 오는 여행자라면 한 번쯤은 머무는 곳이다. 발리에 처음인 나도 역시 꾸따Kuta로 들어왔다. 계절을 타고 뜨내기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썰물처럼 사라지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화려하지만 차갑고 때론 썰렁한 서핑 마을을 상상했다. 하지만 황혼이 내려앉는 저녁나절의 꾸따는 마음을 누이고 싶은 자에게는 충분히 포근한, 초가을 밤을 덮어주는 가벼운 이불 같은 부드러운 공기로 나를 맞아준다.
꾸따에서 3일
어젯밤 발리에 왔다는 들뜬 마음으로 시간을 보낸지라 피곤할 만도 한데 발리의 아침은 가뿐하고 상쾌하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 ‘발리는 낙원이야’ 라고 나 역시 각인되어 있었던 걸까, 정원에 떨어진 캄보자Kamboja 꽃잎마저 이곳이 ‘파라다이스 발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발리는 언제부터 사람들에게 파라다이스로 여겨졌을까. 1924년 식민 지배를 하던 네덜란드 왕립 우편 선박회사가 발리 패키지여행을 시작하면서 발리에 파라다이스 이미지를 덧씌웠다. 발 빠른 발리인들도 그들의 전통문화를 외국인의 눈높이에 맞춰 발전시키면서 지금의 이미지를 만들어 갔다. 1930년대에 시작된 유럽인들의 발리 관광은 90년 가까운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거리에는 중국인 패키지 관광객들을 제외하면 유럽인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인들로 거의 백인들이다.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호텔 앞에 있는 Kuta 비치를 기웃거렸다. 비치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한산하다. 유명세에 비해 특별할 것이 없는 비치는 평범하지만, 거센 파도가 살아있는 길게 펼쳐진 해안선은 시원하다. 이곳은 파도가 높아서 물놀이나 수영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돌이나 산호가 없고 수심이 얕아서 서핑을 즐기기에는 최적이라고 한다.
인도네시아를 무비자로 들어왔으므로 30일간 체류(연장 불가)할 수 있다. 가는 날을 빼면 18일이 남아 있었다. 인생 자체가 여행인 것을, 나는 삶이란 여행에서 쉼표를 찍고 싶어서였을까, 발리와 롬복에서는 그냥 쉬엄쉬엄 살기로 했다. 습관처럼 무엇을 열심히 보러 다니는 것보다는 서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굳이 알려고 하기보다는 보이는 것만 보기로 했다. 르기안과 스미냑 골목길을 하릴없이 배회하거나, 비치워크에 앉아 시원하거나 둔중하거나 화려하거나 심플한 스타일의 언니들을 보면서 멍 때리거나, 남들처럼 호텔 수영장 선 베드에 누워 책 몇 줄을 읽기 전에 잠이 들어도, 모든 것이 내게 허락된 시간이었다. 쉼표가 필요해!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 6월, 여행을 준비하면서 발리에서 택시 가이드를 한다는 Made Santo 씨를 sns에서 만났다. 내가 8월에 발리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탄성을 지으며 아름다운 발리의 8월을 이야기했다.
“Agustus Good Weather in Bali!
many wind and little cold in the night
You can see kite in the sky “
낯선 이에게 시 같은 언어를 구사하며 발리를 표현하는 그는(얼굴은 못 봤지만) 내가 만난 최초의 발리인이다. 하지만 발리에 있는 동안 그에게 연락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조금의 자유라도 침해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마음 한편에는 Made Santo 씨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자유롭고 편한대로 호텔 로비에 있는 여행사 부스에서 꾸따 근교를 오후에 서너 시간 잠깐 다녀올 수 있는 택시를 50만 루피아(우리 돈 약 48,000원 정도)에 예약했다.
타만 아윤사원Pura Taman Ayun
힌두의 섬 발리를 느끼기에는 사원만 한 것이 없지 않은가, 지금의 발리 중부 따바난Tabanan 지역을 통치하던 Mengwi왕국 시절의 사원인 타만 아윤 사원Pura Taman Ayun과 타나 롯 사원Pura Tanah Lot을 둘러보기로 했다.
Made Santo 씨가 탄성을 지었던 아름다운 계절인 8월이지만 아침과 저녁을 빼고는 여전히 무덥다. 한국의 여름과는 달리 습하지 않아 그늘에 들어가 있으면 시원한 편이지만 한낮에 건물 밖으로 나가 순도 높은 태양빛을 체험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오후 2시, 발리에서도 여행자 외에는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인 태양의 시간에 호텔 로비에서 자신을 뇨만Nyoman이라고 소개하는 부드러운 눈빛을 지닌 발리니즈Balinese를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버락 오바마를 닮아서일까,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형식적인 인사에도 자상하게 다가오는 진심이 묻어있는지 마음이 편하다. 가는 길에 유심 칩 파는 곳이 있으면 좀 세워달라고 하니 흔쾌히 들어준다. 발리에 와서 놀란 것은 드라이버들은 당연하지만 선물가게나 레스토랑 등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매우 잘 한다. 다만 영국식 발음도 아닌 인도네시아식 발음을 하는지라 조금 신경을 써서 들어야 한다.
낮과 밤을 불문하고 꾸따 지역은 트래픽이 심하다고 봐야 할 만큼 우리를 태운 뇨만의 차는 르기안과 스미냑을 빠져나올 때까지는 거의 서행하는 수준이지만 예쁜 거리 풍경은 오히려 서행이 고마울 정도이다. 꾸따에서 가는 것보다 우붓에서 더 가까운, 타만 야윤 사원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인도네사아에서는 유난히 ‘Taman’이란 단어를 많이 볼 수 있다. ‘Taman’은 정원이란 뜻으로 ‘타만 아윤’은 아름다운 정원이란 뜻이다. 맹위Mengwi 지역에 있는 17세기에 건립된 사원은 맹위 왕국의 호국 사찰로 발리의 대표적인 사원 중의 하나다. 사원 주변의 해자 역할을 하는 연못이 있는 직사각형 형식의 사원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연상케 한다. 사원의 구조는 평화로운 느낌을 갖게 할 만큼 매우 수평적이며 정적이면서도 기품이 있다.
힌두사원에 있는 출입구인 날카롭게 잘린 듯한 모양의 문인 찬디 븐타르Candi bentar는 미학적으로도 대칭을 이루고 있어 충분히 인상적이며 아름답지만 이 문에는 심오하면서도 나름 재미있는 의미가 들어있다. 잘린 문의 오른쪽은 선, 왼쪽은 악을 의미하지만 돌아서 나올 때는 그 반대로 문을 바라보게 된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항상 공존한다는 발리인들의 세계관이다.
찬디 븐(벤)타르Candi bentar를 들어가면 넓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문Kori Agung은 있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화살표를 따라가면 낮은 담장 밖에서 사원을 돌면서 바라볼 수 있다.
사원에는 단발머리처럼 단정하게 깎아놓은 지붕을 이고 있는 메루Meru라고 부르는 탑(혹은 사원) 10개가 보이는데 각각 다른 힌두교의 신들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메루meru는 힌두교에서 우주의 중심인 높은 산을 의미한다.(앙코르와트 중앙의 가장 높은 탑도 메루산을 의미)
타나롯 사원Pura Tanah Lot
거친 바다 위에 꽃처럼 떠 있는 타나 롯 사원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사원이다. 혹시나 일몰시간에 맞춰 사원에 당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타만아윤 사원을 먼저 택한 일정이지만 해가 내려오려면 아직도 멀다. 그래, 우린 언제나 빠르다. 그러면 어떠랴, 물이 쑤욱 빠져나간 넓게 펼쳐진 바위들이 속살을 보이면서 검은 바위 위에 있는 사원까지 길을 내주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이 서있는 곳에 가보니 사제가 성수를 머리 위에 뿌린 다음 이마에 쌀알을 붙여주고 캄보자 꽃을 귀에 꽂아준다. 힌두교 신도만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물이 빠졌을 때 간단한 힌두 의식을 받은 사람들은 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은 16세기 고승 니라타의 권유로 건립한 사원으로 발리인들이 많이 찾는 사원 중의 하나라고 한다. 발리의 거센 파도가 특징인 발리 남쪽 바다를 경험하기에 딱 좋은 곳으로 어마어마한 인도양의 파도는 검은 바위와 사원을 언젠가는 통째로 날려버릴 것만 같다. 실제로 사원 옆에는 해식동굴이 만들어져 있다. 자연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경외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