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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n 12. 2019

깊은 산속의 옹달샘처럼 은밀하고

#7 어쩌다가 '강남수향' , 쑤저우 창랑정滄浪亭


굴원屈原,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전국시대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굴원’의 충성된 마음은(그것도 애국이란 의미가 정립되지 않았던 기원전에 나라사랑이라니) 1,300여 년 이후, 북방의 거란과 서하 그리고 여진으로 인해 힘든 세월을 보냈으며 끝내는 국토를 빼앗겼던 송 대(960년~1127년)에는 더욱 귀감이 되었나 보다. 은일을 꿈꾸며 조성한 쑤저우 전통 원림에는 굴원의 그림자가 몇 가닥씩 드리워져 있지만 宋대의 시인 소순흠이 만든 창랑정과, 청대의 대표적인 원림이지만 송 대에 처음 조성한 원림 망사원은 아예 대놓고 그로부터 천여 년 전 사람 굴원을 그리워한다.




굴원屈原(기원전 343~기원전 278로 추정)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이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초楚나라 사람이다. 점점 강해지는 진秦나라를 중심으로 제나라, 국력이 다해가는 초나라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시기였다. 초나라의 시인이며 귀족인 굴원은 무너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회왕懷王을 도왔으며, 그 아들인 경양 왕頃襄王에게 현인을 가까이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힘을 기를 것을 충언하였지만 친진파의 모함으로 후난 성 동정호 부근으로 쫓겨난다.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시름에 젖어 멱라 강가를 배회하며 시를 읊고 있으니 굴원을 알아본 지나가던 어부는 그에게 이곳에 와 있는 이유를 묻는다.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혼자 맑으며, 모두가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있으니 추방당했다오.”라고 하소연하니, 어부는 “창랑지수 청혜 가이탁오영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지수탁혜가이탁오족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탁하면 발을 씻으면 되리니”로 답했다.    


굴원의 저서 <초사>의‘어부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세상이 깨끗하면 갓끈을 씻어 벼슬길로 나아가고, 그렇지 못하면 발을 씻고 떠나면 될 것 아닌가.” 로 이해되지만, 내 방식대로 다시 생각하면 “세상이 맑으면 같이 맑게 살고, 세상이 탁하면 대충 맞춰서 탁하게 살지 뭘 고민하고 슬퍼하냐”는 답가이다. 결국 그는 5월 5일 후난성 멱수汨水에 돌을 껴안고 몸을 던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굴원의 시신을 찾기 위해 그가 투신한 강을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먹지 못하도록 징을 치고 북을 울리면서 배(용주)를 타고 다니면서 샅샅이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굴원의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물고기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찹쌀을 대나무 잎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  

중국에서는 그날을 기억하며 지금까지도 용주 경기를 하며, 찹쌀밥을 나뭇잎에 싼 쫑즈粽子를 먹으며 굴원을 기린다. 그가 죽은 5월 5일은 우리가 아는 단오의 기원이다.   


외부와 닿아있는 창랑정 앞을 흐르는 물길, 소통의 상징이다.

창랑정滄浪亭 

   

창랑정滄浪亭은 1045년 송 대에 소순흠이 조성한 쑤저우에서 가장 오래된 원림이며 쑤저우의 4대 원림이다. 이후 쑤저우에는 창랑정을 모델로 하여 졸정원과 퇴사원 등 셀 수 없이 많은 원림들이 만들어진다. 카이펑 사람 소순흠蘇舜欽(1008~1048)은 정계에서 밀려난 뒤 떠돌아다니다가, 쑤저우의 남쪽 오월吳越 시대 왕족의 거처가 있던 자리를 4만 전에 사들여 원을 꾸몄다.  

   

창랑이란 푸른 물, 또는 큰 바다의 물결이란 뜻이다. 그는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창랑’에서 원림의 이름을 취했으며, 자신의 호까지 창랑옹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처지를 반대파에 밀려 강남으로 쫓겨난 초나라의 굴원에 빗대어 동일시했던 것 같다. 원림의 북쪽에 흐르는 물길과 남쪽에 펼쳐진 대나무를 마음에 들어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 4년 동안 창랑정은 그의 창작의 산실이 되었다. 송 대 문학의 한 획을 긋는 그의 작품들은 매요신과 함께 그를‘소매蘇梅’라고 부르며 회자되었다.  

 

월량문 밖 아름다운 누창
소순흠이 좋아하던 창랑의 물길 위로 놓인 곡교, 곡교는 쑤저우 원림에서 전통이 되었다.
원림이 끝나는 길가에 면한 수공간에 떠 있는, 소순흠을 떠 올리게 하기에 충분한 배 한 척


남송시대에는 한세충이 소유했으며 원과 명 청대에는 사찰로 사용되다가 강희제 때인 1696년에 송략宋荦(1634~1713)이 구입하여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의 손으로 들어간 원림은 화마로 훼손되기도 했지만 1873년에는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어쩌다 보니 창랑정의 입구로 들어오지 못하고 원림에서 높은 편인 동쪽 끝 쑤저우 미술관 쪽으로 들어왔다. 원림의 뒤로 들어와 입구 쪽으로 내려오는 격이니 마치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분이다. 회랑은 지형의 구부러진 곡선을 따라 이어지고 100여 개가 넘는 멋진 화창(누창)은 회랑을 따라 이어진다. 쑤저우 원림에 하나같이 차용된 회랑과 아름다운 누창은 이곳에서 온 것이다.  

   

깊은 산속의 옹달샘 같은 연못 주위로 회랑이 둥글게 감싸고 누창은 연못속에서 별빛처럼 빛난다.
창랑정에는 대나무가 많다.


물가에 있어야 할 창랑정은 높은 언덕 위로 옮겨져 아름다움을 잃었다. 여기저기 들어앉은 건축물은 청대에 만들고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의 전체적인 지형과 수공간은 송 대에 조성된 구조를 간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원림을 조성한 소순흠이 기록한 창랑정기가 남아있는 것이 송 대를 대표하는 원림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연못은 깊은 산속의 옹달샘처럼 은밀하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표현된 수공간의 위치도 자연스럽다. 더욱이 원림 입구 길가에 면한 자연적인 수로는 열린 소통의 공간이며, 창랑沧浪이라는 이름과도 어울리는 풍부한 물길이다. 천 년 이상의 시간으로 인해 높아진 지층 때문인지 창랑정 입구는 현재의 길보다 현저히 낮다.     


높은 담장으로 막아 그들만의 선산(신선들이 사는 땅)을 형성했던 평지에 있는 다른 원림과는 다른, 선이 굵은 묵직함이 신선하다. 오르막이 많은 한국에서 살던 내게 쑤저우의 다른 곳에 비해 꽤 높아 보이는 지형도 정겹다.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한국의 원림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닮아있다. 현대식 인피니트풀이 연상된다.


“세속을 따라가지 않기가 정말 힘들었다.” 옌원량顔文樑  

  

통리를 다녀온 날 오후, 통리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돌아오다가 지도를 보니 내리려고 생각한 三元坊역보다 南門역이 창랑정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난먼 역에 내려 가오더 지도를 보면서 찾아 올라가니 내비는 골목으로 안내한다. 이정표는 맞는데 매표소를 찾아도 없다. 쭈뼛거리며 우왕좌왕하니 관리인 한 사람이 나오더니 그냥 들어가란다. 40위안이나 30위안 정도는 할 텐데, 돈 받을 생각도 안 한다. “창랑정이 아닐지도 몰라”생각하면서 일단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창랑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오니아식 주랑이 시원하게 뻗어있는 신전형의 어이없는 건축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살펴보니 쑤저우 유화원, 옌원량 기념관이라고 쓰여 있다. 예전에는 쑤저우 미술전문학교蘇州美專 건물이었다. 그 앞에는 소박한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서양화가 옌원량顔文樑(1893~1988)이다.     


우리나라의 화가들과 비교하면 세대는 인상파 화법을 위주로 표현하는 근대화가에 속한다. 아무리 화가들을 귀하게 여기는 쑤저우지만 동상까지 세워 놓다니, 게다가 옌원량은 그들이 좋아하는 전통 문인화가가 아니지 않은가. 그를 모르는 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쑤저우 유화원, 옌원량 기념관 명패와 그의 동상


김명호의 저서 <중국인 이야기> 1권 P354, P356에 의하면 옌원량은 전통 중국화의 산실이었던 쑤저우에서 서양화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며 쑤저우미술전문학교蘇州美專를 세운 사람이다. 1927년 시정부에 의해 창랑정 안에 쑤저우 미술관을 설립했으며(이때만 해도 창랑정은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쑤저우 부자들의 기금으로 가장 오래된 전통 원림인 창랑정 안에 그리스 식 건축물이 들어섰다. 중일전쟁 때는 일본군의 사령부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94세까지 약 80년간 그림을 그려온 위대한 화가는 1988년 긴 잠에 들어갔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마지막 말에 경의를 표한다. “예술가는 속俗돼서는 안 된다. 세속을 따라가지 않기가 정말 힘들었다.”  


화집을 보기 전에는 그의 그림을 찾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하나 찾은 가볍게 그린 풍경화는 중국 수묵 전통화의 기법이 가미된 공간을 많이 살린 오일페인팅이라고나 할까, 재료는 서양화 재료지만 중국식 정서의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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