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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타타르의 요새, 카잔 크레믈

# 러시아 - 카잔 2

by 그루


아름다운 타타르의 요새, 카잔 크레믈과 이반 4세


카잔은 볼가 강과 카잔카 강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오래된 교역도시로 카잔 요새는 튀르크족인 볼가 불가르의 전통 요새였다. 이반 4세(1530~1584)가 벼르고 별렀던 카잔 정벌은 난공불락의 요새에 막혀 두 번이나 실패하지만, 1552년 이반 4세는 총과 150여 대의 대포와 폭약을 이용해 성벽을 무너뜨리면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점령자들이 그렇듯이 대다수의 주민들은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도시에서 멀리 추방되었다. 제방과 해자 그리고 성벽으로 요새화 된 타타르(튀르크)의 카잔 요새가 있던 자리는 루스의 건축가 포스트니크 야코블레프Postnik Yakovlev와 타타르의 건축가 이반 시랴이Ivan shiryai에 의해 초기 타타르 요새를 본뜬, 루스(러시아)식 흰색 성채로 바뀌었고(1556~1562), 파괴된 모스크 옆에는 정교회가 들어앉았다.

흰색은 세계 어디에서도 가장 즐겨 사용하는 색 중의 하나이다. 순수한 것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고대에는 여러 지역에서 신(God)을 표현하는 색으로 사용되었다. 모스크바 크레믈도 원래는 흰색 성벽이었으나 현재의 붉은색으로 바뀌었으니, 모스크바 크레믈을 본떠 만들어진, 어쩌면 카잔 크레믈의 성벽이 모스크바 크레믈보다 러시아 성채의 원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타타르 요새 형태가 그대로 살아있는 곳으로, 이로 인하여 볼가 불가르 당시의 도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성채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카잔 크레믈은, 모스크바 강변 외에는 다른 건축물로 인해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모스크바 성채보다 시야가 시원하고 아름답다.

타타르 요새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루스의 전통적인 흰색 성벽의 크레믈을 만들었다.
크레믈 성벽


카잔 함락은 이반 4세에게 얼마나 고대하던 숙원이었는지, 그는 카잔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1560년경 모스크바에, 카잔 크레믈을 디자인한 포스트니크 야코블레프를 시켜 누가 뭐래도 러시아의 상징이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성 바실리 성당St. Basil's Cathedral을 만들었다.

이후 이반 4세는 여세를 몰아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을 점령했으며, 볼가강은 물론 카스피해를 포함한 남부를 차지하고, 시비르 칸국(시베리아의 이름이 유래)을 점령하면서 점차 동부와 시베리아로 현재와 같은 영토를 넓혀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폭군으로도 이름이 높은 이반 4세였지만 그는 러시아 역사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큰 획을 그은 군주였다. 그는 귀족들인 보야르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최초로 강력한 차르의 전제 권력을 만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약 240여 년에 걸친 몽골 타타르의 족쇄를 걷어냈으며, 현재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가능케 한 러시아(루스)의 진정한 차르였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상징, 이반 4세가 세운 성 바실리 성당St. Basil's Cathedral, 카잔 함락을 기념하여 세웠다


크레믈 안에는 타타르스탄 대통령 관저를 비롯한 관공서와 박물관 및 카잔을 대표하는 모스크와 교회 등이 들어서 있다. 10세기경 볼가 불가르 시대의 흔적과 카잔 칸국의 유적, 그리고 16세기 이후 지어진 러시아 건축 등의 문화유산이 농축되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사원인 쿨 샤리프Kul Sharif는 성 밖에서도 흰색의 성채와 어우러져 가장 눈에 띈다. 카잔 크레믈 안, 오른쪽에 있는 정교회의 파란색 돔과 구분하기 위해서였을까, 크레믈 안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모스크의 하늘색 돔은 순전해 보인다. 모스크는 이반 4세의 점령으로 파괴되었다가 2005년 카잔 1000주년을 기념하여 완공되었다. 파괴 당시 돔과 미나렛, 유르트 형식을 본뜬 튀르크식 모스크의 모양을 기본으로 하여, 오스만 양식을 더해 현대식으로 건축한 모스크는, 모스크와 함께 유명을 달리한 이맘 쿨 샤리프Kul Sharif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였다. 금요일 예배시간이나 혹은 특별한 예배시간이 아니라면 누구나 들어가서 볼 수가 있다.


쿨샤리프 모스크


아름다운 파스텔톤의 타타르스탄 대통령궁과 같이 있는 슈움비케탑은 벽돌탑으로 쿨 샤리프와 함께 성 밖에서 가장 잘 보인다. 3층까지는 사각형이며 윗부분은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7층 탑이다. 타타르의 왕비 이야기가 서려있는 탑은, 언제 세워졌는지(16세기, 17세기, 혹은 18세기, 이반 4세의 카잔 점령 후 150여 년이 지나서 세워졌다고 한다) 의견이 분분하다. 피사의 사탑처럼 약간 기울어진 탑은 기반 탓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는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카잔 점령 후 이반 4세가 카잔 칸국의 마지막 황후 슈움비케에게 청혼하니 그녀는 일주일 안에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탑을 세워달라고 청했다. 왕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일주일 만에 만들어진 탑 위에 올라가 아이와 함께 뛰어내렸다.’고 하는 잔인하기까지 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몇 년 후 Kasimov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여성에게 잔혹한 올가미를 씌운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 것이다.

성 수태고지 성당

크레믈 Kazan Kremlin 입구 왼쪽에 쿨샤리프 모스크가 있다면 오른쪽(동편) 중앙 뒤편에는 하얀 외벽에 별이 반짝이는 푸른색 양파 모양의 돔이 있는 성수태고지 정교회가 있다.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는 우스펜스키 사원과 비슷한 구조로 만든, 크레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에 속한다. 이반 4세가 1562년 건축한 교회는 1918년 볼셰비키 혁명 군대에 의해 다섯 개의 돔이 파괴되었으며, 돔이 없어진 교회는 이후 박물관의 역할만 했을 뿐 오랫동안 예배당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했다. 복원된 이후 2005년부터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이 되었다. 1839년에 교회를 표현한 판화 작품(안드레이 듀란 작)을 보니 교회 앞에는 교회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는 우아한 탑이 서 있다. 아쉬움일까, 1695년에 세우고 1930년 소련 시절에 철거되었다는 5층짜리 종탑은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는 이반 대제 종탑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판화 작품(안드레이 듀란 작), 1839년에 수태고지 성당 앞 종탑이 아름답다. 오른쪽은 붉은 벽돌로 만든 슈움비케 탑
크레믈을 만든 사람들, 슬라브인과 타타르인, 포스트니크 야코블레프는 성 바실리 성당을 만들었다.

정교회 옆 정원에는 카잔 크레믈을 건축한 사람들의 동상이 있다. 야코블레프Postnik Yakovlev와 타타르의 건축가 이반 시랴이Ivan shiryai를 중심으로 프스코프에서 온 장인들과 함께 카잔 크레믈이 복원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들이 쓴 모자를 보니 슬라브인과 타타르인이 구분이 대충 간다.

동상이 쓴 전통 모자를 보고 슬라브인과 타타르인을 구분한 것처럼, 타타르인이 가장 많은 카잔 거리에 나가도 누가 타타르인이고 슬라브 사람인지 구분을 하기가 어렵다.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러시아인 자신들조차도 모른다고 한다. 킵차크 칸국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혼혈이 이루어졌으며, 서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이나 오랫동안 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다양함을 유산으로 지니고 있는 이 땅의 역사는 여전히 지속적이다. 그동안 만났던 러시아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자신들은 아시아인도 유럽인도 아닌 러시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볼가 강 곁에, 천년도 더 된 도시 카잔의 크레믈 쿨샤리프 모스크 위에는 초승달이, 성수태고지 정교회의 푸른색 양파 모양의 돔에는 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쿨 샤리프 모스크의 정면에서
카잔 크레믈의 정문인 스파스카야 탑


카잔 크렘린의 9개의 탑 중에서 정문 역할을 하는 스파스카야Spasskaya탑은 1556년에 처음 세워졌다. Spasskaya는 구세주를 의미하며, 현재는 없지만, 근처에 있던 Spassky 사원(스탈린의 통치기간에 파괴되었다)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탑 앞에는 타타르 시인 무사 잘릴Musa Dshalil(1906~1944)이 철 사슬에 묶인 채 저항하는 동상이 서 있다. 그는 소련 시절 독일과의 전쟁(독소전쟁 : 2차 대전 중인 1941년 6월 22일, 1939년 맺었던 상호 불가침 조약을 깨고 독일이 소련을 침공) 중에 지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처형되었다. 베를린 수용소에서 몰래 쓴 애국 시가 같은 감방에 있었던 다른 나라 포로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그의 저항과 죽음은 소련에서 영웅화되었다. 그의 시 한 줄 아는 것이 없지만, 러시아에서 매년 레닌의 생일인 4월 22일에 과학, 문학, 예술, 건축 및 기술 분야에서 뛰어난 개인을 대상으로 1990년까지 수여된 레닌 문학상을 1957년 사후 수상한 것을 보면, 러시아의 저명한 애국시인임에는 분명하다.

저항하는 무사 잘릴의 동상은, 인간에게 필요한 불을 가져다주고, 카프카스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처럼 보이는 것이, 바라보기에 애달프다. 아무 때나 쓸데없이 불편한 마음은, 시대의 고통에,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소시민적 고해성사인가, 생전 투사였던 그를 영원히 저항하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그를 쉬게 해주었으면 싶다.

카잔 크레믈 정문에 세워진 무사 잘릴 동상. 앞에 보이는 건물은 타타르스탄 박물관이다.


반란의 시대 - 예카테리나 2세와 푸가초프

크레믈 정문 맞은편에는 타타르스탄 국립 박물관이 위치한다. 12시에 오픈하는 것을 모르고 조금 일찍 갔다가 30여분 근처를 배회하다가 들어갔다. 러시아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박물관 시스템은 기대 이상이다.

무엇보다도 박물관 2층에 예카테리나 2세가 카잔에 올 때 타고 왔다는 마차가 전시되어있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푸가초프의 난(1773~1775)이 진압된 후, 18세기 말엽 그녀는 반란군에 의해 불에 타 폐허가 된, 카잔을 복구하고 재건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카잔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약 800킬로미터이고,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도 얼추 비슷한 거리이다. 고속철로 가지 않는 이상 지금도 이곳에서 모스크바까지 열차로는 하룻밤 이상이 걸린다. 예카테리나 2세가 당시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나 혹은 중간 지점인 모스크바에서 카잔까지 왔을 것인데, 예카테리나 2세와 그 많은 수행원들의 여정은 많이도 고단 했겠다. 정치적 욕심만큼 적극적이었던 그녀는 드넓고 거친 땅에서 적지 않은 행보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타타르스탄 박물관 2층에 있는 예카테리나 2세의 마차

그녀는 가장 큰 국토를 만들었지만, 반면에 어느 때보다 크고 작은 반란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국토의 확장과 대외적으로 비친 그녀의 공을 들어 대제라는 호칭으로 부르지만, 그녀의 치세에 속했던 18세기 후반 러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황제와 귀족들만의 시대였고, 귀족을 제외한 대다수 농노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졌다. 당시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은 역사상 가장 큰 농민 반란으로 기록되었다. 그녀의 치세는 반란의 시대였다.


카자크Kazak


1773년 우랄에서 시작된 푸가초프Pugachov 반란(1773~1775)군은 1774년 7월에 볼가 강의 중심도시인 카잔을 점령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반란군의 지도자 카자크 출신인 푸가초프는 예카테리나 2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 중의 하나였던, 그녀가 쿠데타로 축출했으며 죽게 만든 남편, 황제 표트르 3세를 참칭 했다. 그의 목표는 예카테리나 2세의 폐위였지만, 결국 그녀에 의해 푸가초프는 모스크바에서 참수되었다. 참수당할 때 그의 나이는 33세,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의 인생 대부분의 시간은 카자크 용사였다.


러시아의 수많은 전쟁에서 앞장서 조국(러시아)을 지켜냈으며, 반면 수많은 반란을 일으켰던 카자크에 대한 호기심은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카자크Kazak’라는 이름은 자유인, 전사 또는 모험이라는 뜻의 터키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0세기에도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이들이 주요한 세력으로 등장한 시기는 킵차크칸국이 여러 칸국으로 분열하던 15세기부터다. 그중에는 모스크바 대공국과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의 주변 나라에서 지주의 억압을 피하고자 정부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초원지역인 변경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으니 말 그대로 이들은 농노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유를 찾아,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경에 가까운 변경에 모여들었다. 슬라브인을 중심으로 이미 슬라브화가 된 타타르인 그리고 튀르크 인들로 이루어진, 점차 반 자치적인 강한 농민군사공동체 집단으로 발전되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인 카자크에게, 러시아 정부는 세금과 농노에서 제외시키는 대신 국경방어를 맡겼다. 이들은 러시아의 모든 전쟁을 앞장서서 수행했으며, 점차 시베리아 개척에도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 이유로 우크라이나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러시아의 넓게 펼쳐진 국경에는 지금도 카자크 인들이 대부분 거주한다.

이들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은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타라스 불바>와 푸시킨(1799~1837)의 작품 <대위의 딸>이다. 두 사람 동시대를 산 러시아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작가로, 이들은 서로 친분이 두터웠으며, 앞의 두 작품은 오래전에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타라스 불바>는 자포로제 카자크의 원형이 살아있는, 우크라이나의 세치가 배경이다. 우크라이나의 초원이 보이는 것처럼 섬세하고 리얼하게 묘사한 <타라스 불바>를 읽고 나서 진정 고골에 반했다.


푸가초프의 반란은, 푸시킨(1799~1837) 말년의 저서로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대위의 딸>을 탄생시켰다. <대위의 딸>은 표트르 그리뇨프라는 귀족 청년과 대위의 딸 마리야의 연애 소설이지만, 푸가초프의 반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책은 반란을 주도하고 황제를 참칭 한 푸가초프와 당시 황제 예카테리나 2세를 긍정적이며 또한 매우 평등하게 그리고 있다. 19세기 초반 정부의 검열을 심하게 받았던 작가는 말랑말랑한 연애사건을 앞 축으로 두고, 푸가초프의 반란을 배경으로 흐린, 연애소설을 빙자한 꽤나 가볍게 느껴지는 정치소설에 가깝다.

바우만 거리

바우만 거리의 크레믈 지하철역

크레믈(지하철을 탈일이 거의 없지만, 크레믈 앞에는 크레믈로브스카야역이 있다)앞에서 시작되는 바우만 거리는 랜드마크인 꽤 높은 종탑으로 유명한 Epiphany Cathedral을 비롯한 역사적인 건축물들 사이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거리의 이름은 수의사였으며 레닌과 동시대인으로, 순교한 볼셰비키 혁명 영웅 Nikolai Bauman(1873~1905)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천년 이상을 흐르는 역사가 살아있는 도시에는 근대와 현대를 잇는 낯익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발자취도 여럿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레프 톨스토이(1828~1910)와 레닌은 카잔의 자랑거리이다. 톨스토이는 카잔에서 1842년부터 1847년까지 살았으며 1844년부터 카잔 대학에서 3년 동안 수학했다. 또한 레닌(1870~1934, 카잔 남쪽 울리야노브스크에서 태어났다)이 수학하고 생활했던 도시였으니 그를 배출한 카잔은 소련 시절에는 우월하고 칭송받는 혁명 도시였다.

거리를 걷다 보면 유명한 카잔의 고양이상도 서 있으며, 예카테리나 2세가 타고 온 마차의 조형물까지 역사적 상징들을 만날 수 있다.

예카테리나 2세 이전, 카잔을 방문했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는 당시 카잔에는 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의 극성맞은 쥐들을 박멸하기 위해 카잔의 고양이 30마리를 데려갔다고 한다. 이후로 카잔의 마스코트가 된 카잔 고양이 Alabrys는 예카테리나 2세의 마차와 더불어 바우만 거리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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