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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의 땅, 볼가 강이 흐른다

# 러시아 - 카잔 1

by 그루


우랄 산맥의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약 850킬로미터, 밤 10시경 탄 기차는 하룻밤을 달려, 다음 날 오전 11시경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예쁜 카잔 역에 도착했다.

카잔은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공화국The Republic of Tatarstan의 수도이며, 예카테린부르크와 모스크바 사이, 카잔카 강과 볼가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지구의 약 1/6에 달한다는 러시아 대륙에서 몽골과 타타르 인들의 자취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곳은 버젓이 타타르 인들의 땅Tatarstan이라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몽골과 타타르


‘타타르’란 좁은 의미로는 몽골 동쪽 지역에서 살던(한반도와 지역적으로 매우 가깝다), 튀르크 계 부족의 하나이다. 타타르는 10세기 이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몽골과 대립한다. 튀르크와 위구르, 거란과 여진 등 유목민들의 각축장이었던 시베리아를 포함한 거대한 대륙은 1206년 칭기즈 칸에 의해 몽골로 통일되고 몽골의 이웃이며 적이었던 ‘타타르’는 몽골에 흡수된다. 이들을 중국에서는 달단이라고 불렀다. 동쪽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의미하는 타타르는 대부분 좁은 의미의 타타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와 유럽인들이 인식했던 넓은 의미의 타타르는 러시아를 지배했던 킵차크 칸국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까지 유라시아 대륙 중앙과 북쪽에 살던 알타이 계통의 유목민들을 타타르라고 불렀다. 19세기까지도 현재 중국을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에 넓게 퍼져 살고 있는 몽골 및 튀르크계의 사람들, 즉 유목민으로 보이는 족속은 전부 타타르로 생각했다. 이것은 13세기, 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과 관계가 깊다.

칭기즈 칸은 1219년 몽골에서 3000Km 이상 떨어져 있는 호레즘Khorezm을 정벌한 후, 맏아들 주치와 장군 수부타이에게 2만 군대를 주어 호레즘 서쪽 지역인 카스피해 주변을 원정(1221~1223)하고, 수부타이는 킵차크 지역을 지나 몽골로 돌아온다. 이때 주치는 몽골로 돌아가지 않고 킵차크 초원에 남아 드넓은 킵차크 지역을 다스렸다. 이것이 킵차크 칸국을 '주치 울루스'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3년 가까이 이들이 지나온 길은 결과적으로 보면, 십여 년 후 유럽 원정을 위한 정찰이었다.

2대 오고타이 칸 시절인 1236년(혹은 1237년) 한겨울, 칭기즈 칸의 큰아들인 주치의 아들 바투의 7만 병력(병력의 숫자는 지은이마다 다르다. 몽골군은 전략상 전투 병력을 의도적으로 부풀렸기 때문이다.)의 서방(유럽) 원정대는 장군 수부타이와 함께 서쪽으로 향했다. 이들은 킵차크 초원의 튀르크 땅은 물론 리아잔, 수즈달, 트베르 등 러시아 도시국가들을 초토화시켰다. 1240년 남서쪽에 있는 키예프까지 함락되면서 러시아 정복이 일단락된다.


몽골군을 피해 동유럽으로 밀려드는 겁에 질린 러시아 피난민들의 입에서 나오는 두려운 침략자의 이름은‘타타르Tatar’(카프카스의 지하세계(지옥)를 뜻하는 타르타로스와 비슷하다)라고 했다. 1241년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등 중부와 동유럽을 유린한 침략자들을 본 유럽인들과 유럽연합군은 계급이 높은 몽골인들과 대부분 병사들로 이루어진 튀르크 인들을 뭉뚱그려 타타르라 불렀다.


1241년 여러 기사단과 영주, 신성로마제국 등이 모인 거대한 유럽 연합군은 폴란드 레그니차Legnica와, 그곳에서 500Km나 떨어진 헝가리 사요Sajo강 전투에서 거의 동시에 바투와 수부타이의 몽골군에 전멸당한다. 다음은 서유럽이었다. 폴란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을 접수한 몽골군은 서유럽 침공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해 12월, 오고타이 칸이 사망, 다음 칸을 뽑는 회의인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황족들은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오고타이(우구데이) 칸의 사망이 서유럽을 살려준 것이다.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Golden Horde)과 타타르의 멍에


주치에 의해 기초가 다져진 러시아 점령지 킵차크 지역에 세워진 킵차크 칸국(1243~1502)은 적은 수의 지배계층 몽골인과 정착해 살고 있는 튀르크 인들 즉 킵차크, 볼가 불가르, 오구즈 등의 튀르크 인들로 이루어졌다. 주치의 아들 바투(재위 1243~1255)가 초대 칸이 되었을 때, 칭기즈 칸의 유언대로 바투에게는 진짜 몽골인을 4,000명 이상 할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타르가 튀르크를 의미한다면, 그들 자신이 말하듯이, 당연히 킵차크 칸국은 대부분이 튀르크 인들로 이루어진 타타르의 땅 타타르스탄인 것이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스탄으로 끝나는 지역은 대부분 튀르크계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땅이다. 킵차크 칸국이 몽골이 아니라 튀르크, 즉 타타르의 땅인 이유이다.


1253~55년경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인 루브룩은, 프랑스 루이 9세의 명을 받아 몽케 칸이 있는 카라코룸을 가기 위해 볼가 강가에 있는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방문했다. 당시 칸이었던 바투는 천막 안에 있는 금을 입힌 높은 보좌에 앉았는데 천막의 입구의 긴 의자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큰 금잔과 은잔이 놓여있었다. 루브룩의 보고문 때문이었을까, 유럽과 러시아인들은 바투의 킵차크 칸국을 황금 장막이라는 의미의 금장 칸국Golden Horde으로 불렀다.

러시아 각 공국들이 조공을 바치며 군신관계를 유지해왔던 킵차크 칸국의 통치력은 15세기 중 후반 무렵 힘을 잃어 크림 칸국,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르 칸국 등으로 분열 독립한다.


카잔 칸국Kazan Khanate(1438또는1445~1552)의 수도였던 카잔은 울루 무하마드Ulu Muhammad(바투의 형제인 투가 티무르의 후예)와 아들 마흐무덱Mahmudek이 옛 볼가 불가르 땅에 세웠다. 그러나 100년이 조금 넘어 1552년 6월, 러시아의 이반 4세(재위 1547~1584)가 카잔을 점령하면서 카잔 칸국은 막을 내린다. 이렇듯 킵차크 칸국을 계승한 칸국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서 러시아는 칸국들의 영토를 계승한다. 러시아인들이‘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는 240여 년간의 속박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현재의 크기만큼 넓어진 것을 보면, 240여 년간의 굴욕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카잔Kazan과 가마솥


하루만 묵고 내일 밤 모스크바로 떠나야 하니, 그럭저럭 지낼만한 호텔이면 기차역과 가까운 호텔이 최고다. 튀르크의 분위기를 애써 찾으려는 것도 아닌데 호텔은 마치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키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의 호텔 분위기다. 여행자들의 도착시간이 늘 비슷하니 이른 체크인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별다른 내색이 없이 받아준다. 호텔 주변에는 제법 큰 마켓도 있어 물과 요깃거리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카잔에서는 짧은 일정이어서 주로 택시를 이용했다. 길 위에서 택시를 탈 수 있는 한국과는 달리, 다른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 길에서 택시를 잡기는 여의치가 않다. 막심이나 얀덱스 어플을 이용해서 택시를 부르면 되는데,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얀덱스를, 이르쿠츠크와 카잔에서는 막심을 이용했다.


카잔의 지도를 보면 강변에 크레믈이 위치하며, 크레믈을 보고 나오면 여행자 거리인 바우만 거리가 연결되어 있다.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크레믈과 마주 보이는, Kazanka강 건너편 카잔 패밀리센터 전망대(구글에는 Kazan Wedding Palace라고 나와 있다)를 가보기로 했다. 2018년, 잊을 수 없는 독일과의 경기가 열렸던 월드컵 경기장 가는 길이기도 했다.


카잔 크레믈 성벽


카잔 도심의 왼쪽으로는 볼가 강이 흐른다. 볼가 강과 만나는 카잔카 강 사이를 막아놓은 제방 길인 Dekabristoy street를 통해 강을 건너면 왼쪽으로 카잔 패밀리(웨딩) 센터 Kazan Wedding Palace가 강변에 위치한다. 이름이 말해주듯, 아마도 이곳은 카잔의 공식 결혼식 장소이며, 월드컵 경기장과 가까운 관계로 2018년 월드컵 때는 팬 페스트 존이었던 곳이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가마솥 모양의 전망대는 타타르스탄의 문장에 들어가 있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질란트(타타르 전설에 나오는 몸은 새, 다리는 닭, 꼬리와 목은 뱀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언뜻 보면 용과 봉황의 느낌이 난다)동상이 감싸고 있다. 야영지에서 유르트와 가축들 사이로 커다란 솥을 걸어놓은 시베리아의 보야르Boyar 암각화가 보여주듯이, 크고 우묵하게 생긴 가마솥은 북방 초원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알려진 바로는 가마솥은 기원전 9세기경부터 스키타이와 흉노 등 북방 초원의 유목민들이 사용했으며. 유라시아 대륙에서 구리 솥을 처음 사용한 기록은 스키타이 인들이었다.

멀리 강 건너편에서도 보이는 가마솥 모양의 페밀리(웨딩) 센터 전망대
가마솥 모양의 페밀리 센터를 둘러싼 타타르스탄의 문장 질란트들, 타타르 전설에 나오는 몸은 새, 다리는 닭, 꼬리와 목은 뱀의 모양이다.


주로 양과 같은 육류이겠으나 무엇이든지 넣어서 삶거나 끓여 먹을 수 있었던 솥은 시간이 흐르면서 초원에 널리 퍼졌으며, 중국 쓰촨 성 요리인 훠궈나 일본식 샤브샤브, 우리나라의 설렁탕 같은 요리의 기원이 되었다. 몽골이나 알타이 지역의 넓은 초원에 퍼져 살던 유목민들이 전쟁은 물론, 중요한 축제나 회의 등 한자리에 모이는 곳에 가마솥은 항상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초원의 결혼식에 꼭 필요한 준비물이었으며, 천막들이 있는 중앙에 솥을 걸어놓고 양고기를 끓이며 손님들을 맞았다. 가장 넓은 지역에 퍼져 살던 종족 중의 하나인 튀르크인(타타르)들의 결혼 센터에 거대한 가마솥 전망대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타타르어로 카잔은 가마솥이란 뜻이며, 러시아어 사전에도 카잔казан을 치면 도시의 이름과 함께‘가마솥’의 의미도 같이 나온다. 현재 카잔에는 반반에 가까운 슬라브 인들과 타타르 인들이 어울려 살지만, 킵차크 칸국(13세기) 이전, 볼가 불가르 왕국(11세기) 때부터 볼가강변에 교역도시로 발달한 카잔은 진정한 튀르크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전망대까지 나 있지만, 결혼식이 없어서인지 운행되지 않았다. 의외로 별로 힘들지 않게 걸어 올라간 전망대는, 도시의 사방이 보이는데 강 반대쪽 크레믈이 있는 시가지 쪽이 아름답다. 크레믈은 성채나 요새를 뜻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크렘린(또는 크레믈린)을 말한다. 러시아의 오래된 도시 모스크바나 카잔, 수즈달, 노보고르드 등 20여 개의 크레믈 안에는 보통 도시의 심장 역할을 하는 관공서와 궁전, 그리고 사원 등이 들어있다. 이 중에서 폐허가 심하지 않은 5개의 크레믈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으며, 그중 카잔 크레믈은 가장 아름다우며 타타르 당시의 요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잔 크레믈
걸어서 제방 길을 건너면서 바라 본 웨딩 센터, 센터 왼쪽으로 한참 가면(걷기에는 좀 멀다) 월드컵 경기장이 나온다.

전망대를 들른 후에 월드컵이 열렸던 카잔 아레나를 갈 계획이었지만, 손에 닿을 듯, 찰랑거리는 강물 사이로 길게 난, 낭만적으로 보이는 제방 길을 걷고 싶었다. 처음에 택시로 제방을 건널 땐 이 길이 다리인 줄 착각했다. 수평으로 길게 나있는 흰색 성채인 크레믈을 보면서 다리 같은 둑길을 건넜다. 강변을 따라 길게 낮은 언덕을 둘러싼 나무로 만든 고깔모자를 쓴 탑이 있는 흰색 성벽은 평화로워 보였다. 다분히 중세의 향기를 풍기는, 하얀 벽의 성채를 왼쪽으로 끼며 걷다 보면 왼쪽으로 카잔 크레믈의 입구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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