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집에 낡은 개다리소반이 있었다. 기억하기로 틀이 휘어지고 다리에도 흠집이 많아 오래 전 이미 문밖으로 밀린 신세였다. 신기한 것은 집 안으로 들어온 적 없지만 바지런히 관리됐다는 거다. 여름날엔 잘 닦여 수돗가에 배를 내밀고 누웠다가 찬바람이 불면 부직포에 싸여 창고로 옮겨졌다. 어린 눈에 반질반질한 상판과 울뚝불뚝한 개다리가 귀여웠지만 정을 붙일 수는 없었다. 생김새만큼이나 쓰임새도 분명한 이 소반의 정체는 거지의 밥상이었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중반까지도 가끔 거지가 구걸을 하러 대문을 두드리곤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내가 그들을 맞는 횟수는 줄어갔지만 그 전까지 창고나 마당에서 소반을 챙겨오는 건 내 몫이었다. 식기도 따로 있었다. 밥그릇 우동그릇 그리고 수저 한 벌.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도 살아가는 방식이 있었고 그에 따라 얼굴색이 조금씩 달랐다. 부지런한 이들은 오전에 다녀갔고, 점심이 한창 지나 죽상을 하고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밥과 국을 따로 주실 수 있느냐고 물어오기도 했고 대놓고 반찬투정도 했다. 엄마는 우리집 아침 밥상 그대로라며 말머리를 잘랐다.
빠듯한 살림이기도 했거니와 푼돈을 주는 일은 없었다. 대신 먹을 것을 싸줬다. 거지가 밥을 남기면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배곯다가 병나면 어쩌려고...’ 엄마의 밥상 정책이 형제들에게도 옮겨와 우리는 그들을 반기지도 않았지만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TV보느라 밥상 수발 심부름에 잔신경질을 냈다. 대충 그릇에 비벼주면 되지 거지한테 밥상까지 차려줘야 돼요? 이날 크게 혼이 나서 아직도 개다리소반만 보면 엄마가 입고 있던 앞치마부터 떠오른다. 아빠 직장 야유회에서 나눠준 빨간 줄무늬 앞치마였다. 저 사람들도 다 밥상에 밥먹던 사람들이다. 네가 귀찮은 만큼 엄마도 귀찮다. 오늘부터 밥 비벼줄 테니 방바닥에 앉아서 먹어라. 군데군데 덜 빠진 얼룩이 무늬가 돼버린 낡은 앞치마에 대고 잘못했어요를 몇번이나 했다. 식구들과 떨어져서 방바닥에서 밥 먹는 건 나도 싫었다. 앞치마에서 달큼한 간장 냄새가 났던 것도 같다.
오늘 갑자기 궁금해져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개다리소반에 밥을 받은 이가 얼마나 됐느냐고. "기껏해야 열댓번이나 됐을까?" 엄마에 따르면 자루를 불쑥 내밀면서 먹을 걸 담아달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기보다 떠돌이 구걸하는 팔자에 체면과 염치야말로 사치였을 것이다. 국 좀 데워올 테니 앉아서 먹고 가라고 하면 열에 일곱은 그냥 담아달라고 했고 셋은 평상에 앉아 밥상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유추해봄직한데 엄마가 이런 얘기를 보태셨다. 뜸 하다가 한 번 밥상 받은 거지가 왔다가면 그 뒤로 서너 명이 늘적찌근하게 평상에 앉아 밥상에 밥먹기를 청했다는 거다. ‘누가 말해줬는가도 모르지. 저집 가면 밥상에 차려준다고. 그러다가 또 뜸 하고 그랬는데, 아는 얼굴이 서너 번씩 오기도 했어. 그 중 하나는 공부하다 미친 사람이었는데 키가 조그맣고 삐쩍 말라서 밥을 두 그릇씩 먹고 갔단다.’
소반은 우리가 쓰던 걸 내놓은 게 아니었고 거지가 자주 찾아와 밥차려주려고 시장에서 헐값에 사오셨단다. 싼게 비지떡이라고 수돗가에서 우당탕, 창고에서 와장창 하면서 쉬이 비틀어지더라는 것. 내 눈에는 툼실하고 좋아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중엔 어떻게 됐어?’ ‘버렸지 그걸로 뭐해.’ 밥달라는 거지가 혹시 있을까봐 창고에 한 일년 걸어뒀다가 시골 고모댁에 땔감으로 줘버렸다는 이야기.
물건은 이리저리 자리바꾸는 게 아니라는 어른들 말씀은 백번 옳다. 처음 이름 지어진 대로 잘 쓰이다가 그 이름대로 쓰임을 마감하는 것이 가장 좋다. 더군다나 '밥상'처럼 귀천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야 할 것들은 이왕이면 깨끗하면 좋겠다. 혹은 낡았어도 네 귀퉁이가 반듯하면 좋겠다. 배고픈 걸인의 허기를 달랬던 개다리소반의 앗쌀하고 긍휼한 삶이라니, 좋잖아!